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버든 사람 이야기(숨은 선비 서영달 씨)
“그렇지. 바람이 쌩쌩 불고 진눈깨비가 실실 내려 문고리만 잡아도 손이 쩍쩍 달라붙는 한겨울이었지. 아침 묵고 별 할 일도 없어 심심하던 차에 내가 문종이 틈에 유리쪼가리를 찡가 놓은 데로 마당을 내다보는데 말이야.”
진장골짝 너머 남부사람 공동묘지의 다닥다닥한 무덤 사이에 희한하게 널따랗게 놓인 상석(床石)하나에 소먹이는 아이들이 빼곡히 둘러앉고 상석 위에 앉은 봉당골 서구장이 마침 이야기를 시작하는 판이었다.
“그 해는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초가집처마 끝에서 눈 녹은 물이 한여름 낙숫물처럼 떨어지고 담 밑에도 눈이 수북해서 마당에서 키우는 달구새끼들이 꽁꽁 언 마당바닥을 발가락으로 파헤칠 수도 없어 몇 며칠이나 쫄쫄 굶었던 모양이었지.
한날 아침에 암탉을 아홉 마리나 거느린 장닭이 배가 고파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억지로 꼬끼오! 한 곡조를 빼고 아홉 마누라를 쭈욱 둘러보고 주둥이로 그중에 제일 어린 암탉의 벼슬을 물고 후다닥 등더리에 올라탔다 내려오는 순간에 말이야. 세상에나 평소에 좁쌀 한 알 떨어지기가 바쁘게 맬갛게 다 주어 묵어뿌린 마당에 굴따는 양대가 하나 뚝 떨어져있는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장닭이 이기 웬 떡이고 하고 얼른 좌 묵으려는데 옆에 있는 제일 늙은 암탉이
“보소, 영감님. 지발하고 그 양대를 묵지 마소. 난데없이 생긴 음석을 묵으면 반드시 큰 일이 납니데이. 어제 까지도 아무것도 없던 맬간 마당에 이렇게 굴따는 양대가 떨어진 것은 아무래도 뒷집 머슴이 주인 몰래 우리 식구를 하나 잡아 몸보신을 할라꼬 비상(砒霜)을 넣은 것이 틀림없을 낍니더. 지발하고 묵지 마이소.”
하고 통사정을 하는데
“에라이, 이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고? 니캉 내캉 부부가 되어 해마다 병아리를 수십 마리씩 깐 지만 5, 6년에 벌써 자식이 백 마리가 넘는 마당에 아직도 이 하늘 같은 서방을 못 믿는단 말인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구석이 망한다고 했는데 이미 벼슬에 허옇게 서리가 내린 내가 설마 생콩, 불 콩을 모린단 말이가, 아이면 내가 안 묵고 낭구면 나중에 니가 슬쩍 묵을라 카나? 이 시근머리 없는 여펜네야?”
꾸꾸꾹꾹 양 날개를 잔뜩 부풀리고 옆걸음으로 겁을 주면서
“에라이, 재수 없는 안들아! 니가 그라고도 내 본마누라란 말인가?”
“아이구, 영감님. 그 양대를 입에 물면 목구멍에도 넘어가기도 전에 비상인지 사이나인지는 몰라도 영감은 그만 숨도 한 번 몬 쉬고 죽심데이, 지발하고 지 말 좀 들으소.”
“마, 시끄럽다. 이 놈의 여펜네가 기어이 하늘같은 가군(家君)을 능멸하는 것가?”
“아이구, 지발하고...”
사십대 중반, 만날 땡볕에 굽힌 새까만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둘 생기면서 정수리가 희끗희끗한 서영달 씨가 손짓발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시작하자 여남은 살에서 열대여섯의 소먹이는 아이들이 좌우로 씰룩거리는 서영달 씨의 입술을 따라 연방 저들도 입술을 씰룩이거나 눈을 끔뻑이면서
“그래서요? 그래 장닭은 양대를 묵었능교?”
“아이구, 궁금해라. 어서 마자 해 주소.”
독촉을 하는데
“그라면 야들아, 그 장닭이 양대를 묵었겠나? 안 묵었겠나?”
도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묵고 죽었다, 안 묵었다며 설왕설래 하는 아이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그래, 묵고 죽었겠지. 배가 너무 고프기도 하고 만사 지 맘대로 하는 장닭이니까. 그래서 몽땅 과부가 된 암탉들은 이듬해 재랄은 낳았지만 삐가리는 못 까고...”
후우, 한숨을 몰아쉬며 먼 산을 보았다.
