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플라톤의 통찰을 논의의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어쩜 플라톤의 경구는 2천 몇 백 년이 지난 21세기에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미국은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이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무지와 상대의 전문지식이 동등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오해하면서, 이 시대의 주인인 대중이 ‘지적 평등’을 주장한다. 몇 걸음 퇴보는 있을지언정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 온 인류의 여정을 상기하면, 이건 아이러니다. 인류 전체의 진보가 ‘지금 여기’서 멈출지도 모른다.
언론을 “국민의 적”이라고 공격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의 약 350개 신문사들이 ‘사설 연대’로 맞선 데 이어, 미 상원도 만장일치로 경고장을 날렸다. “언론은 국민의 적이 아니라는 점을 단호히 확인한다”며 사설 연대를 뒷받침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첫 입맛은 쓰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모범국가랍시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타국에 수출, 혹은 강요까지 하는 나라에서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매도하고 있다. 누구의 잘못일까? 트럼프 대통령, 혹은 언론? 아니다. 미국 시민들이다.
반지성주의적인 트럼프 대통령은 경위야 어쨌건 지금 이 와중에서도 4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까닭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트럼프는 2016년 11월 8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62,979,879표를 얻었는데, 이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이다.
배는 저절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사공의 힘으로 움직인다. 미국이라는 거함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미국 시민이라는 사공에 의해 산으로도 갈 수 있다. 사공인 미국 시민들의 사고방식은 어떠할까? 그에 비해 우리는 또한 어떠한가? 이에 그 답의 한 가닥을 얻을 수 있는 논문을 1년여 전에 읽었다.
특검에서 김경수 경남도시자에게 청구한 구속 영장이 기각되었다. 애당초 특검을 구성할 사안이 아니었다는 게 건전한 상식인의 판단이다. 하지만 영장 기각에 대해 자유한국당 김성태 대표는 “망나니들의 핏빛 어린 칼날에 사법부의 정의도 한강물에 다 떠내려 보내더니”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다. 이런 정도의 시민이 제1야당의 원내대표라는 게 참 서글프다. 그러나 톰 니콜스의 글의 읽었기에 어떻게 ‘저런 인간’이 저 따위 망발을 농하는지, 그 근인根因을 파악할 수 있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독자제현과 이해를 나누기 위해 다섯 번에 걸쳐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이 전문지식에 대한 믿음을 잃은 이유 -그리고 그것이 왜 큰 문제인가¹⁾²⁾
2014년 러시아가 크리미아를 침공한 뒤에, <워싱턴포스트>는 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개입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에 대해 미국인들에게 물은 것이다.
미국인들은 겨우 6명 중에 1명만이 지도에서 우크라이나를 찾을 수 있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거리는 2,900km라고 답한 게 중앙값이었다(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간은 거리는 7,854km이다-옮긴이). 이렇게 지식이 부족해도 자신의 날카로운 견해를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사실, 응답자들은 자신의 무지와 정확히 비례하여 개입을 찬성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우크라이나가 라틴아메리카(중남미)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군사적 개입에 가장 열성적이었다.
2015년에 여론조사기관 ‘퍼브릭 폴리시 폴링Public Policy Polling’이 민주당과 공화당 대통령 예비경선에 참가한 투표자들에게 물었다. ‘아그라바Agrabah에 폭격하는 것을 지지합니까?’ 공화당원 응답자의 거의 1/3은 폭격에 찬성했고, 13%가 반대했다. 민주당원 응답자는 이와 정반대였다. 36%가 반대했고, 19%가 찬성했다. 사실 아그라바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2년 디즈니 영화 알라딘Aladdin에 나오는 허구의 나라 이름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여론조사가 공화당의 공격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의 반사적인 평화주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가 안보에 관한 전문가들은 여론조사에 응답한 공화당원 43%와 민주당원 55%가 만화에 나오는 장소를 폭격하는 데 실제적이고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예외라기보다는 점점 더 표준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과학이나 정치나 지리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실제 사람들은 많이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된 문제이다. 오늘날 모른다는 것보다 더 우려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미국인들이, 적어도 일반적으로 인정된 공공정책에 관한 확립된 지식에 무지하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미덕이라고 간주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이 자율성(사악한 엘리트들로부터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는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것이고,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무너져 내리는 허약한 자아의 보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인이나 아는 체하는 사람에 대한 미국인의 전통적인 혐오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교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익숙하다. 원칙에 입각하여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논쟁은 민주주의의 지적 건강과 활력을 나타내는 신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논쟁은 하지 않고 화를 내며 소리치는 싸움만 하고 있어서 아주 걱정스럽다.
