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그대가 불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브루노, 그대가 불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조송현 승인 2017.02.19 00:00 | 최종 수정 2018.08.16 11:44 의견 0
이탈리아 '캄포 데 피리오'(꽃의 정원) 광장에 세워져 있는 브루노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캄포 데 피리오'(꽃의 정원) 광장에 세워져 있는 브루노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지동설’(태양 중심설 혹은 지동설)은 금방 환영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선 당시 과학적 상식에, 비록 오늘날 관점에서 진리는 아니었지만,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 상식에도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학문의 꽃은 기독교 신학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에 편입된 것이 13세기의 일입니다. 그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신학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견해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만물의 질서에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결국 그것은 종교적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중심인 지구를 포함한 달 아래 세계(지상계)는 불완전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완전하니까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변화를 겪는 게 당연합니다. 달부터 태양 행성 별 등 천상계는 완전하다고 여겼습니다. 완전하면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것은 영원불멸하죠. 그러니까 고귀한 세계이죠.

코페르니쿠스 태양 중심 지동설,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학의 교의에 반기 

천상계 천체의 움직임이 ‘원 운동’이라고 생각한 까닭은 원 모양이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천체는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의 운동을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었죠. 반면 지구는 천상계 아래의 지상계에 있기 때문에 행성이나 별과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원 운동도 물론 할 수 없었지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기본 전제이자 당시 기독교 신학을 믿는 세상의 상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나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학의 교의에 대한 반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천한 지상계, 고귀한 천상계’라는 뿌리 깊은 관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과 추동력 이론도 부정했습니다. 천사들이 자신의 직급에 맞는 천구를 운행케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디오니시우스 가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전과 등속원운동은 지구와 행성 같은 완전한 구형 천체의 자발적·자연적 성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코페르니쿠스의 제자 레티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항성 천구를 한계로 인정하는 나의 스승의 가설에서는, 개개의 행성 천구는 자연에 의해 주어진 운동을 한결같이 계속하며, 상위 천구의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일 없이 그 주기를 완료한다. 그뿐만 아니라, 큰 천구는 느리게 움직이고 운동과 빛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태양에 가까운 행성은 마땅히 빨리 움직인다.”

태양 중심 지동설(태양 중심설)은 신비사상인 신플라톤주의(태양 숭배)의 영향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전혀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에 천구에 운행력을 준 제1추동자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었으며, 우주 중심의 태양이 하늘의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서 태양이 지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가장 아름다운 신전 속에서 전체를 한꺼번에 비춰주는 이 밝은 빛을, 이보다 더 좋은 다른 장소에 그 누가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왕좌에 앉아 있는 태양은 주변에 있는 별들을 가족처럼 거느리고 있다. 지구는 태양에 의해 잉태되고, 그에 의해 해마다 열매 맺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감탄할 만한 우주의 조화와 다른 방법으로는 찾아볼 수 없는 운동속도와 공전궤도의 반지름 사이의 조화 관계를 우리들은 이 태양계(태양 중심의 행성운행 체계) 외에서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같은 새로운 우주관(우주의 중심은 태양)을 밀고 나간 데는 천문학적인 이유보다 사상적인 이유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의 새로운 우주 체계 즉 태양 중심 지동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신비사상인데 특징은 태양 숭배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 신플라톤학파 도미니크 교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태양 숭배 사상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코페르니쿠스는 이전의 우주관을 완전히 불식하고 새로운 체계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근대 과학자라기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태양 중심 지동설은 고대의 자연관을 모태로 하고 중세의 신비사상을 뒤집어쓴 채 태어난 것입니다. 이성의 시대를 활짝 연 과학혁명과 우주관 혁명이 신비사상에 심취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촉발됐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양 중심설은 독일의 종교개혁 지도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태양 중심설에서는 태양이 중심 역할을 맡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태양 숭배라는 이교적인 행위로 비쳤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태양 중심설이 성서의 내용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또 그들에게 태양은 오히려 신의 영광과 권능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종교개혁이 시작(1517년)되기 이전, 즉 실제보다 50년만 일찍 태양 중심설을 발표(1543년)했더라면 더 많은 동조자를 얻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과학사 학자들도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약 50년이 지난 후 그의 이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들이 나왔고, 이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은 더욱 위험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헤르메스주의(이집트 종교)자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를 위험에 빠뜨리다

여기서는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 ~ 1600)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브루노는 헤르메스주의자였습니다. 15, 16세기 당시 태양은 이집트인들의 신이었고, 이집트의 신 토트(학문의 신)는 ‘위대한 헤르메스’로 불렸습니다. 브루노가 옛 이집트 종교가 참된 신앙이며, 가톨릭교회는 예전의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교회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 당연합니다.

브루노는 태양 중심설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우주가 무수한 별들로 가득 차 있다는 토머스 딕스의 사상을 지지했고, 우주 어딘가에 지구인과 같은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인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 성스러운 의식과 종교 제도가 브루노에 의해 타격을 받았습니다. 브루노의 이 같은 사상은 당시 교회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교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탓에 그와 관련된 모든 사상들이 한통속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당초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호의적이었으나 브루노가 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브루노는 요주의 인물로 추방당해 유럽을 떠돌아다니다가 1591년 베네치아에서 체포되어 오랜 수감생활 끝에 유죄판결을 받아 화형을 당했습니다.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지지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화형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다만의 그의 종교와 태양 중심설이 매우 연관이 깊어 교회나 일반인에게 그렇게 알려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입니다.

만약 브루노 사건이 없었다면 코페르니쿠스주의는 당국의 강력한 반감을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갈릴레이도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서구 과학혁명의 진원지는 이탈리아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가톨릭교회는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목록에 포함시켰습니다. 해금된 것은 219년 후인 1835년입니다. 만약 브루노 사건이 없었다면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교회와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갈릴레이도 반이성적인 종교재판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오늘날 복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브루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브로노가 화형당한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에는 현재 브루노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A BRUNO

Il Secolo Da Lui Divinato Qui

Dove il Rogo Arse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이 동상은 1899년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 『인형의 집』의 작가 헨릭 입센,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 등이 세웠습니다. 종교의 순교자가 아닌 ‘자유로운 사고’의 순교자 브루노를 기념하자는 취지에서였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교황 레오 13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금식기도를 올리며 무언의 저항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는 브루노를 복권하지 않았으나 그는 사상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로 부활한 것입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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