(그래 알을 놓고도 못 까는 닭이나 다름없지. 그 어려운 사서삼경을 읽고 초사에 당시를 읊으면 어데 씰 데나 있나? 심심해서 촌 아아들 잡아놓고 이바구나 해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봐라, 야들아, 여 머시마도 많지만 가시나도 아홉이나 되네. 열여섯 살이나 되는 금찬이 니는 대충 알겠지만 그래 사람 사는 것이 형편이 안 되고 묵을 기 없으면 그 장닭처럼 눈에 불을 켜고 죽고살기로 묵을 것만 찾다가 생콩인지 불콩인지도 모르게 죽어뿌고 또 그런 서방을 만난 암탉들은 아무 잘 못도 없이 평생을 고생하는 기라. 시절을 잘못 만나고 서방을 잘못 만내서...”
“혼자 중얼거리는데.”
“아이구, 제헙어라. 아재요, 다른 이바구 하나 해주소.”
아이 하나가 금방 싫증을 내자
“그래, 내가 느그들 대꼬 시방 무슨 이약하는 것꼬?”
서영달 씨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잠시 평리이장을 지내 서구장으로 불리는 영달씨는 근동에서 알아주는 한학자이자 시인인 석암선생으로부터 손수 글을 배운 데다 언양영명학교를 나온 신근수 씨와 진장의 조두천 씨를 같은 제대로 된 학문을 배운 사람을 빼고 그나마 서당 근방에라도 가본 사람으로 마을에 길흉사가 생기면 사성과 물목을 쓰고 축문과 제문을 짓는 선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신근수 씨는 그 암울한 일제하에 뜻있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작천정에 조선청년의 기상을 기릴 청사대(靑史臺)를 건립하고 기미년 독립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남이 알아줄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해 젊어서부터 언양바닥에서 알아주는 선비요, 유지였다. 또 만년에도 읍 단위의 각종 행사나 국경일의 기념식, 또 여러 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하여 축하연설을 하거나 만세삼창을 부르며 학교에 가던 아이들은 물론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절고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할 정도인데 반해 서구장은 비록 속에는 그 어려운 한문이 들었지만 겁쟁이가 이불 속에서 만세 부르듯이 아무 영금도 없이 그냥 농사나 짓는 반벙어리로 알려져 있었다.
영달씨의 부친 직동서손은 원래 버든이 아닌 신불산 바로 아래 들내사람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비가 와 들일을 못 하면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삶고 길가다 똥오줌이 마려워도 억지로 참고 제 집으로 돌아와 일을 볼 정도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 한 살림을 이룬 참으로 신실한 농사꾼이었다. 중년이 되어 이것저것 좀 생각을 해볼 형편이 되자 위인이 좀 모자라는 장남대신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총기가 좋은 둘째아들 영달씨를 큰 맘 먹고 서당에 보내기로 했다. 아무리 일제의 서슬이 시퍼래도 언젠가 왜놈이 망하고 조선 땅을 되찾으면 진서(眞書, 한문)를 읽은 자신의 아들이 하다못해 군수자리라도 하나 꿰차고 다시 가문을 일으킬 것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해방이 되어 남북이 갈라지고 미국사람이 들어오자 영어나 신학문을 익힌 사람이 빛을 보고 그런 진서를 읽은 사람은 아무 소용도 없는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만 것이었다. 6·25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잠깐 버든구장을 맡아 옛 성군 요순우탕(堯舜禹湯)도 모를 정도로 머릿속은 텅 비었으면서 큰소리만 탕탕치는 면장과 말다툼을 하고는 그만 둔 적이 있기는 하지만.
기울어가는 살림을 만회하고자 장터에 가까워 벌어먹기 좋다는 버든마을로 이사를 와 좀 모자라는 장남을 장가보내 조부잣집 과수원에 허드렛일을 돕는 반머슴으로 살림을 내고 차남 영달씨를 장가보내 데리고 살았지만 6·25가 나고 서른이 훨씬 넘어 이제 아무데도 갈 데도, 불러줄 데도 없는 처지가 된 것을 늘 안타까워하며 이제 살림마저 기울어 일 년 내내 비린 반찬 한 번 구경하지 못하고 살다 재작년에 세상을 뜬 것이었다.
