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월북미술가 기웅의 귀향*
- 북한 잡지 조선미술과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1
박 태 일
1. 북한 미술과 조선미술
북한 미술을 향한 연구1)는 1970년 초반부터 띄엄띄엄 이루어져 왔다. 처음에는 잊힌 초기 사회주의 미술가 소개에서 시작해 월북미술가 개괄로 넓혀졌다. 1980년대 후반 북한 문학예술인에 대한 복권과 해금은 그런 흐름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겨레 미술사라는 눈길에서 논의가 활발히 이어졌다. 1990년대 들어 남북 문화 교류가 주요 정책 분야로 올라섰다. 그에 따라 북한 미술 연구는 전기를 맞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대학 제도 안에서 북한 미술을 다룬 학위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2)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 겨레 사회를 거쳐 들어온 북한 미술품, 대중 상대 북한 미술전람회가 연구열을 부추겼다. 북한 미술 정보가 쌓이고, 북한 미술 답사기나 기행문까지 일을 거들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그러한 움직임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계기였다. 북한 미술 연구는 영역과 의제를 달리하면서 양과 깊이를 더해 온 셈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북한 미술 연구가 본격화한 2010년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
* 이 글은 「월북미술가 기웅의 귀환-북한 잡지 조선미술과 경남ㆍ부산 지역 월북미술가」(열린정신 인문학 연구 제22집 3호,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1)로 한차례 축약 발표한 것이다. 이즈음 성과까지 받아들이고 다시 다듬어 이 자리에 되싣는다.
1) 북한 미술을 대상으로 삼은 연구사는 몇 차례 이루어졌다. 양현미, 「북한미술 연구의 현황과 과제」, 논문집 제3집, 한국예술종합학교, 2000, 90-106쪽. 전영우, 「북한미술 현황 연구 : ‘조선화’를 중심으로」, 조형교육 20집, 한국조형교육학회 2002, 413-432쪽. 홍지석, 「북한미술연구사 1979-2010」, 현대북한연구 13권 1호, 북한대학원대학교, 2011, 7-39쪽. 신수경, 「월북미술가의 연구 현황과 과제」, 미술사와 문화유산 2집,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2013, 7-39쪽. 김복기, 「‘분단’의 미술사에서 ‘통일’의 미술사로-월북미술가 재조명과 연구 과제」, 분단의 미술사 미술가들,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56-81쪽. 권행가, 「월북미술가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조사 연구 현황 및 과제」, 앞의 책, 82-110쪽.
2)이기영, 북한미술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석사 논문, 1994. 윤진섭, 「북한미술의 사적 전개별 작품성 연구」, 동아대학교 석사 논문, 1997.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진 이러한 북한 미술 연구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3) 첫째, 월북미술가 연구다. 가장 먼저, 그리고 오늘날까지 거듭하고 있는 중심 의제다. 처음에는 월북하기 앞선 활동에 초점을 두었다가 재북 시기 활동으로 눈길이 넓혀졌다. 이여성·정종여·이쾌대·정현웅·김용준·배운성과 같은 명망가가 차례로 다루어졌다. 둘째, 북한 미술의 본질, 곧 주체미술 관련 연구다. 이것은 남북한 미술의 비교․대조를 비롯해 통합된 겨레 미술사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작업이다. 셋째, 남북 문화교류 행정 차원 연구다. 실천적인 교류와 전략 도출을 위한 것이다. 관 중심에서 민간 중심으로 바탕을 넓혀 나왔으면서도 당대 남북한 관계에 영향을 받는 정치추수주의 경향을 벗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자리다. 넷째, 기타 연구다. 북한 새터민을 대상으로 삼은 미술치료와 같은 관심이 그런 쪽에 든다. 여기에다 전시회 도록 풀이나 북한 미술 관련 소개, 홍보용 단평이 자리를 더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세월 이루어진 이러한 북한 미술 연구 가운데 아직 제대로 들어서지 못한 곳이 둘 있다. 첫째, 북한 미술 작품과 미술사회 동향에 관련한 실증 정보 축적이다. 북한에서 오랜 세월 이루어져온 작품의 총량과 미술계 동향을 작가별, 갈래별, 시기별, 주제별로 갈무리하고 그 뜻을 살피는 실증 조사가 본격화한 적은 없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북한 미술 관련 정보는 거대 중앙의 검열과 통제 아래 마련되거나, 일성의 이른바 혁명 전통과 수령주의를 줄거리로 내세운 선택적이고 제한적인 데 머문다. 북한 미술 죽보기로서 거의 유일한 이구열의 9쪽짜리 「북한 미술 연표 1945-2000」4)가 지닌 빈약함이 그 점을 웅변한다. 온전한 북한 미술사의 자취라 말하기 옹색한 됨됨이다. 북한 미술 동향을 미시 수준까지 낮고 넓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환경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1950-1960년대 북한 초기 미술의 1차 사료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하다. 한참 후대에 나온 북한의 2차 문헌, 3차 문헌 기술에 기댄 한정된 정보만 버릇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둘째, 북한 미술사회 동향과 미술 의식을 가장 잘 알 수 있을 매체에 관한 관심 부족이다. 북한 미술사회의 움직임은 로동신문 ․ 민주조선과 같은 대표 일간 신문 관련 기사나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 미술 ․ 조선미술, 그 뒤로 이어진 조선예술 같은 미술, 예술 기관지를 빌려 알 수 있다. 거기다 다른 영역과 상호작용 양상을 볼 수 있는 연속 매체, 곧 문학신문이나 조선문학 ․ 조선영화와 같은 문학예술 전문지, 활살과 같은 만화지나 천리마와 같은 종합 대중지, 조선과 같은 화보집뿐 아니라 다채로운 출판미술도 있다.5) 북한 미술사회의 통합적이고 총괄적인 동향과 밑그림을 따지기 위해서 관심 확대가 필수적인 자리다. 그럼에도 우리의 북한 미술 연구는 그러한 매체론에 다가설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북한 미술 연구가 지닌 문제, 곧 실증적 정보의 미흡과 매체론적 접근의 미비라는 둘을 놓고 볼 때, 가장 바쁘게 이루어져야 할 과제는 1950-1960년대 북한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 조선미술의 구명이라 할 수 있다. 조선미술은 1957년에서부터 1967년에 걸쳐 11년 동안 평양에서 나온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다. 앞 시기에 부정기로 5호까지 나온 미술에 이어 격월간과 월간, 계간을 오가며 모두 112권6)을 내고 폐간하였다. 그 뒤로 1970년대에 들어 비슷한 시기 함께 폐간한 조선예술이 복간될 때 다른 예술 영역과 함께 통합되었다. 동시대 남한의 사정을 감안하자면 매우 세련된 편집과 출판 기법이 동원된 호화본 잡지가 조선미술이다. 조선미술은 종합 예술 잡지인 조선예술과 달리 북한 미술의 오롯한 개별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조선미술이 지닌 중요성은 크게 세 가지로 짚을 수 있다.
----------
3)양현미, 「북한미술 연구의 현황과 과제」, 앞에서 든 책, 90-106쪽.
4)이구열, 북한미술 50년, 돌베개, 2001, 319-327쪽.
5)백지홍이 미술을 담은 북한 잡지로 조선예술․조선미술․민족문화유산․천리마를 두고 짧게 소개한 적이 있다. 백지홍, 「미술을 담은 북한의 잡지들」, 미술세계 8월호, 미술세계, 2018, 72-73쪽. 권행가에 이르러 조선미술에 관한 전반적인 개괄이 이루어졌다. 권행가, 앞에서 든 글, 86-88쪽.
6)글쓴이는 조선미술의 총량을 애초 108권으로 확인했다. 박태일, 「월북미술가 기웅의 귀환-북한 잡지 조선미술과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 열린정신 인문학 연구 제22집 3호,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1, 193쪽. 그런데 홍지석․홍성우에서는 112권으로 잡고, 1967년 7월호를 뺀 111권의 목차를 널리 알렸다. 그에 따른다. 홍지석․홍성후, 「미술, 조선미술의 권호와 목차」:「미술 및 조선미술 해제」, 근대서지 제24호, 근대서지학회, 2021, 397-413쪽.
첫째, 조선미술은 북한 초기 주요 작가와 작품, 미술사회 동향에 관련한 핵심 정보를 다채롭게 갈무리하고 있다. 그것에는 ‘단신’, ‘미술 작품’, 미술공모 입상자 명단과 같은 자리뿐 아니라, 비평이나 관람평, 창작 경험 가운데 부차적으로 실린 작품 정보가 도움을 준다. 거기다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와 분과 위원회, 북한 각 지역 지회 움직임과 활동 정황이 그 점을 거든다. 둘째, 조선미술에 실린 미술 정론과 평론·좌담회·연구·전시회 소개와 같은 속살을 빌려, 북한의 우리 고전 미술사 인식에서부터 북한 미술사회의 정책·논쟁·갈래·제도와 교육을 포함하는 통공시적 특성에 귀납할 수 있다. 북한 미술사의 이론, 실천 담론체로서 조선미술의 자리가 우리 앞에 크게 열려 있다. 셋째, 미술과 다른 인접 예술 갈래, 곧 문학과 연극, 그리고 영화와 상호 관련성을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조선미술에는 적지 않은 문학인이 활동 회고, 작품 관평, 정책 정론 또는 수필을 올렸다. 이들은 문학 쪽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 그 뜻과 의의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다. 북한 문학예술 전반에 걸친 정보 곳간으로서 역할 또한 뚜렷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북한 미술 연구는 2000년대까지 조선미술을 1차 사료로 삼아 다가선 경험이 없었다. 그나마 이름이 처음 알려진 곳은 이구열의 「북한 미술 연표 1945-2000」(2001)에서다.7) 거기에 한 차례 이름을 올렸을 뿐 본문 어디에서도 조선미술 관련 기술은 없다. 조선미술의 실재 확인보다는 북한 조선중앙년감과 같은 기록에 기대 출판 사실만 따온 까닭이다. 이러한 사정은 2010년대로 올라서면서 달라졌다. 비록 영인본·복사본 꼴로나마 조선미술을 부분적으로 1차 연구 문헌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 북한 미술 연구의 다채와 분화는 그와 일정 정도 맞물린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 또한 조선미술을 향한 본격 매체론은 아니다. 조선미술은 그 중요성에도 아직 편집 체제나 필진 구성, 매체의 시대적 변화와 지면 구성, 수록된 글의 특성과 통공시적 됨됨이와 같은,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실증 구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된 빌미는 무엇보다 조선미술 출판본 모두를 원본 상태로 갈무리, 공개한 곳이 나라 안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조선미술의 매체론을 깊이 따질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니 북한 미술가 연구, 시대별 작품 경향이나 갈래 연구, 재료와 작법 연구, 미술 교육, 미술관·미술 단체를 아우르는 제도 연구와 같은, 북한 초기 미술사의 보다 깊고 발전된 자리를 겨냥하기란 어려웠다. 그들을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무거운 1차 사료 조선미술부터 다가서는 데 한계가 뚜렷했다. 우리의 북한 미술 연구에서 실증적인 매체론은 출발도 하지 못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북한 미술을 향한 본격 구명을 위해 조선미술이나 조선예술8)과 같은 전문 매체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조선미술의 실증적 전모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은 이러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1950-1960년대 북한 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미술 전문 매체라는 중요성과 상징성이 그것이다. 그 안쪽 지면에서는 초기 북한 미술사의 주요 의제들을 거의 아우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북한 초기 미술의 대표 매체 조선미술에 관한 연구는 더욱 깊어지고 확대되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기록된 사실 중심의 실증적 이해에서부터 작품에 관련한 미학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이해 지평으로 열려 있다. 조선미술의 구명은 적어도 1957년부터 1967년까지 11년에 걸친 북한 미술사의 연대표를 새롭고도 꼼꼼하게 마련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아줄 터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 인식 아래 조선미술 간행분 모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첫 접근이다. 목표는 그에 담긴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에 관한 실증적 구명이다. 이러한 연구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은 글쓴이가 조선미술을 거의 간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미술 간행분 가운데서 100권을 넘게 확보했다. 절대량이다. 이미 알려진 나라 안의 것은 영인본과 복사본인 터라, 원색 게재 작품 경우에 색조 없이 형상만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뚜렷하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들을 원본 또는 사진본으로 확보하고 있음으로써 그것을 넘어 꼼꼼하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다.9)
----------
1)이구열, 앞에서 든 책, 321쪽.
2)조선예술 경우, 훨씬 후대 간행본인 1990년부터 2009년 사이에 실린 미술 관련 논의들은 한 차례 죽보기를 잡고 그 흐름을 살폈다. 홍지석, 「미술 : 조선예술」, 통일문화사대계 1, 도서출판 경진, 2012, 378-443쪽 : 「미술 : 조선예술」, 통일문화사대계 2, 경진출판, 2014, 540-613쪽.
3)조선미술은 1957년 1월 1호를 처음으로 1967년까지 112권이 나온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미술에 앞서 미술이 나왔다. 미술은 1956년에만 8월까지 3호를 냈지만, 그에 앞서 시차를 멀리 두고 2권을 더 내 모두 5권에 이른다. 이 글은 띄엄띄엄 나왔던 미술을 제외하고, 1957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기관지로 명실에서 확실하게 출범한 조선미술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현재 연구자가 사진이나 복사본으로도 얻지 못한 조선미술은 11권이다. 다행히 국사편찬위원회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간수본 안에 든 것들이다. 홍성우, 「미술 및 조선미술 해제」, 근대서지 제24호, 근대서지학회, 2021, 397-413쪽. 홍지석․홍성후, 「미술, 조선미술의 권호와 목차」, 앞의 책, 414-549쪽.
이렇듯 조선미술을 매체론적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살피면서, 본 연구의 초점을 월북미술가에 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북한 미술 연구 가운데서 중심 자리를 차지해 온 월북미술가 연구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점이다. 몇몇 명망가 화가에 그친 관심은 월북미술 전반에 걸친 이해를 위해 하루바삐 넘어서야 할 걸림돌이다. 둘째, 월북미술가의 월북 전 활동이나 월북 동기, 그리고 나아가 북한에서 이루어진 활동 가운데 지역 연고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는 문제점이다.10) 이런 점에서 지역별로 미술가를 살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보다 깊이 있는 작가 이해, 작품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월북미술가 모두를 한꺼번에 대상으로 삼은 연구는 사실상 어렵다. 학문적 생산성도 떨어진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연구자가 오래도록 문학을 중심으로 관련 연구 성과를 꾸준히 쌓아왔던 경남·부산 지역의 월북미술가 활동으로 폭을 좁힌다. 이런 지역별 연구가 모여서 전반적인 월북미술가의 밑그림을 새로 그리는 단계를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 아래 연구자는 북한 미술가동맹 기관지 조선미술에 담겨 있는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인의 활동 전모를 밝히고자 목표를 세웠다. 다만 이러한 목표는 거시적인 데다 중기적인 접근이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역내 월북미술인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단기 목표로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 가운데서 가장 먼저 유화가 기웅을 대상으로 삼는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월북 이전의 생애 재구성과 함께 월북 뒤 조선미술에 담긴 기웅의 작품 활동을 실증적으로 밝히는 일이 그것이다.11) 이 일을 바탕으로 같은 경남·부산 역내 유화가 최재덕·조량규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를 마련함과 아울러 다른 갈래 지역 월북미술가로 눈길을 넓힐 바탕을 닦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이제까지 실체를 알리지 못한 북한 초기 미술을 향한 미시적 이해의 가능성이 훌쩍 자랄 것이다.
----------
10)월북미술가에 관한 단편 연구는 꾸준히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그들을 죄 끌어들인 연구사 검토, 연구 현황과 방향을 한 자리에서 통합적으로 다룬 논의가 2019년에 이루어졌다. 분단의 미술가 잊혀진 미술가들, 앞에서 든 책, 2019.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북으로 간 미술가들 저작 목록, 국립문화재연구소, 2020.
11)기웅의 재북 시기 활동에 관한 기초 작업, 간략한 이력과 작품 23점에 관한 아카이브가 한 차례 이루어졌다. 「기웅」,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북으로 간 미술가들 저작 목록, 앞에서 든 책, 16-24쪽.
