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의 쌍계사 들머리에 있는 쌍계석문. 왼쪽 바위에 '雙溪' , 오른쪽 바위에 '石門'이라는 글자가 또렷한데, 최치원의 친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 하동 쌍계사 인근의 야생차박물관에 갔다가 최치원 전시관 벽면에 적혀 있는 ‘고운 최치원 생애’를 유심히 보았다. “888년 하동 쌍계사에 머물면서 진감선사대공탑비문 작성”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가 과문하여 최치원이 구체적으로 언제 쌍계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점은 나와 있지 않지만, 『여지승람』에 최치원이 쌍계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쌍계사는 지리산에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최치원)이 여기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뜰에 오래된 괴목이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얽혀 있으므로, 그 절의 승려가 다리로 이용하는데, 이 나무도 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문처럼 서서 대치하고 있는데, 선생이 손수 ‘쌍계석문’ 이라고 썼다 한다. … … 사찰 북쪽에 고운이 올랐다는 팔영루의 옛터가 있는데, 지금 거처하는 승려인 의공이 자재를 모아 누대를 일으킬 예정이라고 한다.”
최치원은 38세 때인 894년에 국왕인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라는 정책 건의안을 올렸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건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 침몰해가는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시정 개혁을 건의한 것이었다.
국가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려는 그의 노력을 왕이 높이 산 때문이었을까. 최치원은 육두품의 최고관직인 아찬에 오른다. 그렇다고 시무책이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데는 물론 진골귀족들의 반발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전편에서도 밝혔듯이 당나라에서 신라로의 귀국은 최치원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포부를 펼칠 수 있는 장이었다. 즉 최치원이 이상적으로 꿈꾸었던 자신의 미래가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왕조 말기의 증상이 팽배해지던 격동기였다. 게다가 자신을 지지해주던 헌강왕과 정강왕이 886년과 887년 7월에 차례로 죽음을 맞게 된다. 헌강왕과 정강왕 시절에는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왕명을 받들어 일을 하던 최치원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왕의 측근인 시독을 맡아 헌강왕 가까이에서 국가의 여러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았던가.
신라 말기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최치원이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장벽이 높아져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점차 벌어졌다.
최치원이 이처럼 힘들 때 읊은 시인 <봄날에 지우를 불러도 오지 않기에春日激知友不至>를 한 번 보자.
옛날 고생 심했던 장안의 일 늘 생각나는데 每憶長安舊苦辛
고향 동산 봄날을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으랴. 那堪虛擲故園春
산놀이 하자는 오늘 약속 또 저버리다니 今朝又負遊山約
속세의 명리 좇는 사람 내가 왜 알았을까. 悔識塵中名利人
최치원은 벗과 마음껏 고향의 봄을 즐기자고 약속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입신하기 위하여 얼마나 힘들게 고생하였던가. 그럴 때마다 고향 생각은 왜 그리도 많이 나던가. 그때를 생각하며 벗과 산놀이 약속을 하였지만 친구는 또 어기고 말았다.
이는 최치원을 지지하던 왕들이 사망하고 난 후 그에 대한 주변의 경계가 예전과 같지 않자, 산놀이를 약속했던 그 벗이 최치원과 가까이 하기를 저어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사람은 그 벗 한 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최치원은 점차 신라사회에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최치원이 지방관인 태산군(현 전라북도 정읍)과 부성군(현 충청남도 서산), 천령군(현 경상남도 함양)의 태수로 전전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의 신라는 889년 사벌주(지금의 상주) 지방에서 원종과 애노를 지휘자로 하는 봉기가 일어난 이후 혼란이 확대되면서 후삼국 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최치원은 “아, 나의 꿈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는 자괴감이 크게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포부를 포기해야만 하는 위기를 맞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견제하고 배척하는 귀족들이 많아지자 결국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그 희망과 포부는 점차 좌절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최치원이 태수직을 맡아 외방으로 돌았던 데는 귀국 초기에 가졌던 기대감이 이미 쇠하였고, 이제는 자신이 딛고 선 현실의 허약한 기반을 실감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였지만 자신의 이상을 마지막으로 실현해볼 목적에서 시무책을 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진성왕에게 시무책을 올리고, 895년부터 898년 사이에 관로에 들어섰지만 최치원은 898년 11월에 아찬직에서 물러난다. 진성왕이 내물왕계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넘기자 최치원도 정계를 떠나게 된다. 그는 육두품의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되어 개혁을 펼치려 했지만 중앙 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서는 육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1606년(선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 오운이 지은 역사책인 『동사찬요』에는 “공(최치원)이 한 몸에 얻어 쌓은 것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이 분명한데 사람과 시대가 서로 맞지 않고 명운과 재질이 서로 어울리지 못했으니, 이 어찌 천고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최치원이 자신의 포부를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좌절했다는 말이다.
