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운암영당 소장 최치원 영정(왼쪽)과 최치원이 왕명으로 지어 하동군 화개리 쌍계사 경내에 우뚝 서있는 진감국사대공탑비.
필자는 지난 3월 경남 하동 쌍계사 인근 마을에 들어와 현재 생활하고 있다.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48세 때인 1080년에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쓴 시 <유배되어 임고정에 거처하며遷居臨皐亭>에 나오는 시구인 ‘피로에 지친 말의 안장을 푼疲馬解鞍馱’ 듯한 느낌이랄까. 30년가량의 직장생활로 몸과 마음에 병이 생겨 엉망인 상태에서 훨훨 털고 벗어난 기분이다. 그리하여 그간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반구제기反求諸己’, 즉 모든 것의 잘못과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지리산을 좋아하던 필자가 이 일대와 불일폭포를 수차례 다니면서 지금의 마을에서 생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인연이 된 것이다. 이 골짝에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급제한 후 벼슬살이를 하다 귀국한 고운 최치원(857~?)의 여러 흔적이 산재해 있다. 또 옛 선비들이 불일폭포 주변을 청학동으로 꼽은 문학작품들이 많고, 쌍계사와 관련한 여러 기록과 전설 등이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요즈음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불일폭포에 갔다가 내려오면서 최치원이 지은 문장으로 새겨져, 쌍계사 경내에 우뚝 서있는 진감국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를 둘러본다. 이런 연유 등으로 연재물의 첫 소재로 최치원을 꼽았다.
알다시피 그는 당나라에서 문장력으로 신라의 국위를 크게 떨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중국의 『신당서』 「예문지」와 일본의 고시선집인 『천재가구千載佳句』에도 그의 작품이 실려 있을 정도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시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했고, 현 경남 함양군 군수 격이었던 천령태수를 지내면서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호안림인 ‘상림’을 조성한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도 문장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그가 귀국하여 조국인 신라의 발전에 헌신하려고 했던 큰 포부가 여러 이유로 좌절되어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거를 하다 세상을 버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는 이 지면에서 최치원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중심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당대 신라 최고의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그의 이상 및 고뇌를 독자들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필자 소장의 1834년 간행본인 계원필경집.
주지하듯 최치원崔致遠은 857년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해운海雲, 호는 고운孤雲이다. 868년에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중국에 유학했다. 그의 아버지 최건일이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모질게 말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 배경에는 신라의 완강한 신분제와 그 속에서 육두품이라는 한계를 절감한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의 신라는 왕족인 진골귀족 중심의 사회가 아니던가.
육두품은 진골 다음가는 신분이었지만, 각 행정 관부의 장관인 영令에는 취임할 수 없어 신라 사회의 주도 세력에는 속하지 못하였다. 즉 육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육두품 출신 중에는 이런 한계를 넘어서고, 학문적 또는 종교적 전문가로 왕의 측근이 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자제들이 제법 있었다. 최치원도 그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무려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에 건너간 최치원은 앞 뒤 보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당에 간지 6년 만인 874년 9월, 18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2년 뒤인 876년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 위尉에 임명되어 지방 치안을 맡았다. 현위는 종9품의 최하 말단 지방관직이었다. 젊은 최치원이었기에 그 직책에 만족할 수 없었다. 보다 높은 관직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등용문인 박학굉사과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880년 봄에 있어야 할 그 시험이 당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없어져버렸다. 그러다 그는 회남절도사였던 고병高騈(?~887)과 인연이 되어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 밀매를 하던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어 토벌할 때 최치원은 그의 종사관으로 일을 하였다. 그때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을 썼다. 그 내용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 …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
고병은 황소가 점령한 지역마다 이 글을 붙여 황소의 반란이 잘못된 것임을 알렸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최치원의 이름은 당나라 전체에 회자되었다. 최치원은 이 격문으로 문명을 천하에 떨쳤던 것이다. 최치원은 그 공을 인정받아 도통순관직에 올랐으며,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붉은 주머니이다. 최치원이 이것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중국 황제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최치원은 고병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문서 작성 사무를 맡아 무려 1만 여 수의 공문서와 사문서를 작성하였다. 최치원과 관련한 이러한 여러 사실을 두고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는 “『당서』에 최치원의 열전이 빠진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문재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만큼 최치원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당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최치원은 헌강왕의 환대를 받으며 885년 3월, 29세의 나이로 17년 만에 고국 신라로 귀국하였다. 귀국할 무렵 그는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펼칠 희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면 최치원의 귀국기 시 중에서 포부와 기대가 잘 드러내고 있는 칠언율시 <바위 위의 작은 소나무石上矮松>를 한 번 보자.