1980년대 워싱턴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내가 만나는 임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게 가르치려 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특히 내 전공인 군비통제와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말이다. 처음에 나는 놀랐지만, 이것은 이해할 할 수 있는 일이고 어느 정도까지는 바람직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공공생활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정책 전문가들도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전문가인) 일반인들은 세금, 예산, 이민, 환경, 그리고 이 외 많은 주제들에 관해 긴 의견 목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공공정책에 관한 일을 한다면, 그러한 상호작용은 그 일과 관계가 있고, 잘 이뤄지면 이런 상호작용에 의해 당신이 지적 정직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더 세월이 흐르자, 나는 의사, 변호사, 교사 그리고 많은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들은 이야기는 환자나 의뢰인 또는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들에게 제공하는 전문가의 충고가 왜 잘못 이끌고 심지어는 잘못되었는지 그 전문가들에게 말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문가가 신중하고 경험을 많이 한 충고를 제공한다는 생각은 그냥 묵살되었다.
전문가의 주장에 관해 자연스러운 회의론을 넘어, 전문지식의 이념 그 자체가 죽어간다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전문가와 일반인, 교사와 학생, 아는 자와 의심하는 자,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사람과 아무 업적이 없는 사람과의 구분이, 구글에서 연료를 공급받고 위키피디아에 기반하고 블로그로 법석 떨며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지식의 죽음이란 말이, 전문가의 능력이 실제로 죽었다거나,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를 일반인과 구분하는 특정한 일에 대한 지식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사와 변호사와 엔지니어, 그리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분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뼈가 부러졌거나 체포되었거나 다리를 놓을 필요가 있는 때는 그들에게 곧바로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자로서의 전문가에 대한 의존을 나타낸다. 곧, 원할 때 편리한 기성품으로 확립된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리의 상처를 꿰매 주시오. 그러나 내 다이어트에 관해서는 잔소리하지 마시오.”(미국인 2/3 이상이 과체중이다.) “이 세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그러나 유언장을 써둬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자녀 있는 미국인의 반 정도는 유언장을 써두지 않았다.) “국가를 안전하게 지켜주시오. 그러나 국가 안보 균형에 대해 상세한 설명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마시오.(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국방비와 가장 중요한 안보 정책에 관해 아는 게 없다.)
영양가 있는 올바른 식단에서부터 미국 이익을 향상시킬 행동에까지, 더 큰 논의를 위해서는 보통 시민과 전문가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점점 더 시민들은 이런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냥 논의에 참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취급되기를 바란다. 논의의 힘이나 자신들이 제출한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길 가다가 여기저기서 주워 모았을 법한 단편적인 정보에 근거한, 자신들의 편견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현대사회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모든 일에 전문가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전문화, 곧 분업화하기 때문에 번영한다. 그래서 이 전문화로 서로서로를 신뢰하게 하고, 개인의 전문지식으로부터 집단적 이익을 얻는 메커니즘과 관행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신뢰가 사라진다면, 결국 민주주의와 전문지식은 불가피하게 타락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적 지도자든 그들의 전문가 조언자든 무식한 유권자와 싸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전문지식은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지불하거나, 주어진 시점의 대중의 구미에 영합하는 도당들의 이익에 봉사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위험스럽게도 이미 다가 와 있다.
(곧 (2)편이 이어집니다.)
※1)Tom Nichols, 「How America Lost Faith in Expertise-And Why That's a Giant Problem」, 『FOREIGN AFFAIRS』, MARCH/APRIL.2017. 2)저자 톰 니콜스는 현재 미국 해군대학 교수이며 트럼프 대통령을 반대하는 대표적 논객이다.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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