2. 경남 · 부산의 월북미술가와 기웅
1) 역내 월북미술가의 유형
월북미술가 가운데서 경남·부산 지역 경우는 어떠할까. 월북미술가 전반을 짚었던 한 연구자는 “지금까지 국내 연구가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월북 화가들은 모두 170명에 이른다”고 썼다.12) 어떤 터무니에서 나온 수치인지 너무 부풀려져 논란이 크게 일 만한 진술이다. 하지만 그이는 다른 글 「북녘화가 170인, 그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13)에서 국내에서 파악하고 있는 북한 미술가 187명을 찾아 이름을 올렸다. ‘170명’이란 숫자는 그와 맞물려 나타난 실수로 보인다. 확인된 ‘재북 화가’의 수치를 ‘월북 화가’로 잘못 적은 셈이다. 따라서 실제에서 월북 화가로만 좁히면 그 수는 엄청 줄어든다. 권행가는 월북미술가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조사 연구’를 하면서 월북미술가 32인의 사료를 다루었다.14) 그런데 실재 월북미술가는 그 수를 훨씬 웃돌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들을 엄밀히 모두 헤아리기가 어렵다. 확실한 점은 월북문학인보다는 수가 적을 거라는 짐작이다.
----------
12)김복기, 「‘분단’의 미술사에서 ‘통일’의 미술사로-월북미술가 재조명과 연구 과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ggi04&logNo=221736842959).
13)김복기, 「북녘화가 170인, 그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art 8월호, 도서출판 에이앤에이(주), 2000, 68-71쪽.
14)김복기, 「북녘화가 170인, 그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art 8월호, 도서출판 에이앤에이(주), 2000, 68-71쪽.
이런 가운데 현재 글쓴이가 확인한 경남·부산 월북미술가는 9명이다. 그들을 갈래로 나누면 유화에는 김해 기웅(1912-1977)·산청 최재덕(1916-?)·합천 조량규(1928-?)가 있다. 동양화, 곧 북한 쪽 표현으로 ‘조선화’에는 거창 정종여(1914-1984)와 창원 안상목(1928- 1990)이 든다. 안상목은 월북 초기까지 유화를 다루다 조선화로 갈래를 옮긴이다. 조각에는 창원 김정수(1917-1997), 연극․영화 무대미술에는 창원 강호(1908-1984)와 부산 김일영(1910-1959)15)이 있다. 마지막으로 상업미술에 거창 장만희(1917-1993)가 보인다. 이밖에 조사에 따라서 더 많은 작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16)
--------------------
15)김일영은 1957년 조선미술 좌담회에서 자신의 고향이 충북 영동 출신인 김복진과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일영의 ‘부고’와 리재현에서는 부산의 좌천동이라 적었다. 「무대미술가 김일영, 채남인 동지 서거」, 조선미술 12월호, 1959, 40쪽.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2020)에서는 김일영을 영동 출신으로 잡았다. 「김일영」,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 앞에서 든 책, 72쪽. 따질 일이 남아 있음에도 김일영이 부산과 얽힌 연고는 확인된 셈이다. 부산 출신 미술가라 잡지 않을 까닭이 없다.
16)왜냐하면 오늘날 알려진 북한 미술가 계량의 뼈대가 되는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의 조사에서 빠진 사람을 고려해야 하는 까닭이다. 거기다 어린이나 청소년 몸으로 어버이의 손에 이끌려 북녘으로 올라갔다 뒷날 미술계에 몸을 담은 작가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들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는 월북 배경을 두고 볼 때 세 줄기로 나뉜다. 첫째, 광복기에 좌익 활동을 하다 이른 시기부터 북으로 간 사람이다. 거의 자진 월북자다. 경인년전쟁에 앞서 북한으로 들어가 평양미술대학 설립에 관계하고, 북한 초기 사회주의 기념 조각 제작에 참여하거나, 정치적 선택으로 월북했던 이들이다. 월북 뒤 북한 무대미술 영역에서 디딤돌을 놓은 강호·김일영과 조각가 김정수가 그런 작가다. 그이들은 광복기 가장 먼저 월북한 경우에 든다. 강호의 조카 김정수 또한 19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 강원도해방탑건설준비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월북,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북한 조각 예술 발달에 큰 이바지를 했다.
둘째, 경인년전쟁기에 월북한 작가다. 이들은 다시 월북 배경에 따라 셋으로 나눌 수 있다. 곧 광복기에 좌익 미술 활동으로 검거, 투옥되었다가 전쟁 발발 뒤 출옥해 월북한 경우다. 김해 기웅이 이에 든다. 다음은 전쟁기 이른바 ‘해방지’ 남한에서 인민군 부역 활동을 하다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 뒤 물러가는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간 이들이다. 정종여·최재덕이 그들이다. 세 번째로 청년 화가였거나 서울대·홍익대에 다니던 화가 지망생 몸으로 인민의용군에 입대, 월북한 경우다. 안상목이 이에 든다. 이들 경우는 자진 월북과 납북의 경계를 뚜렷하게 밝히기 힘들다.
셋째, 앞선 두 경우와 달리 나라밖에서 월북한 이다. 1960년대 초 재일 귀환 겨레와 함께 북송선을 탄 경우다. 조량규와 장만희가 이에 든다. 조량규는 합천 출신으로 광복기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다 일본으로 밀항했다. 거기서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다 북한으로 건너간 대표적인 북송 겨레 미술가다. 거창 장만희는 경도에서 도안 관련 공부를 하고 거기에 머물러 살았다. 그러다 1960년에 입북했다. 월북 뒤 북한의 산업미술, 상업미술에 관련한 창작과 이론 발표를 활발하게 펼치고 이끌었다. 이들 두 사람을 젖혀 두고 중국이나 소련 또는 다른 나라를 빌려 월북한 경남·부산 지역 미술가 경우는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다.
이들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인 9명은 월북 뒤 북한 초기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가 모두 뚜렷했다. 북한에서 평양미술전문학교(대학) 교원이 되어 다음 세대 미술인을 키우거나, 조선미술가동맹 유력 동맹원으로 활동하며 명예를 누리다 순조로운 죽음을 맞기도 했다. 어느 시점부터 이름이 묻히고 제거당한 이도 있다. 1950년대 후반 종적을 감춘 산청 출신 최재덕이 대표 격이다. 어떤 경우든 북한 미술을 향한 헌신이 오롯했던 점에서는 같다. 근대 겨레 미술사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일부는 1988년 10월 납월북미술가 41명이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을 때 혜택을 받았다. 정종여·최재덕·기웅·강호·김정수 5명이 그 안에 든다.
그럼에도 그 뒤 오랫동안 이들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를 두고 관련한 조사나 연구는 부분적이었다.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라는 의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강호와 정종여, 조량규가 낱낱으로 학계나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었을 따름이다. 물론 그이들 또한 경남·부산 지역 미술이라는 틀과는 무관하게 월북미술가라는 두루뭉술한 눈길에 따른 관심이었다. 나머지 6명도 이름 정도만 알려져 왔다.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삼은 개별 논고는 아예 점치기 힘든 환경이었다. 이들 9명은 어느 한 사람 빠짐없이 모두 1차 텍스트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개별 작가론을 마련해야 할 과제를 남겨 놓은 중요 작가들이다.
이 자리에서 다룰 기웅은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 9명 가운데서도 유화 갈래를 대표한다. 게다가 유화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연장자다. 이 글로 말미암아 그이 태생은 물론 월북에 앞선 활동과 월북 뒤 북한에서 이루어졌던 미술사회 활동이 처음으로 재구성된다. 논의는 먼저 기웅의 가계와 삶의 행적을 밝히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미술에 나타나는 기웅 관련 기록을 실증한 뒤, 그 속살을 따져드는 순서로 이을 것이다.
2) 김해의 기웅, 풍운의 삶과 가계
기웅은 오늘날까지 우리 미술사나 경남·부산 지역지에서 개별로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여럿 가운데 껴묻혀 월북미술가로 이름만 겨우 내비친 정도다. 그러다 2000년 인산강행이 1960년대 이후 북한 미술의 변화와 월북화가의 위상을 짧게 짚은 자리에서 기웅의 재북 시기 작품과 활동을 몇 편 들었다.17) 적지 않은 사실을 빠뜨렸지만 누구보다 먼저 조선미술을 펼쳐 놓고 기웅의 실재를 우리에게 일깨워준 공이 있다. 그 뒤 같은 해 김복기는 북한 미술가를 편람 형식으로 두 차례 나누어 소개했다. 그 안에서 월북미술가의 인명을 본격 문제 삼았다. 기웅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자리에 홍기웅도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①기웅(奇雄)1913-1977
유화가, 본명은 의벽(義闢). 경남 김해 출신, 배재고 졸업. 동경미술학교 중퇴.18)
②홍기웅, 1912-1977. 유화가, 경남 김해 출생,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유화분과위원회 역임.19)
①과 ② 사이에 성이 다르고 난 해가 다른 점 말고는 경남 김해 출신이라는 사실과 죽은 해가 같다.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유화분과위원회 역임”이라는 ②의 이력은 고스란히 기웅에 걸린다. ②는 ①에 이어진 기웅의 활동을 말해주는 듯싶다. 작성자 김복기가 무슨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나누어 올렸다. 이런 기록은 북한에서 리재현이 엮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이 나온 다음 해 것이다. 그곳을 참조했을 터다. 거기에서는 기웅을 무게 있게 다루고 기록 또한 꼼꼼하다. 아래 그 앞 부분을 보인다.
기웅(1912. 10. 21-1977. 10. 1) 화가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면 북내리20)의 사무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림에 취미를 가지고 있어 중학생 때 김복진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줄임)- 미술 공부를 위해 해외로 나갔다.21)
---------------------
17)인산강행, 「60년대 이후 북한 미술의 변화와 월북 화가들의 위상」(월북 화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3-60년대 이후 북한 미술의 변화와 월북화가들의 위상), 월간미술, 월간미술사, 1992, 93쪽.
18)김복기, 「북녘화가 100인 그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아트 인 컬츄어 7월호, 2000, 157쪽.
19)김복기, 위의 글, 159쪽.
20)본문에서는 ‘북대리’로 썼다. ‘북내리’의 잘못이다. 봉황대 아래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아우르는 김해 구도심 지역이다. 오늘날 ‘가락로’로 바뀌었다. 앞으로 이 기록을 올릴 때는 바로 잡아 ‘북내리’로 적는다.
21)리재현, 앞에서 든 책, 283쪽.
1912년에 태어나 1977년에 죽었다. “중학생 때 김복진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했으니 배재고보 출신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김복진이 배재고보에서 기웅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카프 시기 기웅의 미술 회고기에 나온다.22) 그런데 눈여겨 볼 점은 기웅이 “김해군 김해면 북내리의 사무원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적은 자리다. 왜냐하면 기웅의 아버지 기태진奇泰鎭은 황해도 사람이다. 어머니가 김해 사람 우봉운禹鳳雲(1889-?)이다. 출가한 뒤 이름을 기석호(奇昔湖, 奇石虎)로 쓴 기태진은 교육자로서 함북 성진과 간도 명동을 거치면서 이동휘 아래서 애국계몽 활동을 하다 1916년 무렵 금강산 석왕사에서 출가한 사람이다. 그 뒤 서울과 부산을 거치며 승려 생활을 이어 나가다 1940년 병고로 열반했다.23) 그런 기웅의 아버지 기석호를 두고 ‘사무원’이라 일컬을 수는 없다.
기웅의 어머니 우봉운은 서울 정신녀학교에 다닐 무렵 오누이 학교인 경신학교 학생 기태진이 보내온 5년에 걸친 편지로 말미암아 맺어져 혼인에 이르렀다.24) 신앙 초기에는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기태진의 불교 귀의와 함께 우붕운의 불교계 연고도 넓혀졌다. 우봉운은 1910년 서울 정신녀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이른바 신여성이다. 졸업을 앞뒤로 대구 기독교 장로교계 학교 계성녀학교 교사로 3년 동안 일했다. 1911년 무렵 북간도로 망명하여 용정의 명동녀학교 교사로 여성 교육과 청소년 교육에 힘쓰면서 활발한 사회 실천과 애국 항쟁을 벌였던 여투사다. 이동휘가 이끌었던 명동촌의 삼국전도회와 함께 간도애국부인회 회장, 광복항쟁 비밀단체 철혈광복단 여자단원으로도 활동했다.
기태진이 우봉운의 곁을 떠나 불교에 귀의한 뒤 우봉운은 어린 기웅을 키우다 북간도 지역 정세 위축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삼일녀학교 교사와 부인독립단, 조선적십자회 초기 활동 단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이미 승려로 서울에 들어와 있었던 기태진을 좆아 1920년 망명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25) 이러한 어머니 우봉운이 겪은 소녀기 기독교 교육과 성진, 연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이주와 이어진 귀국은 고스란히 근대 기독교 여성 교육의 유입과 해외 여성 겨레 항쟁 노선의 변이 과정에 맞물려 있다. 기웅은 일찍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를 따라 그 파고를 함께 넘으면서 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기웅은 이러한 우봉운과 기태진이 함북 성진을 거쳐 북간도로 망명하여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사로 일할 무렵인 1912년에 태어났다.26) 그런데 연변에서 태어난 기웅을 두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북한 리재현의 기록은 경남 ‘김해군 북내리’ 출신이라 적었다. 거기다 ‘사무원 가정’이라 더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록이 나타난 것일까? 이 점은 어머니 우봉운과 김해 지연을 먼저 살펴야 한다. 현재 남아 학교 기록이나 김해 역내 정보로는 우봉운의 김해 지연 확정은 어렵다.27) 다행히 아래 두 기록이 그런 어려움을 기워 준다.
--------------------
22)「카프 시기의 미술 활동」(좌담회), 조선미술 4호, 조선미술사, 1957.
23)김남수, 「우봉운과 그의 가족-우봉운」, 보랏빛 불교(http://blog.daum.net/savatthi/62).
24)우봉운, 「여학생시대에 변소에서」(러부렛타-의 고백), 삼천리 제9호, 삼천리사, 1930. 64-65쪽.
25)김남수,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과 활동-우봉운」, 보랏빛 불교」(http://blog.daum.net/savatthi/62). 신영숙. 「여성운동가 우봉운(禹鳳雲)」, 「문화재 사랑」(http://blog.daum.net/blue_lj/6373056).
26)우봉운이 북간도로 건너간 시기는 1935년 3월호에 발표한 그미의 회상 수필 「신노심불노(身老心不老)」를 터무니로 삼을 만하다. 그 글에서 우봉운은 “스물셋 되든 해 외로운 처녀”로 “큰 을 품고 황막한 북만주의 너른 벌을 헤매었다”고 썼다. 1889년을 생년으로 보면, 1912년이다. 그런데 1935년 3월 발표에 앞서 우봉운이 이 글을 쓴 때는 1934년 후반기라 본다면 그 시기가 1911년으로 당겨진다. 이어서 “처음 이동휘 씨 님과 함 국자가(局子街) 중국학교에 입학하여 거기서 중국 말과 글을 배운 뒤 그 이듬해에 예정과 가치 해란강 부근에 잇는 명동촌(明東村)에다가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거기서 젊은 녀교사 되어 아츰나절 학동에게 글을 가르첫다”고 썼다. 우봉운이 말한 ‘명동학교’는 1908년에 출범한 배움터다. 그곳에 여학생반이 마련되어, 명동녀학교가 갈라진 때는 1911년이다. 우봉운이 쓴 ‘명동학교’를 ‘설립’했다는 표현은 명동녀학교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웅의 생년인 1912년에 미루어 볼 때 우봉운은 명동녀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은 뒤 같은 학교의 기석호와 혼례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웅의 태생지는 연변 땅 룡정(명동)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 기석호가 1916년에 우봉운과 헤어져 불가에 귀의했으니, 기웅은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 셈이다. 우봉운, 「신노심불노」, 삼천리 3월호, 1935, 107-108쪽
27)현재 ‘정신녀학교’의 학생 기록부는 남아 있지 않다. 2차 기록인 정신75년사(1962) 졸업자 명부에서 우봉운을 ‘서울’이라 적었다. 김영삼 엮음, 정신75년사, 계문출판사, 1962, 254쪽. 이 점은 학교의 학생 기록부에 기댄 정확한 기록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을 모두 다 밝히지 않고 몇몇 사람만 올리는 불규칙적인 방식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학생부 기록에 따라 옮겨진 것이 아니라 정신75년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억이나 구술로 확신할 수 있었거나 선택적으로 밝혀진 그 무렵 정주지를 올린 것이다. 따라서 서울에서 학업을 닦았을 뿐 아니라 30대인 1920년대 초기부터 광복기까지 거의 모든 삶을 서울에서 살았던 우봉운을 두고 ‘서울’이라 적을 개연성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①이제 근대 신문명을 맛이고 자유 결혼의 부배를 지여 화락한 가뎡으로 살던 긔태진(奇泰鎭) 년 36 황해도 해쥬군 사람) 씨의 일이 역시 그 증거라 씨는 일즉 경셩 경신즁학교를 필업한 후 뎡신녀즁학을 맟인 우봉운(禹鳳雲) 년 29 경상도 김해군 사람)씨와 결혼하야 백년가약에 운우의 졍은 낢어지 일이오 뜻한바 목뎍도 한 가지요 믿는바 죵교가 갇하야
- 「염세주의(厭世主義)인가?」 가운데서28)
②우봉운, 경남 김해 산, 연 40, 경성 정신녀교 출신, 간도 급 해삼위 동포학교서 10년간 교육 종사, 귀국 후 불교여자청년회장, 경성능인여자학원장 역임, 북풍회, 여성동우회, 정우회의 간부로 활약
- 「근우회 본부」(인재 순례, 제2편 사회단체)29)
우봉운이라는 이름이 근대 언론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경우가 ①이다. 이 기록에 나와 있는 ‘년 29’가 터무니가 되어 우봉운이 태어난 해는 1889년으로 알려진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온 한인신문에서는 만주 겨레 사회에 관한 소식과 동향도 중점으로 다루었다. 그 가운데서 특이 ‘자유연애’로 혼례를 하고 내외를 이루었던 한 ‘신녀성’ 가정의 ‘비극’을 다룬 기사가 위의 ① 경우다. 해당 대상이 ‘신녀성’에다 교육계 존경받는 공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파경’은 기사거리가 된다고 본 셈이다. 이미 1914년 권업신문에서는 “간도 녀자계의 큰 행복이라 칭숑이” 높았던 존경받는 명동학교 여교사30)로 알려진 이가 우봉운이다. 남편 기태진 또한 같은 명동학교에서 남학생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그 둘의 헤어짐은 큰 관심거리였던 셈이다. 그러한 기사에서 남편 기태진이 해주 사람임과 아울러 우봉운을 “경상도 김해군 사람”이라 뚜렷하게 적었다. 믿지 못할 까닭이 없는 기록이다.