不材終得老煙霞 재목이 되지 못해 끝내 자연 속에서 늙을 수 있었으니
澗底何如在海涯 골짝 아래가 어찌 바닷가에 있는 것만 하리오.
日引暮陰齊島樹 저녁 해는 그림자 끌어 섬의 나무와 가지런하게 하고
風敲夜子落潮沙 밤바람은 솔방울 두들겨 조수 이는 모래 위에 떨어뜨리네.
自能盤石根長固 바위 속에 서려서 뿌리가 절로 단단하니
豈恨淩雲路尙賖 어찌 구름 뚫을 길 아직 멀다 한탄하리오.
莫訝低顏無所愧 키 작아도 부끄러울 것 없음을 의심하지 마시오
棟樑堪入晏嬰家 안영의 집 동량으로 너끈히 들어갈 터이니.
‘바위 위의 작은 소나무’의 생장 환경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으며, 온갖 풍상을 견뎌내야 생존할 수 있다. 최치원은 이러한 나무를 보면서 타국인 당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어려운 여건과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문명을 떨친 자신의 지난 세월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연을 통하여 신라에 돌아가면 자신의 웅대한 정치적 이상을 그려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당나라에서 성공하여 금의환향하고 있다. 남의 나라에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당에서는 자신이 한낱 작은 소나무로 비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고국으로 돌아간다. 당에서 배운 지식과 정치적·행정적 경험이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처럼 신라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자산이 되리라고 스스로 장담하고 있는 것이다.
귀국한 그는 곧바로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되어 왕의 측근으로 역할을 하였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측근에 두고 자문을 구하였다. 그들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정치적 역량을 인정받았던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최치원은 왕 가까이서 당에 보내는 국서 작성은 물론 비문과 기記, 찬讚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많은 문장을 지었다. 그 중 왕명을 받아 지증대사숙조탑비명, 대숭복사비명, 진감국사대공탑비명,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등을 짓는 등 불교관련 저작도 많이 썼다. 이는 그가 당에서 불교에 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치원이 총 20권으로 된 시문집인 『계원필경집』을 헌강왕께 바친 것은 귀국한 이듬해인 886년이었다. 이 책은 그가 당에서 고병의 휘하에서 활동할 때 지은 1만여 수의 시문 중에서 시 50수, 문 320편을 직접 선별하여 20권으로 엮은 것이다. 제목 중 ‘계원’은 문장가들이 모인 곳을 말하며, ‘필경’은 군막에 거주하며 문필로 먹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권부터 14권까지는 879년 10월 이후 885년 3월 이전까지 고병의 휘하에서 황소를 비롯한 반란세력들과의 대치상황에서 발생한 여러 정치·군사적 사안을 다룬 것이고, 15·16권은 도교·불교와 관련한 글이다. 17권 이후부터는 주로 최치원 자신과 관련한 글을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문집의 형태로 전해지는 신라 유일의 자료인 계원필경집은 고려와 조선시대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문신인 서유구(1764∼1845)가 호남 관찰사로 있을 때 문신인 홍석주(1774∼1842)가 보관하고 있던 이전 책을 바탕으로 1834년 전주에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로 4책을 간행하였다. 그 이후로 1918년과 1930년에도 간행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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