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문

박선정 승인 2019.06.15 15:48 | 최종 수정 2021.06.04 22:08 의견 0
박선정

우리는 몸 안에 기생충 한마리쯤 데리고 산다. 보이는 곳만 열심히 씻고 닦으면서 그들의 존재를 애써 잊고 있을 뿐이지, 우리 몸 안에는 온갖 음식 찌꺼기와 똥과 오줌이 함께 있고 그 속에는 그것을 먹고 사는 기생충들이 존재한다.

얼핏 보더라도, 영화 속 송강호의 가족들은 '기생충'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선균의 저택 지하에 숨어 사는 그 부부 역시 이러한 '기생충'이고 말이다.

첫 눈에 이 영화는 이로운 균인줄 알고 기생충들에게 속아넘어가(영화 속 이선균의 아내는 정말 잘 속는다) 먹잇감을 나눠주었더니 그 기생충들이 암같은 존재가 되어 숙주를 잡아먹는 이야기였다. 기생충은 초기에 약을 먹어서 알까지도 싹 없애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영화?! 나의 불편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 <기생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더 양분화하는 빈부의 격차를 아주 냉소적이고 극단적으로 대조시켜준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를 상징하는 사장집 사람들 또한 한진그룹 가족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즉, 가난하다고 착하고 순수한 것도 아니며, 부자라고 악하고 탐욕적이며 가난한 이들을 홀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불편함을 느낀다. 가난에 대한 어떠한 핑계거리도 없지 않은가. 부자에 대한 어떤 흉도 볼 수 없지 않은가.

영화 속 저택에 사는 이선균의 가족은 범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탐욕적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의 몰락이 타당하고 정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젊고 잘 생기기기조차 한 사장은 가정적인 남편이자 자상한 아빠이다. 게다가 그 사장집 사모님은 가사도우미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인간적이고 순진하여 잘 속아넘어가는 귀여운 여인이다. 그 집 아이들 역시 이기적이고 무례한 아이들이 아니다. 송강호 집 아이들보다 오히려 더 순진하고 순수해 보이는 흠잡을 데 없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관객들을 더 언짢게 만든다.

영화의 다양한 장면 중에서 가장 불쾌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아마도 송강호가 사장을 찔러 죽이는 장면일 것이다. 단란한 가정의 흠잡을 데 없는 한 가장에게 끝내 칼을 내리꽂는 송강호의 행위는 도대체 무엇으로 납득될 수 있을까. 단순히 지하에서 사는 자신들의 옷과 몸에서 나는 그 냄새에 코를 막았다는 이유만으로, 즉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업신여김으로 해석되는 그 행위만으로 송강호의 살인에 타당성이 부여될 수 있냐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또 다른 죽음이 있다. 즉, 사장집 지하에서 기식해왔던 그 부부의 죽음이다. 지하에 기식하는 부부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서로의 비밀 즉, 이 집에는 기생충들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사장에게 알리겠다는 서로 간의 협박이 오가면서, 생존을 위해 벌어지는 두 가족 간의 난투극은 기생충들이 서로 숙주의 몸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영역 싸움으로 보여진다. 결국 그들의 이러한 영역 싸움은 서로를 죽이고 숙주도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함께 죽지만, 용케 그 숙주의 몸을 빠져 나온 송강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은 다음 숙주에게로 몸을 옮겨 생명을 이어간다. 반대로 사장에 대한 'respect'(존경)를 외치던 지하실 그 남성은 숙주와 더불어 장렬한(아니면, 개죽음? 그의 시신에 꽂힌 바베큐꽂이의 고기를 개가 뜯어 먹는다.) 죽음을 맞는다.

이것은 관객의 바람이 전혀 아니었다. 같은 처지의 두 가난한 가족들이 상봉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들이 서로를 공감하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할 것을 바라지만, 감독은 이러한 우리의 바람을 완전히 무시해버린다. 세상은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 속, 송강호가 말하는 것처럼, '최고로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무계획이'듯이, 우리 삶 역시 전혀 계획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송강호가, 지하실의 그 남자가, 사업에 실패할 계획으로 '대만카스테라'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저기 반지하에서, 누군가는 저기 대저택에서 산다. 누군가가 설계해 놓은 것이 아니다.

