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33)어깨동무의 추억
말년일기 제1234호(2021.2.2)
이득수
승인
2021.02.02 00:48 | 최종 수정 2021.02.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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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는 힘들어도 세상인심은 너그럽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우리는 보통 <죽마고우>나 <어깨동무>라는 단어로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은 시골의 어린아이들이 대나무장대를 기차처럼 줄지어 타고 놀았다는 말인데 그건 옛날 선비들이 한시(漢詩)에 맞게 점잖게 지어낸 말이지 우리 어릴 땐 대밭이나 장대가 그리 흔하지 않아 대나무장대는 어장이나 죽세공품에 쓰는 꽤 귀한 물건이라 두레박자루나 빨랫줄을 괴는 받침대 외에는 결코 아이들이 쉽게 구경할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깨동무>는 <어깨동무 세 동무>라는 노래를 흥얼거린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꽤나 유행을 한 놀이 같은데 지금은 도시건 시골이건 어깨동무란 단어를 거의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깨동무>가 말은 쉽지만 실제로 둘이 어깨동무를 하면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갈 수는 있되 가운데 묻힌 두 팔은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래가지고서는 갑자기 곰이나 호랑이가 옆에서 나타나도 재빨리 대적하거나 활과 창을 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세 사람이 어깨동무를 한 상태라면 능률은 더 떨어지고요.
그러면 이렇게 비능률적이고 불편한 자세는 왜 생겼을까요? 우리는 그걸 아직 씨족국가마저 이루어지지 않아 골짝마다 칩거한 소수의 사람들이 날마다 가족 중의 가장 실한 사내가 자기의 집과 가족과 짐승을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몽둥이를 들고 보초를 서던 시절, 만인대만인의 전쟁이 끝나고 골짝마다 보다 힘이 세고 싸움에 능한 젊은이가 병사가 되어 몇 안 되는 졸병을 거느리고 또 마을의 최연장자가 무당이 되어 마을의 안녕을 빌던 원시적 씨족사회의 작은 승리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곰을 숭배하는 씨족이 오른 쪽 산 너머에서 가끔씩 나타나 젊은이를 죽이고 돼지와 처녀를 훔쳐가던 씨족과 큰 싸움을 벌려 적의 젊은 남자를 다 죽이고 늙은이와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합병 두 씨족이 하나의 부족으로 탄생한 날 부족의 젊은이들이 제단을 쌓고 소나 돼지를 잡는 사이 아낙들을 떡을 찌고 술을 담아 해가 질 무렵 마을의 제일 원로 큰 무당이 둥둥 북을 울려 굿을 하면 모든 부족이 엎드려 절을 하고 다음 부족의 진정한 지도자인 실세(實勢) 젊은 지도자가 그 제물(祭物)인 떡과 돼지고기와 술을 나누어(이는 당시 사람들로서는 일 년에 마을 축제가 있는 한 두 번 대할 수 있는 음식이었음) 같이 음복하면 모처럼 포식을 한 데다 술기운이 슬슬 올라 누구라 할 것 없이 기성(奇聲)과 괴성(怪聲)을 지르며 춤추며 도약하다 마침내 부족이 모두 한 무더기가 되어 집단 군무를 추게 되는데 그게 늙은 사내를 뺀 젊은이들은 주로 발을 맞추어 위로 뛰며 창날을 번쩍거리는 위용(威容)을, 젊은 부녀자들은 강강수월래 비슷한 집단무를 추고 아이들은 그저 대나무작대기나 타고 폴짝폴짝 뛰다 어깨동무를 했을 것입니다. 그 새 처음으로 술이 반쯤 취한 소년은 그 것잡을 수 없는 가슴의 울렁거림을 참지 못해 평소에 좋아하던 순이(順伊)나 분이(粉伊)를 찾아 나서고...
그러나 이 위험한 축제를 오래 끌다간 갑자기 서쪽고개 너머 표범을 숭배하는 씨족이 쳐들어올지 모르는지라 영리한 젊은 지도자는 서둘러 마을주변에 숯 검댕을 칠한 보초를 배치하고 늙은 무당은 차분하게 축제의 마감을 발표하고 젊은 부녀자들이 제기를 수습하고 사내들은 축제의 단을 깨끗이 정리했겠지요.
이 흥겹기는 하나 생존전략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놀이가 평소의 아이들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어깨동무>인 것입니다. 새롭게 같은 부족이 된 본 마을의 혹부리와 삭불이가 이제 같은 친구가 된 동쪽 부락의 육손이와 비딱이하고도 우리는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 친구임을 과시하기 위해 바로 어깨동무를 하고 폴짝폴짝 뛰었을 것입니다.
또 이 어깨동무의 변형이 바로 고대전술인 사열종대(四列縱隊) 행진법입니다. 당시는 겨우 한 두 명 많아야 서너 명이 다닐 수 있는 험한 길밖에 없으니 간혹 좀 넓고 긴 길이 나오면 어깨동무를 활용한 4열종대로 이동하되 직접 어깨를 끼지 않고 나란히 걷기만 하니 무슨 일이 있으면 단번에 사방으로 흩어지고(散開) 바로 그 자리에서 활을 쏠 수 있었으니까요.
(다음 호는 현대의 어깨동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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