--------------------
28)한인신보, 1918. 1. 13. 권업신문 대한인졍교보 청구신보 한인신보(2권),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5, 717쪽.
29)삼천리 제5호, 삼천리사, 1930. 4. 1, 11쪽.
30)권업신문, 1914. 4. 20. 권업신문 대한인졍교보 청구신보 한인신보(제2권),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5, 370쪽.
② 또한 우봉운이 ‘김해 산’ 곧 김해 태생임을 알려 준다. 우봉운이 서울에서 활발하게 사회 계몽 활동을 벌이고 있을 무렵 기록이다. ①, ② 둘 모두 우봉운이 공인으로서 일반 사회에 드러나 있었던 시기 것이다. 우봉운이 ‘김해 산’, 곧 김해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인의 확인이나 사실 공개가 확실하게 이루어진 뒤의 기술이라는 점을 알려 준다. 이때 ‘김해군 사람’, ‘김해 산’이란 김해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태생적 연고를 뜻한다. 유년기를 김해에서 보낸 경우다. 아버지 쪽 고향이 김해인 경우도 그런 표현이 가능하기는 하나 그 무렵 표기 버릇으로 보면 아니다. ‘산産’이라는 표기가 그 점을 못 박아 준다. 우봉운은 김해에서 태어나 자라다 어느 시기 서울 연동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김해를 떠났다.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2차 기록에서 우봉운을 김해 사람이라 적은 터무니는 모두 위의 두 기록에서 비롯한 셈이다.
그렇다면 우봉운은 김해 역내 어느 곳 사람일까? 이를 알 수 있는 꼼꼼한 기록은 현재로서 볼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리재현의 「기웅」에서 태생지가 김해 북내리로 적혔다. 이것은 기웅 사후 이루어진 2차 기록이라 고스란히 믿기는 어렵다. 기웅은 1912년에 태어났다. 우봉운이 기태진과 혼인하여 함북 성진 협진학교 교사로 일하다 연변 명동학교로 옮긴 초기다. 그런데 북한 기록에서 우봉운 아들 기웅의 출생지를 성진이나 연변이 아니라 경남 김해에다 동리까지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 그렇다면 김해 ‘북내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겼다.
첫째, 어머니 우봉운의 태생지가 김해읍에서도 북내리라는 짐작이다. 기웅이 어머니 고향 주소지를 자신의 것으로 삼은 셈이다. 우봉운이 불교에 귀의한 남편 기석호를 만나기 위해 금강산으로 찾아 갔다 연변으로 돌아온 때가 1918년이었다. 기웅이 일곱 살 무렵이다. 아버지와 헤어진 시기는 그보다 훨씬 일러 1916년 무렵, 기웅이 다섯 살 때다. 아버지 기억이 깊이 각인되기 어려웠을 때다. 이 점은 그 뒤로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홀로 자신의 양육, 교육을 책임졌던 어머니 쪽에 기웅은 더 확실한 친연성을 지녔을 수 있다. 기웅은 황해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스님으로 살다 죽었던 아버지를 둔 몸이다. 월북한 기웅으로서 북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온당한 성분으로 재편입되기 힘든 계층적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나라 첫 사회주의 여성 조직 동우회나 근우회 활동을 거쳐 광복기 북조선로동당의 남북통일 전선전략에 동조했던 사람이다. 월북미술가로서 기웅이 지닐 수 있었던 신분 귀속의 중심은 어머니의 항왜 계몽 항쟁과 사회주의 활동이었을 가능성은 절대적이다. 자연스레 자신의 출생과 지연을 외가에 얹었으리라 믿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김해면 북내리의’ “사무원 가정에서 출생”이라는 북한쪽 기록은 외가의 것임에 틀림없다. 어머니 고향인 김해 ‘북내리’가 기웅의 기억이나 기웅 사후 그이 가족에게 ‘북대리’로 이어졌던 셈이다.
거기다 출신 계층을 “사무원 출신”이라 적은 데서 우봉운 집안은 김해의 단순 농민은 아니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지난 ‘조선 왕조’나 이른바 ‘대한제국’의 행정을 맡아 관리로 일하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사무직’을 보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손자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기록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밀려온 기독교와 신문명을 일찍 받아들였던 집안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 우봉운을 서울 신생 기독교계 여학교에 보내는 일과 같은, 그 무렵으로서는 혁신적인 ‘신식’ 교육을 선택할 수 있었던 환경이 그것이다.
우봉운은 김해 태생으로 김해 사람이 분명하다. 그미가 태어나 자랐던 김해읍 북내리가 고향이다. 그리고 그곳은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나라밖으로 떠돌다 서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마침내 광복기 북한 사회로 월북한, 우봉운의 아들 월북미술가 기웅이 자신의 마음속 고향으로 삼았던 장소기도 하다. 기웅으로서는 일찍부터 인연이 끊긴 아버지 쪽보다 어머니 가계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출신 재구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인 셈이다. 따라서 더 파 들어갈 내력이 남은 상태이긴 하나 김해 사람 우봉운이 신혼 초 연변에서 낳아 길렀던 기웅을 두고, 어머니 우봉운의 출신 가계를 터무니로 김해 사람으로 귀속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31) 그리고 그 점은 무엇보다 북한쪽 리재현의 2차 기록이 보증하는 바와 같다. 기웅이나 가족, 그 둘레 사람들이 김해 북내리 출신이라 전승해 왔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셈이다.
김해 사람 기웅이 맨 처음 언론에 이름을 올린 때는 1922년이다. 불교유학생 강연회에서 독창하는 찬조 출연을 한 행사 덕택이다. 불교유학생 학우회 강연회가, 서백리아 조선인교육회의 사명을 띄우고 서울에 들어온 김영학 씨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각황사에서 강연회를 한다는 모임 기사에서 어린 기웅이 독창을 한 것이다. 아버지 기태진이 연사로 참여했던 이 행사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 기웅의 첫 모습이다. 기웅은 그때만 하더라도 서백러시아에서 어머니를 따라 온 어린 유학생 처지였다.32)
미술가로서 기웅이 자질을 크게 알린 때는 1929년이었다. 「전조선학생작품전에 영예의 입선 학생」 총 출품작 3096점 가운데서 입선된 작품은 810점, 그 가운데서 기의벽(배재고보 4년)의 「풍경」이 올랐다.33) 거기다 기웅은 입상작 가운데서 ‘중학생 도화부’ 3위까지 입상자 5명의 작품에 대한 간단한 촌평까지 올렸다. 그 이름 아래 ‘배재’라 적어 배재고보 재학중임을 알렸다.34) 기웅이 다시 재능을 뽐낸 때는 그로부터 두 해 뒤인 1931년이었다. 동아일보사 학예부 주최 제2회 학생작품전람회에서 「가로」를 내놓아 “첫머리로 입상”된 학생으로, 그 기쁨을 함께하는 기사가 올랐다. 거기에 적기를 “금년 19세로 일직 노령 해삼위에서 보통과를 마치고 서울 배재고보를 올해 봄에 졸업, 현재 동경미술학교 예과에서 공부 중”이라 적었다. 그리고 기웅은 “바로 근우회의 현 주요간부로 다년간 조선 녀류운동 선상에서 꾸준한 활약을 계속하시는 우봉운禹鳳雲 녀사의 둘째 아들로 다만 어려운 어머니 홀로의 주선으로 교육을 바든 사람”이라 썼다.
--------------------
31)실제로 1912년 10월 21일 기웅이 김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집을 간 딸이 출산을 전후해 친정에서 도움을 받는 일은 흔한 까닭이다. 그 무렵 어려운 교통 사정이나, 신혼에다 북간도 학교 생활 적응이라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시댁이 있는 황해도나 친정 경남 신행의 가능성이 흐릿하게 열려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웅이 자신의 고향을 김해로 적은 까닭이 다 풀리지는 않는다. 기웅이 월북에 앞서 쓴 줄글 가운데 ‘내 고향’을 다룬 글이 보인다. 해당 잡지는 서울 아단문고에 있으나 열람을 할 수 없는 상태다. 태생지나 성장지 또는 미술가로서 포부를 키웠던 중심지 가운데 ‘고향’을 어디로 삼는가라는 여러 선택지가 있을 수는 있다. 어느 쪽이든 기웅의 ‘고향’ 실증에 꼭 필요한 문헌임에도 열람할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기웅, 「파르테농과 내 고향」(그림과 글), 신세대 3권 5호, 신세대사, 1948.
32)「모임」,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2. 4. 8.
33)「전조선학생작품전에 영예의 입선 학생」,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9. 9. 25.
34)기의벽(배재), 「학생전 감상」,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9. 10. 6.
그런데 이러한 기웅의 전람회 입선과 관련하여 우봉운의 “둘째 아들”이라 썼던, 기웅의 형제 문제가 남아 있다. 기웅 어버이에 대해 가장 꼼꼼한 글을 쓴 김남수는 우봉운과 기석호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기웅(1912∼1977)과 기의벽이라”했다. 기웅과 기의벽을 서로 다른 두 형제 이름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둘 모두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적고, 동생 기웅은 배재고보를 다니던 1930년 10월, 학생전 도화圖畵부문에 2등을 했고, 형 기의벽은 1931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학생작품전람회’에서 「가로街路」라는 서양화를 제출하여 입선했다고 적었다. 서로 다른 형 아우가 입상한 것으로 본 셈이다. 그런데 기웅과 기의벽은 같은 사람이다.35) 그 점은 배재고보동창회보(1941) 기록으로 확인된다. 기웅은 1931년에 졸업한 15회 졸업생36), 이름은 ‘기의벽奇義闢(雄)’이며 ‘동경미술’과 동경시 판교구板橋區에 주소로 두었다. ‘동경미술’은 동경미술학교를 뜻한다. ‘의벽’이 ‘웅’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37)
---------------------
35)따라서 「미전 초입선 영예를 어든 예원의 군재-「가로」의 작자 기의벽 군」(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31. 5. 30.)의 기의벽은 기웅을 뜻한다. 「가로」는 기웅의 작품이다.
36)배재고보동창회명부(1941년), 배재동창회, 1941, 58쪽.
37)김남수가 우봉운과 그 가족 이야기 끝머리에 쓴 ‘기유담’이라는 이름을 지닌 스님이 기웅의 형 ‘의벽’이라 짐작한 일은 사실과 어긋나는 셈이다. 김남수, 위에서 든 글, 보랏빛 불교(http://blog.daum.net/ savatthi/62). 그리고 어머니의 양육 고생담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기웅을 우봉운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자신이 ‘처녀’의 몸으로 북간도에 갔다고 적은 수필 「신로심불로」의 기록이나 1918년 금강산에서 남편 기태진을 만나고 돌아온 일을 밝힌 기사, 「염세주의(厭世主義)인가?」에서 “저 아이 웅이를 데리고”라 한 아들만 일컬은 점, 그리고 1911년 혼인과 1912년 기웅의 출생을 앞뒤로 한 시기적 거리로 보아 우봉운과 기태진 사이에 두 아들을 둘 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의벽과 기웅을 다른 두 형제로 보고 있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잘못은 바로잡혀야 한다.
을유광복 뒤 기웅에 관련한 남한 쪽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 두 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 1948년도 미술계 총결산을 이루는 곳에서 그이를 두고 “미술계에서 조직적인 과정을 밟아온 사람”의 한 사람으로 들었다. 이때 ‘조직적인 과정’이란 다름 아니라, 미술가동맹 ‘조직’을 뜻한다. ‘미동전美同展’ 곧 미술가동맹 전시회에서 리쾌대․문신과 같은 동맹원과 함께 기웅은 「전진」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38) 이어서 신세대 1월호(1949. 1)에서는 이규원 단편 「밀방아」의 낀그림을 그렸다. 1년을 사이에 두고 확인되는 두 기록이다. 이를 빌려 1949년 1월 앞까지는 기웅이 검거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뒤로 기웅의 모습은 남한에서 보이지 않는다. 어느 시기 경찰에 구속되어 1950년 6월 전쟁 발발까지 옥살이를 했던 셈이다. 그러다 밀려 내려온 인민군 치하에서 석방되어 기웅은 ‘인민’의 미술가로서 새 삶을 시작하였다.
---------------------
38)「문화 1년의 총결산-미술편」, 경향신문, 경향신문사, 1948. 1. 1
현재로서는 기웅이 인민군 점령지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던가를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기 북한 미술의 한 가운데서 선전화나 포스터, 그리고 격문을 써돌리는 일에서부터 다채로운 예능 활동에 쫓겨 다녔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다 전시 국가미술전에 자신의 성공작인 「상봉-1951년 5월 19일 현리 전투에서」를 내놓아 이름을 떨쳤다. 1951년 5월 현재 그이는 싸움터 한가운데 놓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은 문학예술 1952년 10월호에 실리기도 했다. 그에 앞서 5월호에는 문학예술의 낀그림을 김기웅이라는 가명으로 올렸다. 전쟁이 전선 중심으로 굳어지는 시기에 기웅은 후방에서 출판 미술 활동 두리에 나서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다 기웅이 이름이 다시 보이는 곳은 홍순철의 장편서사시집 어머니(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4.)다. 자신의 어머니 우봉운을 떠올리게 하는 강인한 ‘어머니’ 초상을 속표지에 올린 시집이다. 그리고 청년문학 1960년 5월호에 「옥류정 건설장」, 6월호 두 곳에서 기웅은 표지그림을 그렸다. 청년문학은 북한 작가동맹 동맹원 중심의 기관매체 조선문학이나 아동문학과 달리 문학 습작기 청년이나 신인 양성을 목표로 냈던 문예지다. 이어서 ‘8·15해방 15주년 기념 출판’으로 낸 동요동시집 빛나는 아침(아동도서출판사, 1960)에도 기웅은 변광수, 안상목과 함께 낀그림을 올렸다. 찾기에 따라서는 더 많은 기웅의 작품이나 기록을 찾을 수 있 것이다. 1957년부터 나온 조선미술은 그런 가운데서도 기웅의 재북 시기 활동의 진면목을 가장 잘 갈무리하고 있는 보고라 할 수 있다.
3. 조선미술에 담긴 네 모습
북한에서 기웅에 관한 이해는 1999년 리재현의 력대조선미술가편람 안쪽 「기웅」 항목이 모두다. 그런데 이 저술은 방대함에도 근본 문제가 있다. 북한 미술가 가운데서 이른바 1952년 말부터 이루어진 남로당계 월북 인사 제거 작업, 그리고 1956년부터 이루어진 종파주의자 논란과 제거, 거기다 1962년 무렵 이루어진 카프계 인사 제거와 같은 세 차례 변동 속에서 사라졌던 월북미술가 관련 항목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엮은이 리재현의 눈길이 닿지 않은 초기 미술가는 다시 빠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 기웅 관련 기술은 나름으로 꼼꼼하다. 그럼에도 조선미술을 살피면 기웅에 관련한 새롭고 뜻 있는 기록을 적지 않게 더할 수 있다. 이제 아래서는 조선미술에 담긴 기웅의 발자취를 모두 찾아 네 가지로 갈라 따져 보고자 한다. 첫째 기웅의 작품 바깥쪽 활동, 둘째 비록 인쇄 상태이지만 조선미술에 발표된 작품, 셋째 기웅 작품을 대상으로 한 평가 담론, 넷째 기웅이 손수 쓴 문필 활동이 그것이다.
