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시내 한 호프집에서 퇴근하는 시민들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였다. 이게 뉴스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 나라마다 다르다. 지난 7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 인근 한 호프집에서 퇴근길 시민들과 만나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이에 대해 한국의 거의 모든 미디어는 칭찬이든 비판이든 간에 뉴스거리로 삼았다.
노르웨이 대학생들은 ‘대통령과 시민과의 호프집 대화’가 뉴스거리가 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인 박노자에 따르면¹⁾, 노르웨이 대학생들은 ‘대통령과 시민’이라는 어법부터 이해를 못한다고 한다. 대통령도 결국 일개 시민이 아닌가.
그리고 대통령이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을 만나서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게 왜 뉴스거리가 되느냐며 제일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총리나 장관 등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거나, 어느 지역 내지 현장을 방문하여 주민들과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뉴스도 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네덜란드 사회학자 기어트 홉스테드Geert Hofstede가 만든 ‘권력간격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라는 게 있다. 권력간격지수란 특정 문화가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나타낸다. 이 지수를 측정하기 위해 “직원들이 관리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존중 받고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가?”, “권력층이 특권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추가적으로 한다.
홉스테드는 『문화의 결과(Culture's Consequence)』에서 권력간격지수가 낮은 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권력은 그것을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은밀하게 행사해야 할 그 무엇이다. 나는 스웨덴(PDI가 낮은 나라)의 한 대학교 교직원이 권력을 행사하려면 권력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도자가 격식을 차리는 모습보다 그 반대의 모습을 더 노출시키고자 한다. 오스트리아(PDI가 낮은 나라)의 수상 브루노 크레이스키는 종종 전차를 타고 출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는 1974년에 네덜란드(PDI가 낮은 나라) 수상 욥 덴 윌이 포르투갈에서 캠핑카를 타고 캠핑장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권력자들의 이런 모습은 PDI가 높은 벨기에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어렵다.”²⁾
코리아 헤랄드의 박상식에 따르면³⁾, 한국 문화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권위주의적이다. 일부는 유교가 한국의 권위주의 문화를 창조하고 영속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같은 유교문화권인 타이완과 일본은 훨씬 덜 권위주의적이다. 타이완 각료들은 서로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한국의 권위주의 문화는 유교 탓이라기보다는 자생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이긴 하지만, 과거의 결정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평등의식이 철저한 덴마크에서는 왕족이나 내각 각료가 당연한 듯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그 덴마크에서도 18세기 후반까지는 귀족은 자신의 농노에게 체벌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덴마크뿐 아니라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모든 북유럽 국가는 불평등이 당연시됐던 봉건제라는 역사적 유산을 안고 있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청산의 실패를 단순히 ‘과거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한국의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검찰, 법원, 주요 방송국 등)까지 포함하면 1만개 이상이 된다. 대통령은 가히 온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권위주의 청산을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일부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일반 국민들의 권위주의적(비민주적) 사고의 청산이다.
한국은 비록 독재의 사슬은 끊었지만, 아직 권위주의 국가에 머물고 있다. 민주주의가 너무 취약해 권위주의를 뿌리 뽑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지자체장이든 간에, 이 권력자들도 시민들이 뽑은 일개 대표자 혹은 일꾼에 불과하다. 개개인들과 ‘직분’이 다를 뿐, 일개 시민이란 똑같은 ‘신분’인 것이다.
현재 국회의원은 300명이다. 1948년 제헌의회 의원은 200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2천만 명이었다. 지금 인구는 5천만 명이다. 정치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350~450명이 적정한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 수를 그냥 늘려서는 안 된다. 유권자의 뜻이 정확히 반영될 수 있는 구조로 선거제도를 바꾸면서 늘려야 한다.