평생 자신의 입신출세만 바라던 부담스런 아버지가 막상 세상을 뜨자 영갑씨는 벌써 마흔 셋의 나이로 무엇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한 평생을 보내고 무엇 한 가지 보람을 남기고 눈을 감을 건지 종종 생각하기 시작했다. 슬하에는 이미 대주, 재주, 삼주의 3형제와 세 명의 계집애들이 태어나 6남매가 오롱조롱 했고 아직도 건강한 아내는 또 다시 몇 명의 아이를 낳을지 모르는 판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자신의 시대는 이미 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자신도 자식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국민학교에 다니는 장남 대주가 공부를 꽤 잘 해 학년 전체의 1등을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옳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그 애가 도회지의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 판검사나 국회의원, 아니면 의사나 사업가라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전 재산인 갈배기 너마지기와 집을 팔아 너무나 메마른 황토 땅이라 지나가는 철새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간다는 봉당골 황무지 3000평을 사 황토흙 블록을 찍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어 여덟 식구가 이사를 한 것이었다.
단순히 고구마나 무 배추를 심어서는 아이들 공부는커녕 여덟 식구 목구멍도 감당하기 힘들 형편이라 그는 읍에 하나 밖에 <하나서점>에 가서 특별히 주문한 과수원예서적을 겨우내 탐독하고 이듬해 시험 삼아 수박을 심었는데 하도 정성을 들여선지 날씨가 좋았는지 단번에 성공이었다. 리어카 가득 수박을 싣고 언양장에 가서 하루에 나락 몇 섬 값의 수박 값을 쥐고 돌아오는 날 그는 절로 신명이 나서 가련다, 떠나련다로 시작되는 <유정천리>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배나무도 300주나 심었다.
그렇게 밥걱정을 놓자 그의 가슴에는 또다시 뭔가 아쉽고 허전한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겨우 수박이나 심고 배나무나 키우는 일이 정말 한 사내가 평생을 바칠 일이란 말인가? 굳이 공자님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아니더라도 글을 읽은 사람답게 뭔가 자신의 뜻을 펴보고 글을 남기고, 사업을 남기고 그러니까 남의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를 하거나 남이 자신을 알아주거나 기억하는 무엇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버든에 이사 온 후 30년 가까이 막역하게 지낸 상천엄손 수암씨를 비롯한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막걸리를 한 잔 할 상대가 간혹 한둘이 있어도 늘 농사일에 피곤한 그들이 영달씨 가슴에 들어있는 공맹(孔孟)의 사상이나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이해하지 못하니 아무 소용이 없었고 글을 못 배운 아내 역시 말상대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하느라 지붕이 낮은 슬레이트집에서 속옷차림으로 죽은 듯이 너부러져 누웠던 영달씨가 오후 네 시나 되어 끝물 수박이나 따려고 문지방을 내려서는데 장승백이골짜기 건너 맞은 편 남부사람공동묘지에 소먹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것이 아닌가, 옷이나 신발을 제대로 갖춘 아이도 더러 있었지만 아예 러닝도 없이 웃통을 벗었거나 신발도 없는 맨발의 아이들이 무엇이 즐거운지 와아, 고함을 지르며 달리고 추격하고 줄을 넘거나 손뼉을 치며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헐벗었지만 천진한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의 아이들을 보는 그의 뇌리에 번쩍, 섬광처럼 생각하나가 떠올랐다. 그렇다. 저 아이들을 가르쳐보자는 생각이었다.
비록 제대로 된 서당을 짓고 학동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옛 선비들이 벼슬에서 물러나면 호젓한 초당을 짓고 두서넛 후학을 가르치듯 저 몽매한 농사꾼의 자식들이 제대로 세상을 알게, 험한 세상에 부딪힐 때 지혜롭게 헤쳐 나가도록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조용조용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고 지혜를 심어주면 그 또한 한 사내의 업(業)이 되는 것이었다.
그까짓 큰돈도 되지 않는 끝물수박을 팽개치고 골짜기 하나를 건너 공동묘지에 접근한 영달씨가
“야들아!”
소리치자
“아이구, 대주아부지!”
“어어, 잔 아부지!”
조카 옥필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소먹이는 데 좀체 나타나지 않은 어른이 온 것을 보고 궁금해 하고 나이가 좀 든 아이들은 혹시 자기들 몰래 소가 수박밭을 덮쳐서 호통 치러 온 줄 알고 여태껏 버려두었던 소떼에 눈길을 돌리는데
“야들아, 내 어깨 좀 주물러주면 옛날 이바구 해주께.”
하고 그 중 큰 무덤 앞의 상석(床石)에 앉자 주춤주춤 아이 몇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한참 후엔 모두 비잉 둘러앉았다. 이어 괴물처럼 못 생긴 부인이 임진왜란이 되자 왜적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우고 전쟁이 끝나자 그 못 생긴 얼굴의 허물이 벗어져 다시 절세미인이 되는 <박씨전>이라는 신출기묘한 이야기로 아이들의 호기심을 단번에 자극했다.