1) 작품 바깥쪽 활동의 기세
리재현의 「기웅」 풀이에서는 그이를 두고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긴 뒤 “전후 조선미술가동맹 현역 미술가로 있으면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박물관 등에 전시할 사상성이 높은 미술작품을 창작”했다고 썼다. 그리고 1957년에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위원으로 선거되여 근 10년간 활동”하면서, “역량 있는 화가로서 비교적 형상 수준이 높은 작품들을 내놓”39)았음을 더했다. 일부의 활동상만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조선미술 속에는 그러한 아쉬움을 메울 만한 여러 기록이 드러난다. 그들을 보이면 모두 아홉 군데다.
① 「동맹 중앙위원회 각분과 위원 보선 및 개선」, 2호, 1957.
② 「카프 시기의 미술 활동」(좌담회), 4호, 1957.
③ 「전국미술축전 작품 목록」,40) 4호, 1958.
④ 「무대 미술인들을 위한 단기 강습」, 5호, 1958.
⑤ 「내각 결정 17호를 높이 받들고 평양시 복구 건설에 나선 미술가들」, 5호, 1958.
⑥ 「동맹 력사편찬위원회 신설 분과 위원 일부 개선 및 보선」, 6호, 1958.
⑦ 유준수, 「공화국 창건 10주년 전람회를 앞둔 미술가들의 왕성한 창작 활동」, 8호, 1958.
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국가미술전람회 목록」(별지 부록), 9호, 1958.
⑨ 「모쓰크바 및 레닌그라드-사생첩에서」, 7호, 1959.
①「동맹 중앙위원회 각분과 위원 보선 및 개선」은 기웅이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 활동을 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동맹 제22차 상무위원회에서 기웅은 새로 개편된 ‘유화분과’ 중앙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앞에서는 그냥 ‘회화분과’ 중앙위원이었다가 그것이 ‘유화분과’와 ‘조선화분과’로 나뉘게 되자 유화분과로 넘어간 것이다. 해당 위원회에서는 아동미술분과도 새로 만들었다. ‘유화분과위원회’에는 오택경이 위원장을 맡았고, 위원에는 기웅을 비롯해 문학수, 리쾌대 들이 이름을 올렸다. 1957년 현재 북한 미술사회의 위세 중앙에서 기웅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②「카프 시기의 미술 활동」은 그 무렵 북한에 살고 있었던 카프 관련 유명 문학예술인이 함께한 자리였다. 문학인과 영화인, 미술가, 연극 무대미술가까지 모였다. 1950년대 후반 카프 정통성이 북한 문학예술계에 영향을 큰 미치고 있을 때다. 그러한 좌담회41)에 기웅도 자리했다. 정관철·송영·신고송·추민을 비롯해 13명이 같이한 거기서 기웅의 발언 비중은 높지 않다. 그럼에도 자신이 “배재중학교 학생 당시” 김복진 아래서 배웠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와 아울러 자신의 카프 미술 참여도 자연스럽게 드러난 셈이다.
-------------------
39)리재현, 앞에서 든 책, 283쪽.
40)차례에서는 ‘전국미술전람회 및 써클전람회 작품 목록’이라 적었지만, 본문에서는 「전국미술써클전람회 입상자 명단」과 「전국미술축전 작품 목록」을 나누어 실었다.
41)조선미술 4호, 조선미술사, 1957, 10쪽.
③「전국미술축전 작품 목록」은 기웅이 국가미술축전 참가 사실을 알려 준다. 곧 1958년 8월을 맞아 북한에서는 ‘국가미술전람회’와 ‘미술써클전람회’를 열었다. 그를 위해 작품 공모를 받고 심사를 마친 입상작 전시회를 가졌다. 기웅은 그 가운데서 미술가동맹 회원을 상대로 한 ‘국가미술축전’에 작품을 냈을 뿐 아니라, ‘미술써클전람회’에서는 공모 작품의 심사를 맡는 중책을 졌다. 뒤에서 살필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전국 미술 써클 전람회 심사를 마치고」(1958)가 그 심사평이다. ‘전국미술축전’에 기웅이 낸 작품은 「쉬는 처녀들」이었다. 기웅과 함께 평양 정종여의 「싸움」(1953), 평양 안상목의 「휴식 시간」, 평양 김정수의 조각 「조옥희 영웅」과 같은 작품 이름이 보인다. 경남·부산 월북미술가 정종여·안상목·김정수와 마찬가지로 기웅 또한 1958년 무렵에 평양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셈이다.
1956년 시작한 종파주의 제거 바람 속에서 이루어졌던 문학예술가들의 현지 파견은 1958년에 들어서 보다 집단적으로 큰 파고를 일으켰다. 미술가를 대상으로 한 1958년 1차 집단 현지 파견에 희망 작가 84명 가운데 장기 희망 31명, 단기 희망 53명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 가운데 1차로 떠날 작가에 기웅은 들지 않았다.42) 대신 기웅은 평양연극학교에서 이루어진 ‘단기 강습’에 얼굴을 내비친다. ④「무대 미술인들을 위한 단기 강습」이 그 일을 알려 준다. “무대 미술인들”을 대상으로 “단기 강습”을 “3월 1일부터 4월11일까지 40일에 걸쳐” 개강하였다. 동맹 유화 분과에서 기웅을 비롯 김광일·리쾌대·류현숙이 동원되었다. “112명의 지방 무대 미술인들이 수강”한 행사였다.”43) 이로 미루어 보아 기웅은 종파주의 논란을 넘어설 만큼 확실한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기웅의 이름은 ⑤「내각 결정 17호를 높이 받들고 평양시 복구 건설에 나선 미술가들」라는 기사에서 보인다. “평양시 복구 건설장에 동원된 근로자들을 로력적 위훈에로 고무 추동시키기 위하여 많은 미술가들이 이에 참가”하였다. “제1계단에는 정현웅·리쾌대·기웅 동지들을 비롯한 23명의 미술가들이 참가”했다고 썼다. 그들은 건설장에서 “근로자들의 영웅적 투쟁 모습을 속사하여 각종 신문 잡지를 빌려 보도”한 것이다. 평양 안쪽에서 이루어진 현장 동원은 기웅을 빗겨가지 않은 셈이다.
⑥「동맹 력사편찬위원회 신설 분과 위원 일부 개선 및 보선」은 ④, ⑤가 실린 다음 달, 1958년 6호에 실린 기록이다. 4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동맹 중앙위원회 제29차 상무위원회가 열려 “동맹 력사편찬위원휘를 신설”하고 아래 4개의 분과 위원회를 두었다. 력사편찬위원회 위원 46명44)을 “8.15 해방 전, 8.15 해방 후 북반부, 8.15해방 후 남반부, 해외 관계”의 네 개 조직으로 나누어 들게 했다. 기웅은 이들 가운데서 “해외 관계 편집 그루빠 집행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아래 위원으로 배운성을 비롯 4명을 두었다. 연고자를 해당 분과에 배치하였는데, 왜국 유학 체험을 가졌으면서 나이가 많은 기웅에게 ‘해외 관계’ 분과위원회를 맡긴 것이다.
--------------------
43)위의 글, 11쪽
44)「동맹 력사편찬위원회 신설 분과 위원 일부 개선 및 보선」, 조선미술 6호, 조선미술사, 1958, 45쪽.
기웅의 뒤늦은 현지 파견은 ⑦「공화국 창건 10주년 전람회를 앞둔 미술가들의 왕성한 창작 활동」에서 알 수 있다. 황해도 황해제철소에서 겪은 단기 현지 파견이 그것이다. 거기서 기웅은 “용해공들의 투쟁 모습을 쩨마로 하는 작품을 구상해 오던바 기본 구상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에쮸드에 애쓰고” 있다. 기웅은 그 작품을 “공화국 창건 10주년 전람회”에 낼 계획이었다.45) ⑧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국가미술전람회 목록」에서 전시 작품으로 60×90cm 크기의 「용해공」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9년 3월에 기웅은 11명으로 이루어진 예술문화 방문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련을 다녀오는 혜택을 입었다. ⑨ 「모쓰크바 및 레닌그라드-사생첩에서」에서 그 일을 확인할 수 있다. 곧 “3월 29일부터 4월 2일까지 약 2주일에 걸쳐 모쓰크바, 레닌그라드에 체류”하면서 “사회주의 제제 조형 예술 전람회를 비롯하여” 여러 박물관, 미술관을 참관하고, “기타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걸쳐 쏘련을 견학”하는 기회였다. 그 결과를 7월호에46) 실었다. 오택경 ․ 리석호 ․ 박문원 ․ 황헌영 ․ 김광일의 작품과 함께 기웅은 스켓취 「문화인 아빠트」를 더했다. 어느 모로 보나 1959년은 기웅에게 뜻 깊은 해였다. 종파주의 논란의 칼날 맞은 쪽에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파견 견학이 이루어진 셈이니, 열성적인 활동이 빚어낸 결과였을 것이다.
기웅은 남로당계 축출과 아울러 1956년부터 불어 닥쳤던 종파주의 논쟁과 제거 바람도 빗겨났다. 조선미술에 드러나는 기웅의 작품 바깥쪽 활동 관련 기록들은 그이가 그러한 격랑을 벗어난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비록 황해도 해주로 오간 단기 파견이 주어졌으나, 그 일도 「용해공」이라는 뛰어나고도 성공적인 결과물로 답함으로써 그이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소련 견학단 파견 경험은 그 한 꼭지점이었던 셈이다.
----------------
45)유준수, 「공화국 창건 10주년 전람회를 앞둔 미술가들의 왕성한 창작 활동」, 조선미술 8호, 조선미술사, 1958, 39쪽.
46)「모쓰크바 및 레닌그라드-사생첩에서」, 조선미술 7호, 조선미술출판사, 1959. 30-31쪽.
2) 사회주의 미술 창작과 당성의 승리
북한 미술가의 작품 원화를 온전하게 맛볼 수 있는 제도나 장치는 우리에게 열려 있지 않다. 드물게 개별로 들어와 있는 전시 작품을 만나는 게 고작이다. 그런 가운데 조선미술에 실린 원색/흑백 작품 사진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아쉬움을 덜어준다. 기웅 경우도 리재현의 「기웅」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작품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어 뜻이 적지 않다. 기웅은 조선미술에 13편의 작품을 실었다.
① 「낀그림 1」(스켓취), 창간호, 1957.
② 「낀그림 2」(스켓치), 창간호, 1957.
③ 「풍경」(유화), 창간호, 1957.
④ 「낀그림」(스켓취), 2호, 1957.
⑤ 「쉬는 처녀들」, 5호, 1957.
⑥ 「낀그림」, 6호, 1957.
⑦ 「상봉」(1952), 2호, 1958.
⑧ 「상봉-1951년 5월 19일 현리 전투에서」, 6호, 1959.
⑨ 「용해공」(표지)(유화), 3호, 1959.
⑩ 「조선인민군 추모탑 제막식에서」(스켓취), 3호, 1959.
⑪ 「1939년 장백현 여운작에서 진행된 5ㆍ1절 경축 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 원수」, 4호, 1959.
⑫ 「문화 아빠트」(모쓰크바 및 레닌그라드-사생첩에서)(스켓취), 7호, 1959.
⑬ 「간삼봉 전투」(김진항과 합작)(유화), 11호, 1961.
⑭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ㆍ1절 경축 대회」(유화), 12호, 1961.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미술에 기웅의 그림은 모두 14차례 실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서 ⑦과 ⑧은 같은 작품이다. ⑫와 ⑭ 또한 같다. 다만 이름이 바뀌었다. ⑫는 「1939년 장백현 여운작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 원수」(1959)이고 ⑭는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1961)다. 기웅이 처음 발표할 때 ⑫와 같이 중국 땅 “장백현 여운작”에서 진행된 “경축 대회”로 제목을 붙였으나, ⑭에서는 함경남도 장진군의 마을 ‘소덕수’로 김일성이 ‘연설’하는 장소가 바뀌었고, 더 간결하게 제목을 손질을 했다. 두 곳 모두 김일성의 이른바 항왜 유격 활동과 관련이 있는 곳이지만, 기웅이 소덕수를 여운작으로 착각을 하였거나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47) 이 둘의 중복 게재를 넣으면, 조선미술에 실린 기웅의 그림은 모두 12편으로 준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북으로 간 미술가들 저작 목록의 「기웅」에서는 이들 가운데서 10점을 찾아 실었다.48) ⑨「용해공」 경우에는 조선미술의 것을 올리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10주년기념미술작품집(국립미술사, 1958)의 것을 따랐다. 「간삼봉 전투」 경우에도 조선미술의 것을 올리지 않고, 문학신문 1962년 4월 6일의 것을 실었다. 그리고 ⑪과 ⑭는 빠뜨렸다.
조선미술 게재 그림 12편 가운데에는 ⑨「용해공」에서 보듯 표지 그림까지 보인다. 작품 게재는 창간 초기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년에 걸쳤다. 물론 그 가운데는 「상봉」(⑦ ․ ⑧)과 같이 이미 경인년전쟁기에 내놓아 크게 상찬을 받았던 작품도 보인다. 짧은 5년에 걸쳐 14회 12편의 조선미술 발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기웅은 조선미술 초기부터 출판 현장과 깊이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은 창간호에 실린 세 작품을 빌려 암시받는다. 1957년 창간호에는 편집위원도 아니면서 제목 미상의 낀그림(삽화) 2편(①·②)49)에다 ③「풍경」까지 실었다. 낀그림은 출판 꾸밈새 가운데서도 남은 지면을 활용하거나 지면 효과를 드높이기 위해 해당 자리에 걸맞게 올린 그림이다. 이 일은 조판과 인쇄 교정이 이루어지거나 그 과정에 가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맡기 어렵다. 기웅이 창간호 여백을 메우는 낀그림을 둘이나 실은 것은 그이가 조선미술 편집, 출판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다. 창간호에서 기웅을 젖혀 두고 낀그림을 올린 이는 목차에 「스켓취」 하나를 올린,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워원장 정관철이 유일하다. 그 점은 이어진 2호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웅은 제목을 밝히지 않은 낀그림 ④를 다시 올렸다.50)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낀그림 ⑥으로 이어진다.
---------------------
47)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서도 ‘소덕수’로 바꾼 ⑭를 제목으로 달았다. 리재현, 앞에서 든 책, 283쪽.
48)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⑩, ⑫.
49)목차에는 올리지 않고, 본문 안에 작품으로만 실었다. 조선미술 창간호, 조선미술사, 1957, 29쪽 : 46쪽.
50)조선미술 2호, 조선미술사, 1957, 29쪽.
--------------------
51)정현웅, 「꼬쁘리브쉬짜의 고가」(수채화) : 「농가」(수묵화).
1957년도 5월호 김창석이 쓴 글 가운데 한 본보기로 올린 작품이 ⑤「쉬는 처녀들」이다. “한나절의 로동을 마치고 점심 때의 즐거운 휴식을 즐기는 협동 마을 처녀들의 희망과 꿈을 맑은 여름 날의 태양 광선 아래에 정서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김창석은 이 작품이 “에로찌즘이나 부르죠아적인 탐미주의”와 다른 “서정시적 지향성”이 돋보이며, 그러한 “쟌르의 개척 시도”52)를 보여 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⑥은 목차에 올린 낀그림이다. ‘뜨락또르’ 작업 과정을 그렸다.
