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특집 : 김해 장소시】 투망 외 32편 - 박태일
장소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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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3 13:09 | 최종 수정 2023.01.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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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장소시
투망 외 32편
박태일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강에는
누울 자리가 많아 생각이 잦고
아들 자랑 손자 자랑 어쩌자고 키만 자라는 갈대밭 어귀
키운 자식 모래무지처럼 물밑에 묻고 난 에비가
하릴없이 그물코 사이로 물비늘을 뜨고 있다.*
월동집
1
해와 달이 바뀌고
바뀌는 옆으로
많은 일 그 가운데 아름다운
숲의 여행을 바라보는 일생.
2
길 하나 저 이끌어
많이도 흘렀다 하겠네
눈물 조금 사랑 조금
세월 조금씩
내 아내 사립 닫고 저녁 물릴 때
저문 밖으로 헛되어 떠돌아
가슴 안 차오르던 겨울 가래톳.
3
소리개 날아
산으로 가는 길
나무들이 하얗게 이를 앓는다
구름 한 점 재우지 못하는 산등
수수리 소리소리 입에 눈발을 묻히고
죽여 죽여봐라고 달려오는
노간주 횡렬.
4
눈 많은 날에는
눈 되어 떠돈다
고만고만한 슬픔에 익숙한
눈먼 아이들
무덤 몇 더 올라가면
낮은 솔들이
그들 어깨를 껴안고 있다.
5
나무들은 발바닥에 소리를 숨기고
지나는 것들의 이름을 적어둔다
외로움에만 안개가 끼는 것일까
숲 하나 천천히 몸을 지울 때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꿈인가 꿈인가
언덕 너머 농막엔
떠난 아우가 발바닥 핥으며 밤을 넘긴다.
6
내 한 나무 아비가 되어
나무 없는 어느 땅에 서서 보면
서 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손톱 찢어 흐린 물에 이름자나 쓰고
떼구름
밝은 한 점 마지막으로 쳐다보면서.
7
노을 붉은 날에는 긴 잠이 온다
눈썹에 내리는
맑은 시장기
도시 가까운 불빛은 도시를 넘겨본다
손바닥으로 잡아내는 덤받이 서캐
닥나무 울타리가 흔들리면
톡톡 손마디 꺾는다.
8
떠밀린 가지 너더댓
다른 가지에 기대어
몸을 말린다
거룻배가 물어올리는 강둑
발치로 산 하나 다시 넘기며
내 아내의 자식들의
배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9
바람이 불던가
하늘을 환칠했던가 때로
네 메아리
수몰의 몸짓을 흉내내고
길이 얼었다 녹는 며칠
차라리 소리를 죽이는 작은 처마
창 하나 가리기에 목이 마르다.
10
내 아들 미래가 출렁거린다
가까운 것은 슬픔이거나 절제 없는 분노
먼 것은 더 멀어
먼 가장자리에 깔리는 밝은 그림자
더불 수 없는 너와 내 하루가 어두워 오면
그림자 이윽고
강이 된다.
11
얼굴 버린 이웃 찾아
새를 날린다
또는 산구릉에 또는
물그늘에
살을 빼앗긴 것들의 차가운 보행
지구 바깥으로 부는
적막한 바람 소리.
12
눈 내리어 저무는 이 풍진 산에 들에
시린 손끝 하늘로 물벅구 넘는
칠백 리 한번은 일어설
낙강**
*『그리운 주막』, 45쪽.
**『그리운 주막』, 74-78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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