그리고 이튿날은
“이야기 잘 듣는 아아들은 내가 수박 주꾸마.”
끝물수박 두 개를 쪼개 놓으니 안 그래도 배가 출출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엉겨 붙었다. 그날은 장화홍련전을 끝내고 춘향전의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와 일부러 파의폐립 거지행세로 월매를 찾아가 찬밥을 얻어먹는 이야기를 하고나서
“야들아, 너거 아까 들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하는 게눈이 뭥고 아나?”
묻자
“그 기사 개 눈이 개 눈이지 어데 소 눙까링교?”
극심한 경상도사투리로 아예 게눈의 <게>자가 발음이 안 되는 아이들이 이구동성인데
“그 기 아이다. 사실 경상도사람들 발음은 <게>자나 <개>자가 잘 구별이 안 되는데 사실 아까 나오는 <게>는 집에 사는 <개>가 아이고 물에 사는 <게>, 그러니까 복걸에 굴을 파고 사는 기, 와 <기장> 끓이묵는 <기>란다. 알겠제?”
“야.”
“그래. 그래야 후제 너거가 커서 사회에 나가도 무식하다는 소리를 안 듣지. 알겠제?”
이러면서 한해 여름 내내 조웅전과 양반전, 심청전, 홍길동전과 사씨남정기, 수궁가를 거쳐 삼국지와 손오공까지 이야기를 다 들려주었다. 그 중에 심청전의 뺑덕어미가 코 큰 총각 떡 사주는 이야기와 손오공이 별별 둔갑을 다 하는 대목에서는 아이들이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꺼뿍 넘어가기도 했다. 어느 듯 초가을이 되어 이제 곧 추석이 지나고 다시는 소를 먹이지 않을 때쯤에는
“야들아, 너거 수궁가에서 토끼가 거북이를 속이고 제 간을 빼서 널어놓았다는 산이 어덴고 아나?”
뜬금없는 물음을 던지고는
“그 기 저 작천정안에 있는 신불산 옆의 간월산이란다. 사람들은 보통 달리기시합을 하는 토끼와 거북이를 생각해서 토끼가 거북이를 속인 것으로 아는데 사실 용왕님의 신하는 토끼가 아닌 자라, 그러니까 그 이야기 이름도 자라 별(鱉)자 별주부전이라고 한단다. 와 머시마들 알라때 시락뿌리처럼 오구라든 자래꼬치말이다, 자래!”
하자
“피이, 그렇지만 언양에는 자래가 멸종되고 없다카던데요.”
누가 토를 달자
“아이다. 지금은 사람이 많아 하도 잡아서 그렇지 옛날에는 어별(魚鼈)이라캐서 자라나 물고기나 비슷하게 많았단다. 그래서 자래가 토깨이, 하도 잘 도망가서 토낀다고 하는 토끼를 를 잡으러 간월산까지 갔겠지. 하여간 저 산 이름이 토끼 간을 말룬 간(肝) 간, 그러니까 놀래면 간 떨어지는 그 간자 간월산이란 말이다. 알겠제?”
노골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은 날 금찬이가
“아저씨, 인자 소미기다 이약 들을 날이 얼매 안 남은 거 같심더. 오늘은 진짜로 재미있는 이약 하나 해주소.”
하며 영달씨를 올려다보자
“야 좀 봐라. 다들 이바구라 카는데 니만 호문차 이약이라 카네. 너거 아부지가 이약을 잘 해서 그렇나? 그렇지, 니는 인자 너가 아부지 명촌어른한테 이약해주라카지?”
“아임더. 울 아부지 이약은 겨울철마다 하도 들어서 인자 귀에 못따까리 앉었심더.”
“그래 그라면 인자 이붓동네 이약이나 시작해볼까?”
영달씨가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너거 남천내공굴 건너서 방천묵이동네를 타고 성당 지나고 부리시봇디미 지나서 상북면 입구에 천전동네가 능산동네, 향산동네가 있는 거 아나? 혹시 가 본 사람이 있나?”
모두가 고개를 젓는지라
“좌우간 저 걸뱅이, 땅꾼동네가 있는 봉꼴산 너머 천전동네가 있는 줄 알아라.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능산동네, 향산동네가 있고.”