1958년에 기웅은 작품 1편을 화보로 실었다. 1952년에 그렸던 「상봉」이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을 맞으며’라는 표제 아래 오른 전쟁기 우수작 가운데 하나로 뽑힌 결과다. 월북 초기 기웅의 성공작이었던 「상봉」은 이른바 ‘항미원조’ 전쟁에 나선 중공 인민군과 북한 인민군의 혈맹으로 묶인 ‘조중친선’을 잘 표현한 대표 작품이라 거듭 언급된 작품이다. 처음 전시 국가미술전에 내놓았던 것이다. 이어 문학예술 1952년 10월호에 실리기도 했다. 본디 제목은 「상봉- 1951년 5월 19일 현리 전투에서」다. 화면은 대각선 왼쪽 아래와 오른쪽 위, 둘로 나뉜 구도 안에서 아래에서 중공 ‘지원군’을 맞이하는 북한 인민군과 지원을 위해 길게 내려오는 위의 중국 인민군을 담았다. 거기다 ‘지원군’을 향한 인민군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이 시혜자인 중공 인민군을 향한 반가움과 고마움을 극대화하도록 이끌었다. ‘조중친선’의 현실을 뛰어난 구도로 담아냈다는 평가가 허투른 것이 아닌 셈이다. 이어서 기웅의 ⑨「용해공」이 표지화로 올랐다. 황해제철소 단기 현지 파견의 결과물로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미술 여러 분야의 중심 작품을 그때그때 표지그림으로 뽑아 올리는 조선미술의 버릇으로 보자면 「용해공」은 이른바 ‘천리마’ 시기 북한 미술이 가야할 길을 잘 보여 준 작품이라 널리 공인을 한 셈이다.
리재현은 이 작품을 두고, “현실 속에서 시대의 전형을 찾아내고 그것을 초상 형식을 통하여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그려” 낸 특성을 지니는데 그 대표 본보기로 유화 「영웅 직장장」과 함께 이 「용해공」을 들었다. “비록 단순한 초상 형식이지만 그것을 로동생활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 줌으로써 주인공의 성격적 면모를 보다 뚜렷하게 강조”했다고 썼다. “「용해공」은 쇠물이 끓어번지는 정형을 침착하게 들여다보는 모습을 반신으로 형상하였다. 그 너머 풍경에는 쇠물을 뽑아내는 용해공들의 작업 모습이 공장 내부의 구조물과 함께 륜곽적으로 그려져 있다. 불빛에 반사되여 더욱 이글거리는 젊은 용해공의 침착한 모습을 통하여 강철 생산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쳐 나가는 우리 로동계급의 형상을 꾸밈없이 그려내였다.”고 고평을 했다. 단기 파견의 결과를 이렇듯 성공적인 작품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기웅의 재능이 뛰어났던 데 있을 것이다.
기웅의 열 번째 작품은 ⑩「조선인민군 추모탑 제막식에서」라는 스켓취다. 조선인민군 추모탑은 1958년 초순에 제작 과제가 주어졌다. 처음에는 조각가 5명으로 시작해 뒤에 다시 2명을 더해 완성한 것이다. 기웅은 그 행사장에 참석해 웅장한 추모탑을 그려 담았다.
⑪「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를 두고 리재현의 「기웅」 기술에서는 ‘1955년, 100호’라 적었다. 큰 작품이다. 그리고 처음 발표된 때는 1959년이 아니라 1955년이라는 뜻이다. 조선미술 지면으로서 처음 선을 뵌 셈이다. 이 작품을 두고 리재현은 「기웅」 기술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 령도하신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을 력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형상한 혁명적 미술 작품”이라 고평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혁명 활동을 심오한 예술적 경지에서 그린 이 작품은 전후 시기 창작된 혁명미술 화폭들 가운데서도 우수한 작품에 속한다. 력사적인 고난이 행군을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산지구에로의 진군을 앞둔 1939년 5월 1일에 몸소 경축대회를 마련하시고 항일유격대원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는 연설을 하시였다. 작품은 이 력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서 형상의 구체성과 진실성이 담보되여 있다.
화면에는 봄바람이 가볍게 부는 밀림 속에서 한손을 드시고 대원들 앞에서 연설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존귀하신 영상이 정중히 모셔져 있다. 분미, 가문비나무들이 꽉 들어찬 밀림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조국 진군의 봄 명절을 맞는 항일유격대원들의 기쁨은 밀림과 같이 끝없이 설레이고 있다.
갖가지 “나무들이 꽉 들어찬 밀림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조국 진군의 봄 명절을 맞는 항일유격대원들의 기쁨은 밀림과 같이 끝없이 설레”인다는 기술은 이미 사전적 풀이를 넘어서 문학글 수준으로 고양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감정적, 문체론적 격앙은 작품이 지닌 우수성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김일성 항왜 항쟁의 위대성이라는 주제론에서부터 예기된 결과다. 1961년 12호 조선미술의 사설에서 “우리 미술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 것은 중요 공장, 기업소들과 농촌에 들어가서 현지 창작 사업을 진행한” “창작 집단이 집체적으로 당 정책을 연구하며 창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경험들은” “천리마의 대진군으로 들끓는 현실을 폭넓고 심오하게 반영함에 있어서 반드시 살려야 할 심중한 문제들을 적지 않게 해명해” 준다고 썼다. 기웅의 작품은 그런 좋은 본보기 작품이었던 셈이다.
이어 1959년 8호에 기웅은 ‘쏘련미술전람회 작품 감상’의 ‘유화’편 관람평을 실었다. 「우가로브작 「탄광에서」를 보고」가 그것이다. 앞쪽 작품 바깥쪽 활동에서 이미 말한바와 같이 11명으로 구성된 소련 방문 활동의 결과 보고 격인 글이다. 거기다 ‘모쓰크바 및 레닌그라드-사생첩에서’라는 이름 아래 방문단의 스켓취들을 모아 올렸다. 기웅은 ⑪「문화인 아빠트」로 함께했다. 거기에는 “세계의 지붕인 양 하늘을 덮어 모쓰크바 강에 어리는 웅대한 그림자가 사람들의 정신을 휘황하게 한다.”라는 작품 풀이를 붙었다. 소련 예술문화인의 거주 환경이 주는 놀라움과 감동을 ‘정신’이 ‘휘황’해 진다는 말로 풀어 담은 셈이다.
1960년을 건너 뛰어 1961년 11월호에 기웅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역량을 잘 담은 작품을 내놓는다. 김진항과 합작한 「간삼봉 전투」가 그것이다. 리재현의 「기웅」에서는 창작 연도를 1960년으로 적었던 작품이다. 「간삼봉 전투」는 구도를 앞의 「상봉」과는 거꾸로 마련하였다. 리재현에 따르면 “「간삼봉전투」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 후 또 다시 일제 침략자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준 간삼봉전투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원쑤와의 싸움에서 무비의 영웅성을 발휘한 항일유격대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을” ‘전형화’시켜 체현했다. “개성적인 인간의 구체적이며 진실한 형상을” 빚어내는 기웅의 역량이 잘 살아 있다. 김일성의 만주 지역 항왜 유격대 활동의 빛나는 상징 장소 가운데 하나가 기웅의 화필로 생동한 현실로 되살아난 셈이다. 그리하여 「간삼봉 전투」는 김일성의 항왜 투쟁 활동을 노래한 당대 대표적인 서사시집 밀림의 력사(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2) 맨 앞자리에 속그림으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자연스런 반향이었던 셈이다.
⑬「간삼봉 전투」는 김진항과 합작이다. 이를 두고 이재현은 아래와 같이 썼다.
「간삼봉전투」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 후 또 다시 일제 침략자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준 간삼봉전투 장면을 형상화였다.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총창을 비껴들고 달려 나가는 항일유격대의 영웅적인 투쟁 모습이 화면에 뚜렷이 부각되였다. 여기서 두 명의 인물, 비호처럼 내달리는 유격대원과 그 뒤를 이어 몸을 일으켜 적진을 노려보는 유격대원은 원쑤와의 싸움에서 무비의 영웅성을 발휘한 항일유격대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을 체현한 인물로 전형화되였다. 사선을 이루어 언덕 밑을 향해 성난 파도같이 밀려가는 항일유격대원들의 전투 서렬은 그 무엇으로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구도적으로 안받침되여 있다. 기웅의 주제화들은 조형화의 수준이 일정한 높이에 올라 있다. 인물들의 행동 성격은 개성적인 인간의 구체적이며 진실한 형상을 통하여 밝혀져 있다.
「간삼봉 전투」를 향한 평가가 사뭇 드높다. 구도는 앞의 「상봉」과는 거꾸로 마련하였다. “원쑤와의 싸움에서 무비의 영웅성을 발휘한 항일유격대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을” ‘전형화’시켜 체현한 작품이 「간삼봉 전투」다. “개성적인 인간의 구체적이며 진실한 형상을” 빚어내는 기웅의 역량을 떠받친 표현이다. 이른바 김일성의 만주 지역 항왜 유격대 활동의 빛나는 상징 장소 가운데 하나가 기웅의 화필로 생동한 현실로 되살아난 셈이다. 그리하여 「간삼봉 전투」는 김일성의 항왜 투쟁 활동을 노래한 당대 대표적인 서사시집 밀림의 력사(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2) 맨 앞자리에 속그림으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자연스런 반향이었던 셈이다.
1961년 11월의 「간삼봉 전투」와 12월의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 재발표를 끝으로 조선미술에서 기웅의 작품은 볼 수 없다. 작품 수록이나 2차 담론 언급, 또는 동향 파악에서 기웅이라는 이름이 한 차례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1964년 11월 4호부터 조선미술은 다시 월간으로 나오면서 대중미술 잡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1965년에 있었던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의 ‘연구 토론회’에서도 기웅은 이름을 얹지 못했다. 4일에 걸쳐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1964년 11월 7일 수상 동지 교시 관철을 위한 연구 토론회’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동향의 안상목을 비롯해 박문원, 김상헌·박승구·조규봉·배운성·지청룡·정현웅과 같은 이들이 자리를 했지만 기웅은 빠졌다. 다시 말해 기웅은 1963년부터 미술사회에서 이름을 묻은 셈이다.
이 시기는 문학사회에서도 한설야를 중심으로 카프계 문학인들에 대한 제거 작업이 이루어졌던 때다. 현지 파견을 보내고 거기서 일정한 성과를 보여 주거나, 평양 위세 중앙의 복권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파견지에 묻혀 살 수밖에 없었다. 기웅 또한 그러한 카프계 제거의 칼날을 맞아 오래도록 미술사회 앞자리로 나서지 못하는 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월을 견디면서 그의 삶은 1977년 예순여섯 살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앞으로 더 꼼꼼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만약 1963년부터 1977년 사이에 기웅의 작품 발표나 미술사회 활동이 현재와 같이 더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의 현지 하방과 잠행의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할 수 있다. 그이 나이 쉰두 살부터 예순여섯 살에 이르는 열네 해에 걸친 시기다. 한 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을 원숙기다. 그런 세월을 미술사회 앞자리에서 물러서 살다간 셈이다. 안타까움과 고통이 깊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다시 스물두 해 남짓 더 흘러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에서 기웅은 화려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은 기웅의 전쟁기 성과작 「상봉」과 「간삼봉 전투」, 「용해공」, 그리고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와 같은 뛰어난 작품이 북한의 국가미술관이나 해방전쟁기념관과 같은 기념 현양 시설에 오래도록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오가는 이들에게 이른바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혁명적 정통성과 영웅적 영도라는, 당성과 인민성을 꾸미는 작품으로 추겨졌던 덕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평양 미술사회 중앙에서는 밀려났으나 완연한 제거 상황까지는 겪지 않았음을 일깨워 준다. 월북 뒤 힘껏 북한 사회주의 미술 창작에 진력한 기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조선미술을 실증적으로 살피는 이 자리를 빌려 리재현의 「기웅」 기술에서 중요하게 다룬 작품은 거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상봉」에서부터 「용해공」, 「간삼봉 전투」,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경축대회」들이다. 거기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북으로 간 미술가들 저작 목록에서 담지 못했던 3차례 2편의 작품, 곧 「용해공」과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의 조선미술 게재를 확인했다. 재북 시기 기웅 작품의 실재에 다가설 수 있는 실마리를 더할 수 있게 된 셈이다.
3) 평가 담론의 두 방위
조선미술 속에서 기웅의 작품이나 작가 됨을 두고 이루어진 평가 담론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미술 초기부터 꾸준하게 기웅이 빠지지 않았다. 1957년 창간호에서부터 시작하여 1960년에 걸쳐 모두 7편이 보인다.
① 길진섭, 「해방 후 조선 미술」, 창간호, 1957.
② 김창석, 「찬란한 민족 미술 창건 도상에서-전국 미전을 론함」, 5호, 1957.
③ 정관철,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조형예술」, 9호, 1958.
④ 정관철, 「우리 조형예술의 새로운 혁신을 위하여」, 2호, 1959.
⑤ 「우리 당의 애국적 혁명 전통을 더욱 다양하고 폭넓게 형상화하자」, 4호, 1959.
⑥ 조인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의 조형 예술」, 6호, 1959.
⑦ 김창석, 「약진하는 민족 유화」, 2호, 1960.
길진섭이 쓴 ①「해방 후 조선 미술」은 「조선미술 창간을 맞아 그 앞 시기 광복 뒤부터 1957년 현재까지 북한 미술의 흐름을 개괄한 글이다. 길진섭은 이른바 평화적 건설 시기라 일컫는 광복기를 거치고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시기 기술에 이른다. 이 시기 많은 맹원들이 전투원으로 또는 후방에서 종군을 하여 화필을 탄알 삼아 투쟁을 했다. 그 가운데서 60여 명이나 훈장과 메달을 수여 받았다. 특히 전쟁기식 간결성과 민활성을 특징으로 하는 만화, 포스터 분야의 성과가 두드려졌다고 그이는 짚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는 1952년 7월 조국해방전쟁전람회를 빌려 큰 모습을 드러냈다. 유화, 조선화, 포스터, 만화, 조각, 공예 작품을 전시하였고 그 작품들은 1953년도 헝가리 부타페스트에서 전시회로 내놓아 환영을 받았다 썼다. 여기에 기웅의 유화 「상봉」을, 정종여의 조선화 「바다가 보인다」와 함께 우수한 작품으로 특기해 포함시켰다. 전쟁기 제3차 군무자미술전람회에 전시된 육백 남짓한 작품과 같이 다룬 자리다. 기웅의 「상봉」이 전쟁기 북한 미술에서 지녔던 상징성이 이러한 길진섭의 글로 확인되는 셈이다.
북한 초기 미술사회에서 중요한 비평가로 활동했던 김창석의 ② 「찬란한 민족 미술 창건 도상에서-전국 미전을 론함」에서도 기웅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전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가운데서 길진섭의 「종달새가 운다」(유화)와 함께 기웅의 「쉬는 처녀들」(유화)을 올린 것이다. 김창석은 기웅의 「쉬는 처녀들」을 두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안에서” “서정시적 지향성의 개척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라 평했다. 그림을 본문에 싣지는 않았지만 앞에서 소개한바, 1957년 조선미술 창간호에 실었던 「낀그림 1」 스켓취의 여성상과 어슷비슷한 맵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석은 기웅의 「쉬는 처녀들」과 함께 정관철의 「강철을 만드는 사람들」(유화), 박문원의 「삶을 찾아서」(남반부에서)(유화), 선우담의 「저녁의 대동강」(유화)도 함께 들었다. 당대 북한 유화계 대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기웅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이어서 1958년 9월, 미술동맹 위원장이었던 정관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을 맞아 조선미술에 논설 격인 ③「공화국 창건 1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조형예술」을 실었다. 거기서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창작된 우수한 작품들”로 유화 작품에서 문학수의 「영웅 조옥희」, 선우담의 「돌다리 전투」, 김진항의 「태평리 전투」와 함께 기웅의 「상봉」을 비롯해 자신의 「월가의 고용병」과 문석오의 조각 「증산의 기쁨」 들을 들었다. 이들 작품은 ‘진실로’ “인민성, 당성의 발현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무궁무진한 인민의 힘과 그 력사적 승리”를 “격조 높이 구가”한 뜻을 지닌다 했다. 길진섭에 이어 정관철에서도 전쟁기 북한 미술의 대표 성과 가운데 하나로 기웅의 「상봉」이 거듭 올려 세워진 셈이다.
이어서 한 해 뒤 1959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세 군데에서 기웅에 관한 언급을 만날 수 있다. 먼저 정관철은 이듬해 2월 조선미술에서 지난 해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맞아’ 열었던 국가미술전람회를 회고하는 보고를 하였다. ④「우리 조형예술의 새로운 혁신을 위하여」가 그것이다. 미술동맹의 확대 상무위원회 자리에서다. 거기서 국가미술전람회를 앞두고 지난 미술 전통 가운데서 전쟁기 기웅의 「상봉」이 지닌 우수성을 내세웠던 정관철은 전람회 출품작 가운데서 문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다시 기웅의 「용해공」을 들었다. 정관철은 그 자리에서 북한의 “조형 예술 앞에는 당의 호소를 받들어 천리마를 탄 기세로 진군하는 영웅적 로동 계급의 고상한 품성, 당적 인간들을 형상화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업 가운의 하나”라 전제했다. 그런 다음 “기웅 작 「용해공」은 당의 붉은 심장으로 고동치는 영웅적 로동 계급의 전형적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지 못하”다고 썼다. 모자란 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호인 3월호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용해공」을 표지로 올렸다. 정관철이 동맹 위원장, 곧 조선미술 편집 칙임을 지는 자리에 있던 때다. 한 달 앞서 “영웅적 로동 계급의 전형적 성격”을 잘 표현되지 못했다고 한 평가를 한 작품을 표지로 삼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용해공」을 두고 이루어진 정관철의 문제점 지적은 이상론적인 쪽에서 본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자체로서 보여 주는 「용해공」의 우수성을 가려버릴 정도의 비판은 아니었던 셈이다. 남은 것은 기웅의 「용해공」이 지닌 당대적 수월성이라 할 수 있다.