송강호 가족들이 테이블 아래에 숨어있는 것을 이선균의 가족들이 끝내 알지 못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4년여 동안 지하실에 누군가가 기식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실에서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의 많은 모습들을 알지 못하거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선균 부부처럼 처음부터 지상에서 태어나 초지일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발 아래 반지하에 누군가가 산다는 것을, 그리고 또 그 아래 햇볕이라고는 들지 않는 지하에도 누군가가 산다는 것을 전혀 알지조차 못한다. 송강호의 집 창문이 설마 누군가의 집 창문일 거라고는 전혀 알지도 생각지도 못한 채 오줌을 누는 지상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처럼 봉준호 감독은 아무런 편견 없이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우리 사회의 지상과 반지하와 그 아래의 더 깊은 지하를 모두 카메라에 담아서 담담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지하 집에서 온 송강호의 아들이 주인 가족이 없는 사장집에서 하는 첫 행동은 정원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햇볕을 즐기는 것이다. 그나마 반지하에는 약간의 빛이나마 들어오기에 아들은 온전한 빛을 즐길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빛 하나 없는 지하에서 나온 사장집 지하실 남자의 경우와 대조를 이룬다. 남자는 사장이 집을 비운 집에서도 마당에 온전히 나가지 못하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비스듬한 햇볕에 마냥 행복해한다. 마지막에 마당의 강렬한 햇볕에 나왔을 때는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몸과 눈이 오히려 그 빛을 괴로워한다. 부와 가난을 넘어서 함께 공유한다고 여기는 자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평등하다고 여겼던 태양의 빛조차도 부의 정도에 따라서 분배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지하에서 살아온 그 남자는 비슷한 처지(또는 자신보다는 나은 처지)의 송강호 가족에게는 적의를 느낀 채 끝내 송강호 딸의 가슴에 칼을 꽂지만, 정작 사장 이선균에게는 죽을 때까지 'respect'(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바로 이 시점에서 송강호가 끝끝내 사장의 가슴에 칼을 꽂는 행위가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햇볕마저도 가져가버린 죄. 송강호와 그 남자의 옷과 몸에서 나는 그 악취의 출처가 자신들이 빼앗아버린 그 햇볕에서 나오는 것임을 모르는 죄. 빛조차 빼앗아 버리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순수하고 착한 척 사는 죄. 그리고는 냄새나는 그들을 벌레 취급한 죄. 송강호의 칼은 단순히 사장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결과를 불러온 사회 전반에 대한 죄값을 묻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가 공유자산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조차 부와 권력의 몫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세상은 많이 배운 이들의 논리에 점령당한 채, 빼앗고는 나눠주는 우아하고 고상한 그들에게 '존경'을 느끼는 더 깊은 지하의 사람들과 도리어 서로 물어뜯고 싸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장에 대한 송강호의 살인은 이런 점에서 과히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을 물어뜯고 싸우게 만들고서 자신들이 냄새나게 만들어 놓고서, 정작 자신들은 멋있는 '척하는', 윤리 도덕적인 '척하는', 나누는 '척하는' (영화 속에서 송강호의 아들이 과외시간에 과제로 'pretend'라는 단어를 넣어서 영작을 하라고 한다), 깨끗한 '척하는' 우리 사회의 상류층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하지만 과연 이 모든 것이 빛을 나누지 않고 무지했던 상류층들만이 만들어 낸 비극일까.

영화 '기생충' 한 장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의 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을 모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그 저택부터 구입할 거라고 계획을 밝힌다. 그런데 아버지 송강호가 말하지 않았던가.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고". 인생은 계획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그러기에 영화 속 비극은 무한 반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만 벌면 된다'는 송강호의 가족 역시 (피자 박스 접이의 불량이 10프로였을 때부터 이후 사기 행각들에 이르기까지) 가족 중 최연소자인 딸을 잃고도 그 비극을 끝낼 심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기생충으로 살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든지 부자가 될 거야'를 다짐하고 있는 나에게 자문한다.

잠깐만!

이들이 (아니면 우리들이) 기생충인 건 확실한 거니?

이들이 없으면 이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지?

우리 몸은 기생충이 없어야 더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은가. 이들이 정말 기생충이라면 우리 사회는 이들이 없어야 더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선균은 '도우미 아주머니 없이는 단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그 아름다운 저택이 쓰레기장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들은 기생충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나의 불쾌감은 이 모든 것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깊은 사유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안에 담긴 많은 함의들은 무시한 채, 그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언뜻 그렇게 이해되는) 이선균 가족에 대해 연민을 느끼면서, 무능력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송강호 일가족을 기생충으로 여기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부자가 되어야지!'를 다짐하게 만든다는 데 대한 불편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우리가 끊임없이 불편하고 불쾌해지길 바라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사회가, 국가 성장률이나 건물의 높이에서 보이듯이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똑바로 쳐다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느꼈을 불편함과 불쾌감, 도저히 이해도 안 되고 제대로 끼워 맞추어지지도 않는 그 조각조각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동정도 연민도 동화같은 해피엔딩도 없다. 그러니 꿈꾸지 마라는 거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희망조차 꿈 꾸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영화 속 현실의 조각들을 들고 이리저리 맞추어 가면서 도저히 아귀가 맞지 않는 그 불편함을 이어가는 것 또한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인문학당 달리'의 최정아 연구원과 박선정 소장이 영화 감상 후 이야기 나눈 것을 박선정이 글로써 정리)

<인문학당 '달리' 소장·영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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