최근 새로운 선거제도 모델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주목받는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회의 다양하고 다원적인 이익, 요구, 가치, 의사 등이 잘 드러나고 반영되어야 하며 그 역할을 하는 곳이 정당이다. 그러한 정당의 기능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제대로 된 선거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선거제도는 ‘1인 2표’라는 점에서 외형적으로는 우리의 선거방식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모든 시민의 투표가 동일한 값을 가지며 지역구라는 단일한 차원에서 계산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지역적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적 이익과 사회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대표한다. 먼저 전체 의석수를 결정하는 정당투표를 통해 정당 간의 서로 다른 특성, 즉 상이한 사회경제적 이익을 대표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소선거구제처럼 지역구에서 경쟁한다. 비례대표의 정당 명부를 주(州) 단위로 작성하여 지역 대표성을 담보한다. 우리와 달리 지역구 투표보다 정당 투표가 훨씬 중요할 수밖에 없고 이런 방식으로 지역적 특성과 사회경제적 특성을 동시에 반영하여 원활한 민주주의를 뒷받침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비례성을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해야 한다는 의미의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정희 정의당 대표 등도 국회 예산 및 세비 동결을 전제로 국회의원 정수 증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국회의원 증원은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훨씬 높다. 이는 국회와 국회의원에 대한 반감이 배경에 깔려 있다. 국회와 국회의원이 제 몫을 하지 못하면서 특권은 넘쳐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내 주머니의 돈(세금)으로 제 역할 못하는 의원들 배 불릴 필요는 없다'는 게 다수 '여론'이다.
만약,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 제대로 된 선거제도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이었다고 해도 이런 여론이 팽배할까. 국회의원이 진정한 민의의 대변자이고 주민의 일꾼 역할을 충실히 한다면?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라면 지금보다 좀 늘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선거제도를 만들어 진정한 주민의 일꾼을 좀 더 늘리자는데 잘 안 된다. 왜 일까?
그 이유를 ‘정치 기득권 세력’과 ‘경제 기득권 세력’의 담합 때문이라는 성한용의 분석⁴⁾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정치 기득권 세력은 현직 국회의원과 관료 집단이다. 경제 기득권 세력은 재벌 대기업 ‘오너’들과 거대 언론사 사주들이다. 현직 의원, 관료, 언론사 사주를 포함한 재벌 오너들이 선거법 개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뻔하다. 자신들의 누리는 기존 이익을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정치 기득권 세력과 경제 기득권 세력)은 반정치주의를 부추기며 '여론'을 내세운다. 반정치주의란 정치를 경멸하고 조롱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이 정치에 기대를 걸지 못하게 하거나 냉소주의를 강화시키는 태도나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치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사람은 그런 정치의 주체 중 하나인 국회의원을 없애고 싶은 감정이 앞선다. 늘리자는 주장은 미친 소리로 들릴 게 뻔하다. 이런 게 모이면 '여론'이다. 그러나 정치·경제 기득권 세력을 경멸하는 그 '여론'은 정작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풀려진다는 사실은 우리 시민들이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국회의원을 욕하면서도 특권층이라는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늘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것이다. 국회의원의 계급을 일반시민으로 낮춰 부려먹을 일꾼을 늘리자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홉스테드에 따르면 한국은 벨기에나 프랑스보다 PDI가 훨씬 높아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한국의 정치문화가 민주적이라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이라는 방증이다.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탓에 국민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을 선출하고도, 그들을 여전히 왕조시대의 왕이나 상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권력간격지수가 엄청 큰 것이다.
국회의원이 특권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숫자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줄여야 할 것이다. 반면 시민들의 일개 대표자 혹은 일꾼이라면 필요에 따라 더 늘려도 상관없을 것이다.
결국 국회의원 증원이 포함된 선거제도 개정은 우리 시민이 권위주의 문화에 갇혀 있느냐 아니면 거기서 탈피하느냐와 직결된 문제이다.
※1)박노자, 「‘높으신 분’ 없는 세상을 위하여!」, 『한겨레신문』, 2018년 8월 15일. 2)말콤 글래드웰/노정태 옮김, 『아웃라이어』(김영사, 2009), 236~237쪽. 3)PARK SANG-SEEK, 「Authoritarianism is No.1 illness in Korean society」, 『The Korea Herald』, 2018년 9월 3일. 4)성한용, 「국회의원 증원, 기득권 세력은 왜 반대하나」, 『한겨레신문』, 2018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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