「용해공」에 이어 기웅의 화필이 거듭 미술사회의 눈길 안에 있었음을 알려 주는 글이 다시 두 달 뒤에 이루어졌다. 1959년 4호 조선미술에 실린 정론 ⑤「우리 당의 애국적 혁명 전통을 더욱 다양하고 폭넓게 형상화하자」가 그것이다. 북한 체제의 핵심 뿌리 가운데 하나인 김일성의 이른바 혁명 전통을 미술가들이 오늘날에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다하라는 속살의 글이다. 거기서 정관철, 림백, 최연해, 김익성의 유화와 함께 기웅의 「1939년 장백현 여운작에서 진행된 5.1절 경축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 원수」를 함께 들었다. 이른바 김일성 혁명 전통 주제의 형상화에 성공한 한 본보기 작품이라는 뜻이다.
두 달 앞서 2월호 표지화로 화려하게 선뵌 「용해공」은 황해제철소로 오갔던 자신의 단기 현지 파견의 성과물이다. 당대 천리마 상황의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이제 북한의 혁명 전통의 형상화에서도 기웅은 자기 역량을 아낌없이 내보인 셈이다. 초기 북한을 떠받치고 있었던 두 축, 곧 지나간 시절 김일성의 항왜 유격대 혁명 전통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천리마적 노력의 요구라는, 당대 김일성의 영도에 힘껏 발맞춘 작품을 기웅은 발 빠르게 내보인 셈이다. 이 점은 기웅이 지녔던 뛰어난 미술 역량뿐 아니라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향한 열성적인 헌신이 상승적으로 이루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6월을 맞아 조선미술은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시기 예술을 회고하는 글을 마련했다. 조인규가 쓴 ⑥「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의 조형 예술」이다. 그 자리에서도 기웅의 전쟁기 「상봉-1951년 5월 19일 현리 전투에서」가 우수 작품으로 이름을 올렸다. 정관철 ․ 고 탁원길 ․ 정종여 ․ 문학수 ․ 김진항 ․ 선우담의 작품과 나란했던 자리다, 이들은 “인민군 장병들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집단적 영웅주의를 군상화한 인상 깊은 작품”이다. 그런 가운데 기웅의 「상봉」은 리석호의 「중국 인민지원군을 마지하는 농민」과 함께 각별히 “공동의 원쑤를 물리치기 위한 정의로운 싸움에 일떠선 조중 량국 인민의 풍부한 정신적 풍모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고 썼다. 「상봉」이 지닌 전쟁기 대표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자리였다.
1960년에 들어 기웅은 다시 한 차례 논의 속에 놓인다. 김창석의 ⑦이 그것이다. “8.15 해방 15주년 국가 미술 전람회를 앞두고 개최되는 각 분과별 전람회”에 내놓은 작품을 평하는 자리였다. 거기서 “민족적 특성을 발현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할 과제 앞에서 평자가 보기에 “독특한 개성적 스틸에서 민족적 특성의 발현을 기도하였으나 그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작품들”이 보였다. 기웅의 「우후 금강」, 박영익의 「대동문」이 그들이다. 그럼에도 조인규는 이들이 “일정한 기교의 높이에 올라선 예술가들임에 틀림없으며 또한 자기의 개성적 마체르를 소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긍정적인 전언도 아끼지 않았다. 바탕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의 기치 하에서의 다양성이여야 하며, 또한 민족적 특성을 발휘하는 범위 내에서의 다양성이여야 한다.”고 못 박은 뒤였다. 전람회를 빛나게 한 최재덕의 「사과 따는 처녀」나 림렬의 「싸이클 경기」와는 다른 평가 자리에 기웅의 작품이 놓였다. 초상화로서 “민족적 특성”은 살렸으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학 원칙에서는 모자람이 있다는 아쉬움을 짚은 셈이다.
앞에서는 기웅의 작품을 두고 이루어진 조선미술 안쪽의 2차 담론을 훑어보았다. 1957년 창간 초기부터 1960년까지 네 해에 걸쳐 모두 일곱 차례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크게 두 쪽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지나간 전쟁기 미술의 우수성을 되새기는 자리에서 보이는 작품 「상봉」의 우수성 인식이다. 이른바 조중친선의 국제주의 친선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서 「상봉」은 거듭 평자들의 눈길 안에 들었다. 다음으로, 당대 북한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술이 요구하는, 혁명 전통과 천리마 시대의 전형성 획득을 향한 노력의 수준이다. 다만 이 경우 전쟁기 상봉의 일방적인 상찬이나 대표성 회고와는 달리 미진한 부분에 관한 지적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당대 북한 미술사회의 평가장 안에서 기웅은 남달리 일정한 명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북한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술사회 안에서 기웅이 지녔던 미학적 정합성과 우수한 창작 역량에서 말미암은 일일 것이다. 월북 뒤 1950년대 내내 기웅은 북한의 위세 중앙인 평양 미술사회 편입에 성공하였던 셈이다.
4) 현장 비평문의 너비와 감각
조선미술 발간 12년 동안 기웅이 내놓은 문필은 많지 않다. 같은 경남 월북 무대 미술가 강호나 정종여에 견주어 뚜렷하게 빈도가 낮다. 조선미술에 실린 기웅의 문필은 세 편이다.
① 「최연해 개인전 소감」, 4호, 1957.
②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전국 미술 써클 전람회 심사를 마치고」, 12호, 1958.
③ 「우가로브 작 「탄광에서」를 보고」(쏘련 미술전람회 작품 감상 ‘유화 편’), 3호, 1959.
①「최연해 개인전 소감」은 조선미술에 가장 먼저 실린 기웅의 문필이다. 북한에서 미술 전시회는 중요 기념일이나 주요 행사를 맞아 해마다 벌이는 국가미술전시회, 미술대학 학생전람회, 전국 ‘미술써클’ 전람회와 같은, 집단적 공동 전시회가 중심이다. 그런 속에서 개인전을 갖는 일은 북한 미술사회 중앙에서 볼 때 그만한 뜻과 의의를 충분히 인정한다는 각별한 공인인 셈이다. ‘개인전’을 열만큼 무게 있는 자리나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개인 전시회를 갖는 일은 조선미술 기사로 확인하더라도 희귀한 경우다. 최연해가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전시 작품의 됨됨이에 있었다. 김일성의 이른바 항왜 혁명 활동 ‘전적지 답사 미술’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조선미술은 기웅의 전시회 소감을 실으면서 작품란에서는 최연해의 「서강에서」(스켓취)와 「6도구 부락」 둘을 지면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올리는 적극적인 소개까지 했다.
최연해(1919-1967)는 평양 출신이다. 1926년 평양사립광성고보를 중퇴한 뒤 1928년 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와 을유광복까지 세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을유광복을 맞아 최연해는 평안남도인민위원회 교육부 활동을 시작으로 1946년 평남미술동맹 위원장에다 미술동맹 초대 서기장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초기 북한 사회가 요구하는 굵직굵직한 미술 도안 작업, 공예품 창작에 이바지가 컸다. 그런 최연해는 1953년 9월 이른바 ‘항일혁명투쟁전적지조사단’ 단원으로 거의 넉 달 동안 중국 동북 지역을 답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김일성의 전적지, 사적지 그림을 그렸고 그것을 간추려 1956년 동행했던 송영의 기행문집 백두산은 어데서나 보인다에 낀그림으로 살려냈다. 아울러 1957년에 50점 남짓한 작품으로 전적지 답사 개인 미술전을 가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이른바 항왜 혁명 전통을 북한 역사의 줄거리로 삼고자 했던 집단적 서사화에 미술사회가 마련한 첫 결실이라는 쾌거였다. 몇 해 뒤 한설야가 쓴, ‘인민학교 학생용’ 일성의 전기 그림책 만경대(아동도서출판사, 1961)의 표지와 낀그림을 최연해가 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①백두산과 두만강 그리고 압록강 강줄기를 따라 광활한 동북 지구 일대는 바로 김일성 원수가 직접 지도하신 항일 유격대원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곳들이다.
-(줄임)-
②-1 우선 최 연해 개인전을 보고 느끼는 것은 화가가 간고한 현지답사를 통하여 지묘하고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여 스켓취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상 동지와 그 전우들에 대한 더함 없는 경모의 정이 배여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줄임)-
최 연해의 소품들은 화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현실에 충실하였고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조형적 회손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②-2 그러나 몇몇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구도에서나 색조에 있어서 단순히 현지 견취도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례를 들면 「간삼봉 전투지」에서 -(줄임)- 구도에서나 디테일 묘사에 있어서 더 강조되고 회화적 구성의 첨예화가 좀 더 강조되지 못한 느낌은 있으나 이 이상 더 좋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줄임)- 지나친 주문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최 연해 개인전에 전시된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도 화가의 솜씨 있는 화면처리를 볼 수 있었다.
-(줄임)-
②-3 최연해의 소품에서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싱싱하고 향기롭다는 점이다. 물론 기록적인 작품이 가지는 좋은 점이기도 하나 그의 화가로써의 태도에도 진지한 풍모가 배여 나오고 있다. 특히 매개 작품에 간단한 성명이 첨부되여 있는데 이것은 화가 최 연해가 자기의 그림의 부족한 점을 글로써 보충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줄임)- 조형적 회손을 설정하지 않고 통신원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새로운 혁명적 홰’불로 밝힐려는 점에서 또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③끝으로 나는 화가 최 연해의 타브로에 이 소품 등에 얻은 좋은 경험을 멋있게 도입하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 -(줄임)- 소품전에 전시된 작품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서정이 타브로에서는 시를 읊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심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화가의 생동하는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는 말인가? -(줄임)- 어쨌든 이 소품들이 타브로에서 생기 발랄하게 살아 나와야 하겠다는 것을 부탁한다. 오랜 작화 경력을 가진 최연해의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서정시를 대담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높이여 노래 불러 달라는 것을 재삼 부탁한다.
- 「최연해 개인전 소감」 가운데서
기웅의 최연해 개인전 관람평은 세 매듭으로 나뉜다. ①개인전의 의의, ②작품 맛보기, ③작가에 대한 당부가 그것이다. 머리글 ①에서는 최연해 개인전을 빌려, 김일성의 혁명 전통과 애국주의의 ‘찬란한’ 투쟁 성과를 맞볼 수 있는 감격을 말했다. “시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가슴을 두드려 주는 감동이 그것이다.
이어서 ②작품 맛보기는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담았다. 처음 ②-1에서는 최연해 작품이 지닌, 작가의 정열적인 노력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 충실한 현실 묘사, 기록적인 조형적 우수성에 관한 칭찬이다. 최연해는 “간고한 현지답사를 통하여”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여 스켓취”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과 전우들에 대한 더함 없을 “경모의 정”을 담았다. 하나 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음은 물론 “현실에 충실”하여 “기록적인 성격을” 잘 살려낸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②-2에서는 구도나 색체에서 보이는 상상적인 부분 조형에도 뛰어난 화면 처리를 했음을 추겨 세웠다. 최연해의 작품은 “단순히 현지 견취도가 아니라” “화가의 솜씨 있는 필치”로 아름답게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특장은 대표적인 「간삼봉 전투지」뿐 아니라 내놓은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물론 “구도에서나 디테일 묘사에 있어서 더 강조되고 회화적 구성의 첨예화가” 미진한 느낌은 있으나 그 “이상 더 좋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주문”이라며 자신의 간접적인 아쉬움을 스스로 췌언으로 돌렸다.
작품 맛보기 ②-3에서는 작품마다 최연해가 붙인 “간단한 설명”에 관한 적절성 평가다. 최연해의 작품은 “싱싱하고 향기롭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낱낱 “작품에 간단한 성명이 첨부”된 풀이에서 비롯한다고 기웅은 보았다. 그 일은 “화가 최연해가 자기의 그림의 부족한 점을 글로써 보충하려” 했던 게 아니다. “조형적 훼손을” 입지 않고 김일성과 그 전우의 혁혁한 발자취를 전달하려는 “통신원의 역할”에 충실하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새로운 혁명적 홰’불로” 끌어 올리는 데 알맞은 방법이라 보았다. 설명 텍스트가 지닌 뚜렷한 지시적 기능이 보는이로 하여금 그림의 속살에 더 깊숙이 가닿을 수 있게 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작품 맛보기를 보여 주는 둘째 매듭의 ②-1. ②-2, ②-3, 세 단락은 뒤로 나아가면서 상승적 효과를 마련한다. 그러한 칭찬과 감동어린 전언에 이어 마무리 ③은 작가를 향한 당부다. 최연해가 전시회에서 보여 준 생기발랄한 화필과 경험이 앞으로 완전한 형태의 유화 창작품으로 되살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오랜 작화 경력을 갖춘" 작가로서 자신의 서정적 향기를 ‘대담하게’ 모든 사람에게 끼쳐 달라 재삼 부탁한 것이다. “시를 읊는다”든가 “대담한 서정시”와 같이 막연한 표현이 쓰이고 있지만 보다 활달한 필치로 전시 소품을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재탄생시켜 달라는 뜻이다. 당부를 위한 당부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기웅의 최연해 소품전 관람평은 현지답사를 빌러 김일성과 두리 전우들의 뛰어나고도 감동적인 혁명 역사를 꼼꼼하게 잘 되살려냈다는, 개인전이 지닌 높은 뜻과 작품의 우수성에 대한 적극적인 상찬이다. 이 점은 나아가 김일성의 이른바 혁명 역사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자신의 정신적 위치까지 드러내는 이중 효과를 지닌다. 화가 기웅으로서는 즐겁고도 자랑찬 기회였다.
기웅의 두 번째 문필은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전국미술써클전람회 심사를 마치고」다. 1958년 12호 조선미술에 실렸다. 이른바 공화국 창건 20주년, 곧 1958년 8월을 맞아 북한에서는 ‘국가미술전람회’와 ‘미술써클전람회’를 같이 열었다. 그를 위해 작품 공모를 받고 심사를 마친 입상작 전시회를 가졌다. 기웅은 그 가운데서 미술가동맹 회원을 상대로 한 ‘국가미술전람회’가 아니라 ‘미술써클전람회’ 공모 작품 심사를 맡았다. 심사평 주요 자리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①공화국 창건 1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나라 전체 인민들은 지금 인민 경제 모든 분야에서 세기적 기적을 창조하면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사회주의 락원을 향하여 질풍과 같이 내닫고 있다.
-(줄임)- 우리 미술가 대렬도 당의 정확한 문예 정책을 받들고 당의 사상과 의지를 조형 예술 분야에서 어떻게 구현하며 어떻게 근로자들을 사회주의 애국주의의 형상으로 창조할 것인가에 자기의 정열을 다 바쳐 왔다. -(줄임)-
②금번 서클 전람회 전체 입선 작품 심사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조직적 면에서 몇 마디 언급한다면 우선 작품 모집에 있어서 예견성 있는 사업 조직이 불만족한 데로부터 신인들이 창작품 반입 기일을 늦게 알았거나 몰라서 출품하지 못한 점들이다. -(줄임) 금후 반드시 시정되여야 할 문제다.
-(줄임)-
③금번 전람회 작품 심사원들이 일치하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각 장르에 걸쳐 비약적 발전을 보여 주었으며 소재의 구사에 있어서도 다양한 점을 말할 수 있다. 전문 미술가들 특히 중견 작가들의 창작에서의 부진 상태는 대조적으로 관찰할 때 더욱 그러한 감을 준다.