최치원은 헌강왕·정강왕·진성왕으로 이어지던 경문왕계와 운명을 함께 한 셈이다. 그는 이제 신라에서 더 이상 운신할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최치원이 은거로 들어가는 기점을 대개 이때로 잡는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치원이 48세 때인 904년 봄에 법장화상전을 저술한다. 이 저서의 ‘후서後序’를 통해 904년 당시 그가 혼란도 피하고 신병치료를 위해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52세 때인 908년에도 그의 저술이 나타난다.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로, 최치원의 문장 중 저술연대가 밝혀진 마지막 작품이다. 따라서 은거를 시작한 후에도 908년까지는 세간과 완전히 격리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최치원은 자신의 역량을 조정에서 알아주기를 끊임없이 갈망하였다. 그가 890년에 지은 ‘무염화상비명’인 만수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를 보면 중국 한나라의 개국 공신인 장량과 관련한 고사를 하나의 글에서 네 차례나 인용하고 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최치원은 자신이 장량과 같이 천하의 존망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최치원은 자신과 같은 인재가 신라에는 반드시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피력하였던 것이다.
왕이 최치원이 올린 시무책을 가납한 후 그를 아찬으로 삼았을 때는 어지러운 신라의 실질적인 변화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묶인 사회여서 시무책으로 인해 오히려 진골 귀족들과 간신들의 견제와 배척만 더 커지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에는 그 아찬 자리마저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듯 시간이 흐를수록 최치원의 절망과 좌절은 더욱 깊어지고, 차츰 차츰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접으며 체념하게 된다.
최치원이 불교 관련 저술활동이나 스님들과의 왕래를 통해 점점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데, 이러한 그의 행보는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데 적잖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909년부터 최치원은 속세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만다.
최치원이 속세을 떠난 데는 당나라의 멸망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그에겐 제2의 조국과도 같은 당이 907년 멸망하자, 최치원은 이미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며 도탄에 빠져버린 신라도 결국 머지않아 그리될 것임을 예감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국인 신라를 배반하고 후백제나 고려를 섬길 수도 없어 마침내 완전히 속세를 떠나 모든 세상사와 번뇌를 떨쳐버리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교관련 저작에 열중하다보니 불교에 더 쉽게 몰입하고 심취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 심취는 최치원이 자신의 정치적 포부와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에 좌절했지만, 점차 그것을 체념하고 속세의 욕망을 버림으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쌍계사 뒤 불일폭포로 가는 산길 옆에 있는 환확대(喚鶴臺). 최치원은 말년에 이곳에서 학을 불러 노닐다 불일폭포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최치원의 유명한 작품으로 가야산에서 읊은 시 <제가아샨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다.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狂奔疊石吼重巒
지척 간의 사람의 소리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人語難分咫尺間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常恐是非聲到耳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이 마주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서도록 하였다. 그곳이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가야산 독서당이다. 이곳은 온 산을 포효하는 세찬 물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니 지척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 흐르는 물소리 덕분으로 세상의 시비 소리가 귀에 들릴까 노심초사하던 마음을 잊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가야산 독서당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소리가 소리를 잊도록 하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오히려 시름을 잊으려는 최치원의 그 방식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신라 사회에서 밀려난 비운의 지식인이 토해내는 절규이기도 한 것이다.
최치원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908년 말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술 중 현재 『계원필경』과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최근 필자가 답사한 바로는 쌍계사 인근에 최치원의 친필이라는 ‘쌍계석문’ 외에도 ‘세이암’ ‘삼신동’ 등 그가 썼다는 각자가 각각 있다. 또 쌍계사 뒤 불일폭포로 가는 산길에 그가 학을 불러 타고 놀았다는 ‘환학대’라는 큰 바위가 있다. 그리고 필자가 살고 있는 화개골에는 최치원이 불일폭포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참고문헌 : 최치원 저(이상헌 옮김), 『계원필경집』·『고운집』. 류종목, 『정본완역 소동파시집』1~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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