뜸을 들이고는
“그 천전마실에는 이상한 방구돌이 두 개나 있단다. 그 하나는 천전마실뒤에서 명촌과 화천마실사이에 과부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고 거기에 움푹 파진 궁가리가 있는 방구돌이 하나 있단다. 참, 그 과부성은 임진왜란 때 거게 진을 쳤던 의병들이 몰죽음을 당해서 과부성이라 카고...
하여간 그 움푹 파진 궁가리가 있는 방구돌이름이 희한하게도 생피방구란다. 그래서 천전이나 명촌마실 총각이나 머슴, 홀아비들이 작대기를 가지고 가서 생피방구 궁가리를 슬슬 찝적거리면 맞은 편 향산, 능산동네 과부, 처녀, 유부녀 할 것 없이 여자들이 몽땅 바람이 나서 생피를 붙고...”
“아저씨, 생피가 뭔데요?”
“아이구야, 너거가 생피를 알 수가 없제? 알아서도 안 되고. 좌우간 남녀가 잘못 만나는 거를 생피라 칸단다. 한마디로 온 마실이 절딴나도록 집구석 망해 묵는 거란다. 좌우지간 이 이약은 너거가 앞으로 자라면 지 여자, 지 남자만 알고 조신하게 살아라는 뜻이고...”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훔친 영달씨가
“그래 이번에는 용화사마애불이야기를 해야겠구나. 보통 절들은 명산대찰이라 캐서 깊은 산중에 있는데 그 천전동네 앞들에는 희한하게 논 가운데에 쪼깨는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용화사는 바로 절 마당에 있는 방구돌에 부처를 새겨놓은 때문에, 그 마애불부처가 용해서 생긴 절이란다.”
“아저씨, 마애불이 뭔데요?”
또 누가 묻자
“그래, 너거 작천정 가는 수남동네 앞 사꾸라나무밑에 돌부처가 한 쌍 있는 거 알제. 그걸 보통 돌부처를 말하는 벅수라카는데 사실은 정승판서나 높은 벼슬한 사람 무덤에 세우는 문인석, 무인석 한 쌍이란다. 그렇게 부처를 쪼깨는 돌에 새기는 기 아이라 커다란 방구돌이 서 있는 채로 그대로 통째로 새기는 것을 마애불(磨崖佛)이라 칸단다. 좌우간 그건 그 정도로 알고...”
순간
“저, 저거 누 소고? 장심배기골짜기에 다 내려갔다. 너무 나락 다 뜯어묵기 전에 얼른 잡아 오너라.”
손으로 가리키는 순간 사내아이 너덧이 벼락같이 달려갔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사이 숨을 고른 영달씨가
“다 왔제? 이바구 들으면서도 소는 한 분씩 쳐다봐래이. 하여간 한 해는 천전마을에 나락을 거두는 공출이나 군인 간 사람대신 품을 내야하는 부역이 엄청 많이 나온 기라. 하도 엄청나서 감당이 안 되자 마을어른 몇이 현감이 있는 현청에 들어가서 원님에게 통사정을 했단다. 그러자 호방이라는 아전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 거리며 마을로 들어와서 집집이 돌면서 열다섯에서 오십까지 장정을 확인하는데 아무리 시알리 봐도 호방의 장부보다 하나가 모자라 노인들이 거 보라고 따지자
‘요 있네!’
한참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호방이
“아이구, 요게 한 명이 더 있네. 이 기 장정이 아이고 뭐고?”
용화사 마애불을 가르치며 도로 큰소리를 텅텅 치더란다.
“에이, 엉터리. 말도 안 된다.”
“그래. 물론 엉터리지. 그러나 후제 너거가 사회에 나가면 많이 배우거나 돈 많고 힘센 사람들이 무식하고 없는 사람들을 이래저래 속여 묵는단다. 말하자면 세아 놓고 간 빼묵는단 말이다. 우쨌든동 너거는 한 자라도 더 배우고 정신 바짝 차려서 속지 말고 살아란 말이다. 알겠제?”
“아, 알았다. 믿지마라 미국놈, 속지마라 소련놈이란 말이지요.”
그중 나이가 많은 금찬이가 받자
“그래. 그렇지만 어데 사람 속이는 기 미국사람, 소련사람뿐이겠나?”
“아, 나도 알겠다. 보리경사 쓰는 서울사람 믿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 기 아이다. 처자가 시집 안 간다 카는 거.”
“나 많은 사람이 어서 죽고 싶다 카는 거.”
“장사가 본전에 판다 카는 거.”
“...”
어느새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사이로 이제 산을 내려가는 소 요롱소리를 들으며 서영달 씨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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