④-1 우선 조선화 부문에서 본다면 작년 서클전람회 출품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벅찬 현실 속에서 얻은 생기발랄한 작품이 적었다면 금번 전람회에서는 비교적 현실적 주제를 많이 취급하였다는 점이다. 과거 조선화에서의 산수, 절지화에 많은 정력을 기울였다면 금번 전람회에서 근로자들의 생활과 그들의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창발성과 노력적 위훈에 격동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소극적인 째마로부터 더 적극적인 째마에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한 묘사 능력에 있어서도 과거에 비해서 월등 발전 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줄임)-
④-2 다음으로 유화 부문에서 본다면 우선 주제의 다양성과 대담한 처리로써 전년에 비하여 비약적 발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서클에 망라된 유화 지망자들의 수가 많이 장성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창작 태도에서 진지하며 격동하는 빠포스가 그들의 가슴을 세차게 흐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줄임)- 그들도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유일하고 정확한 길에서 확신성 있게 발자국을 내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후비들이 이렇게 당과 인민이 요구하는 길에서 늠름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다양한 주제 확신성 있고 열정적인 태도들은 금번 서클 전람회의 일반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줄임)-
④-3 크라휘크 부문에서는 -(줄임)- 주제에서나 기술적 면에서 전문가들과 비교적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줄임)-
각 부문에서도 종전보다 주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내용이 명백하고 기교에 있어서도 진일보를 보이고 있다. 대리석을 능란하게 구사한 황석의 석조 「녀성 조합원」은 -(줄임)- 작은 흉상에서도 작업 후의 녀성 조합원의 보람찬 로동의 환희와 분위기가 잘 표현된 좋은 작품이라고 본다.
-(줄임)-
⑤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신인들의 창작 생활은 사상 예술적으로 당과 인민이 요구하는 기본 방향으로 확신성 있게 전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줄임)- 더욱 더 공장, 농촌, 미술 서클을 광범히 좆기하여 지도할 과업이 매개 도 지부 ‘반’에 망라된 미술가들에게 부과된 영광스러운 임무이며 매개 맹원들은 일반적 지도로부터 개별지도에로 점차 이행함으로써 신인들을 맹 대렬에 적극 인임 하여야 할 과업 실천에로 옮겨 놓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신인들은 자기들이 거둔 초보적인 성과에 자만하거나 조급히 대가를 꿈꾸는 옳지 않은 경향에 대해서는 각별한 투쟁을 하여야 하며 -(줄임)- 조그마한 재조에 자만 자족하지 말며 철두철미 현실에서 살며 근로자들의 심장으로 느끼고, 사색하고, 창조하는 미술가가 되기 위하여 허심하게 배우고 꾸준히 노력하여야 한다.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전국 미술써클 전람회 심사를 마치고」 가운데서
「공화국 창건…」은 앞선 「최연해 개인전」과 비슷한 맵시다. 머리글에 본문을 이은 뒤 마무리를 하는 3단 짜임새가 그것이다. 다만 본문 처음에 미술써클전람회에서 앞으로 고쳐야 할 문제를 먼저 짚은 다음(②), ②실질 심사평(③)을 붙인 점이 다르다. 그리고 ④마무리는 미술 신인에게 당부하는 말로 맺었다.
기웅은 ①머리글에서 말한다.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맞아 북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사회주의 락원” 건설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에 발맞추어 “미술가 대렬도” “당의 사상과 의지를 조형 분야에서” 구현하기 위해 동맹원뿐 아니라 “후비 대렬”도 정열을 바쳐 왔다. 그에 따라 이루어진 “신인 육성 사업”의 결실을 써클전람회 출품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어 기쁘다는 감회를 먼저 담았다. 발전하는 당대 사회주의 북한 현실과 나란한 미술사회 전반의 적극적인 활동과 성과를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높이 평가한 셈이다.
본문에 들어서는 전람회 운영에서 “조직적 면”의 잘못부터 짚었다. 미리 사업을 예고, 조직하여 출품자의 준비와 작품 반입 과정에 충실한 진행을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전언이다. 행사 진행을 향한 조언이니만큼 크게 다룰 문제는 아니나. 기웅은 그러한 사전 준비 미비가 “더 많은 그리고 더 우수한 작품들” 출품을 위해 앞으로 “반드시 시정되여야 할 문제”라 썼다. 그런 준비 미비를 두고 “극히 유감”이라는 표현까지 끌어 들였다. 이러한 최상급에 가까운 문제 제기는 다음에 이어질 작품평에서 누그러진 발언을 내놓기 위해 미리 마련한 “부족점 강조”라는 수사 장치일 수 있다.
실질 작품 심사평 본문 ③에서 기웅은 195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루어진 이번 ‘미술서클전람회’ 작품의 전반적인 우수성을 밝혔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미술 창작 사업에 전례 없는 열정을 바친 작품들”로 “수많은 신인들이 사회주의 사실주의 유일하고 정당하며 가장 선진적 창작 방법에 입각하여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출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각 “장르에 걸쳐 비약적 발전”과 “소재의 구사에 있어서도 다양한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사실은 “전문 미술가들 특히 중견 작가들의 창작에서의 부진 상태”와 대조적인 듯싶어 더욱 두드러진다.
‘전국미술써클전람회’ 공모 분야는 ‘국가미술전람회’와 같다. 조선미술 1958년 9월호에 끼워 붙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국가미술전람회 목록」에 따르면 ‘국가미술전람회’의 전시 영역은 셋이었다. ‘조선화’, ‘유화’, ‘그라휘크’가 그것이다. 나란히 연 ‘전국미술써클전람회’ 공모 영역도 같았다. 기웅의 구체적인 각 부문 심사평은 그에 따라 조선화, 유화, 그라휘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작품의 전반적인 우수성을 밝힌 뒤 우수 개별 작품 몇 편을 본보기로 짚는 방식으로 한결같다.
기웅은 조선화(④-1)부터 살폈다. “벅찬 현실 속에서 얻은 생기발랄한 작품이” 적었던 지난 해 출품 작품에 견주에 금번 전람회에서는 “비교적 현실적 주제를 많이 취급”한 점이 특징이다. 그 점은 “근로자들의 생활과 그들의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창발성과 노력적 위훈에 격동되었음을 반영”할 뿐 아니라, “소극적인 째마로부터 더 적극적인 째마에로 이행”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거기다 “묘사 능력에 있어서도 과거에 비해서 월등 발전”했다. 그러한 평가 뒤에 “유망한 전도를 확신”하게 하는 보기로 세 사람을 들었다. 그들의 우점은 “수법상이나 구도상에서 진지한 태도”,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태도”, “사물의 본질을 처리 소화”하는 점에 있다고 했다. 그와 거꾸로 열점은 “지나치게 그림을 만들려는 경향”이라 짚었다. 사회주의 현실의 본질을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전통 조선화가 지닌 장식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야 할 과제를 신인의 작품에서 읽은 셈이다.
두 번째 유화 심사평(④-2)에서 기웅은 지난해에 견주어 두드러진 우점을 셋으로 짚는다. “주제의 다양성과 대담한 처리”에서 보이는 “비약적 발전”, 유화 지망자의 수적 ‘장성’ 그리고 “창작 태도에서” 보이는 “진지하며 격동하는 빠포스”가 그것이다. 그들 써클 미술가들이 “기성 작가들에게 못지않게”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유일하고 정확한 길”을 확신 있게 내딛는 결과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양한 주제 확신성 있고 열정적인 태도”가 “금번 서클 전람회의 일반적 특징”이라 말을 더 거들었다. 그러한 본보기로 세 사람의 작품에 담긴 김일성을 향한 애국주의, 북한 현실에 대한 적확한 형상화, 그리고 국제주의 친선의 주제를 기웅은 높이 평가했다. 유화가 담아내고 있는 현실 반영에서 작품의 우수성을 짚은 셈이다.
마지막 ‘크라휘크 부문’(④-3)에서 다룬 갈래는 여럿이다, 그런 까닭에 앞의 조선화와 양화에서 보였던 부문 일반의 됨됨이를 먼저 밝히는 틀을 따르지 않았다. 바로 우수한 수채화와 조각 갈래 작품 평가로 넘어간 것이다. 수채화의 우수 작품을 두고 기웅은 구도와 채색을 다루는 능숙함이나 “개성적 스킬” 개척, 그리고 “대담하고 솔직한 관찰이 안받침된” 묘사의 능숙함, 자연스러운 억압 현실의 ‘형상화’ 역량을 높이 쳤다. 시각적 특성에서부터 주제적 특성에까지 다 평가 안에 넣은 눈길이다. 조각 부문에서는 이전과 달리 “주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내용이 명백하고 기교에 있어서도 진일보”한 점을 높이 매겼다.
기웅은 조선화와 양화, 그리고 크라휘크 부문에 걸친 작품 심사평을 올렸다. 기법의 능숙함이나 개성적인 발상, 사회주의 현실주의의 충실한 반영성과 애국주의 같은 점에 우수성을 보았다. 그 무렵 북한 문학예술의 흐름으로 보아 유별날 것도 없는 생각이다. 이러한 평가를 내세운 뒤 기웅은 마무리로 써클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내놓은 신인을 향한 당부로 끝을 맺는다. 창작의 기본 방향을 사상 예술적으로 당과 인민의 요구에 맞물리는 확실한 전진 위에 두고서 앞으로 문학예술의 임무 완수를 위해 조선미술가동맹 대렬에 적극 참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훌륭한 일’군”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만 자족하지” 말고 “철두철미 현실에서 살며 근로자들”과 하는 “창조하는 미술가”가 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을 당부했다.
전체적으로 유다른 작품 선별 잣대를 보여 주거나 특출한 개별 작품, 작가 예시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조선미술가동맹 맹원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술써클원의 작품을 심사하는 중견 작가로서 성실한 심사와 신중한 접근이 이루어졌음을 널리 알려 주려는 뜻이 담긴 심사평이다. 발상과 기법, 그리고 속살에서 어느 하나 사회주의 현실주의 예술의 창작 방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바탕 위에서 칭찬과 우려, 당부를 알맞게 섞은 안정되고 모범적인 심사평을 마련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사평을 빌려 북한 미술사회에서 월북미술가 기웅 자신이 서 있었던 지도적 위치를 새삼 확인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 기웅의 문필은 조선미술 1959년 3월에 실린, 쏘련미술전람회 전시 작품 가운데 대표 격인 우가로브의 유화를 보고 쓴 「우가로브작 「탄광에서」를 보고」다. 해당 호에는 이 글 말고도 기웅이 그린 「조선인민군추모탑 제막식에서」라는 스케치도 실렸다. 거기다 표지그림을 기웅이 그린 「용해공」으로 삼았다. 기웅으로서는 조선미술로 대표되는 북한 미술사회에서 한껏 자신의 역량과 위상을 알리는 자리였던 셈이다. 「우가로브작 「탄광에서」를 보고」는 11명으로 짜인 북한 미술가들이 “3월 29일부터 4월 2일까지” “모쓰크바, 레닌그라드에 체류”하면서 “쏘련을 견학”하고 돌아온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 기웅은 거기서 본 개별 작품평을 조선미술에 올렸던 것이다.
아 아 이와노브는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선구적인 현실주의 화가였다. 그이 서거 백 돌을 맞아 1958년 7월 조선미술가동맹이 「아 아 이와노브 서거 100주년 기념의 밤」을 마련한 것만 보아도 북한 미술에서 그를 향했던 존경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행사에서 평론가 김창석이 이와노브의 한누리와 창작 활동에 관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1958년 9호 조선미술에는 한돌이 쓴 「아 아 이와노브의 생애와 그의 창작 활동-그의 서거 100주년에 제하여」가 실렸다. 김창석의 필명이 한돌임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한돌은 ‘100돌기념의밤’ 보고에서 이와노브는 보수파들의 냉대와 짜르 정권의 학대 속에서도 굴함없이 사람의 행복과 기쁨 위에 미술을 창조한 로씨야 사실주의 화가의 선구자의 한 사람임을 강조했다. 그이는 오늘 북한 미술가들은 이와노브의 작품을 빌려 시대 정신과 자연 묘사, 굴할 줄 모르는 새 것의 탐색, 예술적 노력의 모범 들을 배워야 한다고 보고를 마쳤다. 우가로브의 「탄광에서」를 보고 쓴 기웅의 감상평 주요 자리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①우가로브 작 「탄광에서」는 10월 혁명 전 로씨야 로동 계급의 영웅적 투쟁을 통하여 로동 운동에서 논 로씨야 프로레타리아트의 정신적 풍모를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다. 1912년 씨비리 렌 탄광에서는 인간 이하의 헐벗은 생활과 힘에 겨운 로동에 시달린 탄부들이 힘을 합하여 원쑤 짜리와의 투쟁에 일떠섰으며 폭동에로 넘어갔다.
②화면에는 어두침침한 탄광 마을이 멀리 석탄 가루와 모연에 싸여 보이고 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자리 헌병과 날카롭게 대치한 탄부들의 눈초리는 타협할 줄 모르는 영웅들의 서사시적 군상을 펼쳐 놓고 있다. -(줄임)-
이와 같이 작자는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로씨야 혁명의 력사적 환경과 사건들의 진실성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줄임)- 짜비리의 탄광 로동자들의 회상에서 1910년대 로씨야 프로레타리아트의 일반적 풍모를 보여준다는 이 사실은 민족적 특성의 형상을 통하여 어떻게 일반적 진리를 반영하여 주는가 하는 문제를 시사하여 준다.
③-1 이 그림에서 우가로브는 인물 형상에서 제기되는 전형화에 대한 문제를 아주 풍요하게 그리고 날카롭고 대담하게 박력 있는 필치로 해답하여 준다. 그것은 우선 구도 그 자체에서 볼 수 있다. -(줄임)-
구도의 중심은 파업 로동자들의 완강한 투지를 보여 주려는데 목적을 두었고 그들의 참담한 생활을 반영할 수 있는 모든 구도상의 조건과 인물 형상에서의 설계를 면밀하게 작성한 토대 우에서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에스끼스와 에쮸드를 통해서 이 작품이 그려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준다.
③-2 매개 인물의 형상에서 우가로브는 지나칠 정도로 세부를 생략하면서 그러나 인물 형상을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발톱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묘사하는 날카로운 신경을 쓰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줄임)-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가로브 작 「탄광에서」는 우선 주제 내용이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과 그것을 위하여서는 모든 회화적 가능성을 남김없이 이용함으로써 화가 자신이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빠포스를 설명이나 주석으로써가 아니라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작품의 사회주의 레알리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조형 예술적 가능성을 무제한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만 다양한 스킬과 개성의 발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④금번 쏘련 미술 전람회 작품에서 우리는 매개 작가들의 개성이 얼마나 다양하게 발양되고 있는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우가로브에 있어서 나는 더욱 그것을 뚜렷이 느끼게 된다. -(줄임)- 주제의 명확성, 조형 예술적 처리에서의 호탕하고 대담한 수법들은 우리들에게 쏘베트 조형 예술의 탁월한 풍모에 경탄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게 된다.
-「우가로브의 「탄광에서」를 보고」 가운데서
기웅의 감상평은 네 토막으로 짜였다. ①「작품」에 관한 총괄, ②작품의 외적 맥락과 값어치, ③작품 따져 읽기, ④쏘련미술전람회의 뜻이 그것이다. 먼저 ①에서 기웅은 우가로브의 「탄광에서」는 “10월 혁명 전” “1912년 씨비리 탄광”에서 일어난 “로씨야 로동 계급의 영웅적 투쟁을 통하여 로동 운동에서 논 로씨야 프로레타리아트의 정신적 풍모를 훌륭하게 보여” 준 작품이라 총괄 풀이로 머리말을 삼았다.
이어서 ②에서는 작품의 외적 맥락과 값어치에 눈길을 두었다. 곧 모든 ‘화면’에 걸쳐 “탄부들의 생활에서 장성되어 가는 로씨야 프로레타리아트의 혁명 정신을 전형화”하여 “그들의 용감성과 견인성은 화폭 전체와 디테일에서 력력히 표현”했다는 점과 아울러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로씨야 혁명의 력사적 환경과 사건들의 진실성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리하여 보는이들은 “직감적으로 10월 혁명 당시의 로씨야 프로레타리아트의 일반적 형상을 화폭에서” 봄과 아울러 “탄광에서 일어난 특수한 사건을 통하여 씨비리 탄광 로동자들의 계급 투쟁의 첨예화”와 “자기 계급의 리익을 수호하기” 위한 “성격 형상”을 뚜렷이 보게 된다. 곧 “씨비리의 탄광 로동자들”의 회상을 빌려 “1910년대 로씨야 프로레타리아트의 일반적 풍모를” 그려 담았다. “민족적 특성의 형상을 통하여” “일반적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 셈이다.
③에서는 작품 세부로 들어서서 화폭을 읽는다. 무엇보다 “인물 형상에서” ‘전형화’를 “아주 풍요하게 그리고 날카롭고 대담하게 박력 있는 필치로” 성공했음을 짚었다. 첫째, “구도 그 자체”, 곧 “구도의 중심은 파업 로동자들의 완강한 투지를 보여 주려는데 목적을 두었고 그들의 참담한 생활을 반영할 수 있는 모든 구도상의 조건과 인물 형상에서의 설계를 면밀하게 작성한 토대 우”에 잘 그려 담은 점이다. 둘째, “매개 인물의 형상에서”도 전형적인 특성을 잘 살려냈다. 우가로브는 지나칠 정도로 세부를 생략하면서 그러나 인물 형상을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시키기 위해서 “치밀하게 묘사하는 날카로운 신경”을 썼다 찬탄했다. 셋째, “주인공의 처의 형상에서도” 세밀한 ‘묘사’와 ‘대담한’ 세부 생략을 빌려 “생동하는 묘사를” 얻었다. “화가 자신이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빠포스를 설명이나 주석으로써가 아니라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강력히 호소”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레알리즘은” “모든 조형 예술적 가능성을 무제한하게 구사”하면서 “다양한 스킬과 개성”을 ‘발양’시킬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잘 보여 준다고 기웅은 평가한다.
끝머리는 ④“금번 쏘련미술전람회”의 의의를 담은 자리다. 기웅은 개별 작가의 다양하고 우수한 작품과 개성은 대가급뿐 아니라 30대 전후 미술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썼다. 그를 빌려 “민족적인 특성을 형상화”하면서 “자기 개성을 살리는 데”서 북한 미술가에게 주는 일깨움이 큰 행사였다. 그리하여 “주제의 명확성, 조형 예술적 처리에서의 호탕하고 대담한 수법”은 “쏘베트 조형 예술의 탁월한 풍모에 경탄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와노브 작품 「탄광에서」에 대한 기웅의 감상평은 쏘련미술전람회 출품 작품 전반에 걸친 소회에서부터 「탄광에서」에 관한 작품 외적 맥락과 작품 형상의 세부 특성, 곧 구도와 핵심 인물 표현에 드러나는 뛰어난 전형화 솜씨, 거기다 배울 점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한 눈길은 고스란히 기웅의 미술적 역량과 화필 기교를 다한 자신의 창작 작법 제시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술이라는 원칙과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단단함이 옹근 예술론이다.
이 글을 비롯해 기웅의 문필 3편은 1957년부터 1958년 사이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미 조선의용군 출신 장진광의 제거로 대표되는 미술사회 숙정뿐 아니라 문학예술계 전반에 불어 닥쳤던 종파주의자 처단의 격동이 휘몰아치고 있었던 무렵이다. 기웅은 주어진 발언 기회를 빌려 북한 사회주의의 발전 도상에 놓인 자신의 위치와 몫을 뚜렷하게 내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론 비평이 아니라 현장 비평으로 한결같은 기웅의 문필 3편은 1950년대 후반 미술사회 안쪽에서 누렸던 기웅의 높은 위상뿐 아니라, 작가적 정체성을 엿보게 하는 주요 지표로 삼을 만한 터무니다.
4. 기웅을 불러 앉히며
조선미술은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열한 해에 걸쳐 나온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다. 북한 초기 미술 이해를 위한 필수 매체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특정 작가나 미술 동향에 관한 부분 의제를 중심으로 드물게 활용되었다. 게다가 기존 논의는 조선미술 간행본을 1차 사료로 모두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 글은 그와 달리 조선미술 모두를 범위로 삼아,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에 관한 실증적 구명이라는 목표 아래 다가서는 첫 논의다. 모두 아홉 사람에 이르는 역내 월북미술가 가운데 먼저 유화가 기웅을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미술에 담긴 기웅의 미술사회 활동을 작품 바깥쪽 움직임, 작품 발표의 실재, 작가와 작품에 관한 평가, 손수 쓴 문필 활동의 순서로 나누어 실증하고자 했다. 논의를 줄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월북미술가 기웅(1912-1977)은 근대 초기 여성 신교육자며 첫 사회주의 여성 조직 활동가였던 김해 출신 어머니 우봉운과, 같은 교육자으로 일하다 스님으로 살았던 아버지 기태진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웅은 연변 땅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울 배재고보를 1931년에 졸업했다. 이어 동경미술학교에 진학했다 그만둔 뒤 카프 미술 활동을 벌였다. 을유광복을 맞아 좌익 미술 활동으로 1949년 무렵 투옥되었다. 경인년전쟁 때 풀려난 기웅은 인민군 치하에서 복무하다 쫓겨 가는 군대를 따라 월북했다. 월북 뒤 기웅은 평양에 살면서 1960년대 초반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발하게 일했다. 이 글에서는 기웅의 삶의 궤적뿐 아니라 남아 있는 두 가지 논란거리를 밝혔다. 첫째, 기웅의 출생과 관련한 내력이다. 출생지가 경남 김해읍이라는 북한 쪽 기록은 어머니 우봉운의 가계를 자기 출신의 정통성으로 윤색한 데 따른 결과다. 둘째, 형제 관계다. 기웅은 형 기의백과 함께 기태진과 우봉운 사이 2남 가운데 동생으로 알려져 왔다. 기의벽과 기웅을 미술 재능을 지닌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본 셈이다. 그러나 기의벽은 기웅의 본명으로 둘은 같은 한 사람이다.
둘째, 조선미술 가운데 기웅의 작품 바깥쪽 활동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실증 기록은 아홉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카프 시기 회고 좌담회에서부터 전국미술전람회 출품 사실, 평양 바깥 지역 무대미술인을 위한 단기 강습 강사 노릇이나 평양시 복구 건설 현장 동원과 황해도 단기 현장 파견, 거기다 소련 예술문화 방문과 같은, 외유 혜택이 그것이다. 그들 기록을 빌려 기웅은 월북 뒤 평양시에서 안정적인 체제 편입에 성공했음을 암시받을 수 있었다. 각별히 그 점은 1956년 시작한 문학예술계의 이른바 종파주의자 제거 격랑과 현지 파견의 돌풍 속에서도 장기 파견을 피하고 황해제철소를 오가는 단기 파견으로 마무리하는 모습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 일도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용해공」이라는 성과물로 응답함으로써 당의 미술을 위한 열성을 더욱 각인시키는 계기로 돌려 세우는 역량을 보여 주었다. 1959년 3월 11명으로 이루어진 소련 예술문화 방문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웅이 외유 혜택을 입은 일은 그러한 입지에서 이루어진 자연스런 결과였다.
셋째, 조선미술을 빌려 이름만 알려져 왔던 기웅의 대표작뿐 아니라 새로운 작품의 실재를 확인하였다. 조선미술 안에 실린 기웅의 작품 사진은 모두 14차례 12편이다. 그들은 창간호에 실은 스켓취 낀그림들과 유화에서부터 기웅의 전쟁기 성공작 「상봉」(1952), 해주 황해제철소 현지 파견의 성과물인 표지화 「용해공」(1959)과 스켓취 「조선인민군 추모탑 제막식에서」(1959)를 거쳐 소련 국가미술전 방문 여정에서 얻은 사생첩의 스켓취로 이어진다. 거기다 김일성의 이른바 영광스러운 항왜 혁명 투쟁을 형상한 혁명적 작품이라 고평을 받은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1959)에다 김진항과 합작한 「간삼봉 전투」(1961)가 따른다. 작은 스켓취 소품에서부터 100호 크기에 이르는 이들은 조선미술 출판 현장 가까이에서 활동했던 기웅의 창작 역량을 잘 보여 준다. 북한 쪽 기웅에 관한 기술에서 언급한 대표 작품을 모두 조선미술 안에서 살필 수 있었다. 이들 12편 가운데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작품이다. 아울러 그림을 볼 수 없지만 제목이 확인되는 「우후 금강」까지 더한다. 따라서 조선미술을 빌려 실재를 확인한 기웅의 재북 시기 작품은 모두 13편인 셈이다.
넷째, 기웅의 작품이나 작가 됨을 두고 조선미술」 안에서 이루어진 평가 담론은 1957년 부터 1960년까지 네 해에 걸쳐 일곱 차례 보인다. 그들은 두 쪽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지나간 전쟁기 미술의 전통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되풀이해서 보이는, 작품 「상봉」의 우수성과 전쟁기 대표성 인식이다. 전쟁기 미술동맹의 많은 맹원들이 전투원으로 또는 후방에서 종군을 했다. 그러한 성과는 1952년 7월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전람회를 빌려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서 선뵌 기웅의 유화 「상봉-1951년 5월 19일 현리 전투에서」는 국제주의 친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이른바 조중친선을 잘 표현한 대표 작품으로서 거듭 평자들의 상찬을 받았다. 다음으로 당대 북한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술이 요구했던 두 당면 과제, 곧 이른바 김일성의 항왜 혁명 전통과 천리마 시대의 전형성 획득을 향한 기웅의 열성적인 노력에 대한 평가다. 다만 이 경우 상봉과 달리 미진한 부분에 관한 아쉬움도 함께 다루어졌다. 기웅이 그 무렵 위세 중앙인 평양 미술사회 안에서 일정하게 기세를 떨친 것은 뛰어난 창작 역량뿐 아니라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향한 헌신이 상승적으로 이루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다섯째, 기웅은 조선미술을 빌려 자신의 미술론이라 할 수 있을 평문을 세 편 내놓았다. 김일성의 이른바 항왜 혁명 전통 전적지를 돌아보고 와 연 최연해의 소묘 개인전 관람평과 전국미술써클전람회 심사평, 그리고 쏘련미술전람회를 보고 돌아와 쓴 작품평이 그것이다. 소품전 관람평은 개인전이 지닌 높은 뜻과 작품의 우수성에 대한 적극적인 상찬이면서 김일성의 이른바 혁명 전통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이중 효과를 갖는다. 전국써클미술전람회 심사평은 기웅이 조선화와 양화, 그리고 크라휘크 부문에 걸쳐 발상과 기법, 속살에서 어느 것 하나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학의 창작 방향을 벗어나지 않은 월북미술가 기웅의 지도적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쏘련미술전람회에서 본 우가로브의 「탄광에서」 작품평은 열한 사람으로 짜인 미술가 방문단이 1959년 3월 말부터 2주간에 걸쳐 돌아본 소련 조형예술과 문화 견학의 대표 결과물이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술의 원칙과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기웅의 입장을 잘 되비추어 준다. 기웅의 세 평문은 1950년대 후반 미술사회 안쪽에서 누렸던 기웅의 높은 위상뿐 아니라, 작가적 정체성을 엿보게 하는 주요 지표인 셈이다.
조선미술로 볼 때, 기웅은 월북 뒤 1961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1961년 12월 「1939년 장백현 소덕수에서 진행된 5·1절 경축 대회」 재수록을 끝으로 조선미술에서 자취를 살필 수 없다. 다른 매체에서도 1962년까지 활동만 드러난다. 기웅은 카프계 문학예술인의 제거가 마무리된 1963년부터 평양 미술사회 중앙으로부터 밀려난 것이다. 그로부터 1977년 임종까지 그이 동향은 알려진 바가 없다. 쉰두 살부터 예순여섯에 이르는 열네 해, 작가로서 원숙기라 할 수 있을 시기다. 그런 세월을 묻혀 살다간 셈이다. 그럼에도 월북 초기 전쟁기 작품 「상봉」을 비롯해 「간삼봉 전투」와 같은 작품이 주요 기념 현양 시설에 전시되어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아 완전한 제거 상황은 겪지 않았음을 알겠다. 그로부터 스물두 해 남짓 더 흘러 북한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에서 기웅은 한 자리를 차지하며 새로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날 김일성 체제의 이른바 혁명적 정통성과 영웅적 영도라는, 당성과 인민성에 발맞추어 내놓았던 작품의 우수성 탓이었을 것이다. 근대 초기 여성 항쟁가인 우봉운의 외아들로서 북한 초기 사회주의 미술 발전에 이바지가 남달랐던 기웅이었기에 얻게 된 마땅한 보상인 셈이다.
앞으로 기웅을 두고 밝혀야 할 일은 적지 않다. 어머니 우봉운의 김해 집안 관련 연고 구명이 가장 바쁘다. 우봉운은 근대 초기 나라 안팎에서 기독교계와 불교계를 넘나들면서 애국계몽과 광복 항쟁 앞자리에 섰던 지사였다. 연구와 현양이 따라야 할 사람이다. 아울러 월북미술가 연구를 더욱 본격화하면서 월북 이전과 월북 이후 조선미술 바깥에 묻혀 있는 기웅의 활동, 그리고 1963년부터 임종까지 묻힌 기웅의 삶에 관련한 실증 사료를 찾아 재구성할 일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 속에서 기웅이 지니는 개별성과 북한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더 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가능성을 겨냥하면서 기웅을 공개적으로 불러낸 첫 담론이다. 이 글을 디딤돌 삼아 조선미술에 담긴 나머지 경남·부산 지역 월북미술가 여덟 사람에 관한 구명도 이어질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글쓴이가 뜻한, 조선미술에 관한 실증적 접근과 월북미술가 구명이라는 목표에 걸맞은 새롭고도 뜻있는 성과를 보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1. 1차문헌
삼천리·「동아일보·경향신문·신세대·조선미술·미술·조선예술·문학예술·문학신문·조선문학
권업신문 대한인졍교보 청구신보 한인신보(제2권),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5,
배재고보동창회명부(1941년), 배재동창회, 1941.
김영삼 엮음, 정신75년사, 계문출판사, 1962.
박세영, 밀림의 력사,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2.
송 영, 백두산은 어데서나 보인다, 민주청년사, 1956.
2. 2차문헌
김복기, 「북녘화가 100인 그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아트 인 컬츄어 7월호, art 8월호, 도서출판 에이앤에이(주), 2000, 150- 159쪽.
김복기, 「북녘화가 170인, 그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art 8월호, 도서출판 에이앤에이(주), 2000, 68-71쪽.
박계리, 「미술에서의 ‘민족’ 개념의 분단사」, 한(조선)반도 개의 분단사: 문학예술편 2, 사회평론아카데미, 2018, 233-322쪽.
백지홍, 「미술을 담은 북한의 잡지들」, 미술세계 8월호, 미술세계, 2018, 72-73쪽.
신수경, 「월북미술가의 연구 현황과 과제」, 미술사와 문화유산 2집,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2013, 7-39쪽.
양현미, 「북한미술 연구의 현황과 과제」, 논문집 제3집, 한국예술종합학교, 2000, 90-106쪽.
오병희, 「월북미술가의 북한에서 작품 및 활동 연구-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따른 작품의 주제별 연구를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제19집 제4권, 한국기초조형학회, 2018, 269-283쪽.
윤진섭, 「북한미술의 사적 전개별 작품성 연구」, 동아대학교 석사 논문, 1997.
이구열, 북한미술 50년, 돌베개, 2001,
이기영, 북한미술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석사 논문, 1994.
인산강행, 「60년대 이후 북한 미술의 변화와 월북 화가들의 위상」(월북 화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3-60년대 이후 북한 미술의 변화와 월북화가들의 위상), 월간미술, 월간미술사, 1992.
홍지석, 「1960년대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북한 귀국 양상과 의미」, 통일인문학 제58집,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4, 279- 306쪽.
홍지석, 「북한미술연구사 1979-2010」, 현대북한연구 13권 1호, 북한대학원대학교, 2011, 7-39쪽.
홍지석, 「서정성과 민족형식: 1950년대 후반 북한미술담론의 양상 - 조선미술의 풍경화 담론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 43호, 한민족문화학회, 2013, 369-397쪽.
홍지석, 북으로 간 미술사가와 미술비평가들, 경진출판사, 2018.
홍지석·홍성후, 「미술, 조선미술의 권호와 목차」, 근대서지 제24호, 근대서지학회, 2021, 414-549쪽.
홍성우, 「미술 및 조선미술 해제」, 근대서지 제24호, 근대서지학회, 2021, 397-413쪽.
분단의 미술사 잊혀진 미술가들,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복원-북으로 간 미술가들 저작 목록, 국립문화재연구소, 2020.
김남수, 「우봉운과 그의 가족-우봉운」, 보랏빛 불교 (http://blog.daum.net/savatthi/62).
김남수,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과 활동-우봉운」, 보랏빛 불교」(http://blog.daum.net/savatthi/62).
김복기, 「‘분단’의 미술사에서 ‘통일’의 미술사로-월북미술가 재조명과 연구 과제」, , http://blog.naver.com/PostView.nhn? blogId=boggi04&logNo=221736842959
신영숙. 「여성운동가 우봉운(禹鳳雲)」, 「문화재 사랑」 (http://blog.daum.net/blue_lj/6373056).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