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은 편집증자들의 일상이론이다. 편집증자들에게는 현실보다 음모집단에 대한 ‘망상’적 신념이 우선한다. 한 정신분석 임상의가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환자와 의사와의 대화를 예로 들어 보여준다.
의사 :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지요?
환자 : 그렇죠. 어떻게 죽은 사람이 피를 흘려요.
의사 : 그러면 우리 모두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오는지 확인해 봅시다.
환자 : 콜. 그럽시다.
바늘로 손가락을 찌른 두 사람은 당연히 피를 보았다. 그래서 의사는 의기양양하게 환자를 다그쳤다.
의사 : 자 보세요. 피가 나오지요.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환자 : 예. 선생님 제가 틀렸네요.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리네요.¹⁾
((2)편에 이어서) 전문지식의 죽음 ... 확정편향성·음모론으로 무장한 사람에게 전문지식은 무력하다
가장 능력이 적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는 민주주의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유능하고 아주 지적인 사람들도 복잡한 공공정책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에 부닥친다. 그들도 공공정책에 대해 전문적으로 정통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확증편향이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증해 주는 정보를 찾는 경향이다.
과학자와 연구자들은 전문직업인의 위험 요소인 이 확증편향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씨름한다. 그래서 발표하거나 출판하기 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확실한지 확인하려고 애쓰며, 자신들의 연구결과에 대해 개인적인 부탁 없이 자격을 갖춘 동료들의 현실 점검(reality check)을 통과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동료들의 심사 과정은 대개 일반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검토와 조정은 최종 결과물이 발표되기 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계 밖의 논쟁이나 토론에서는 보통 외부 검토나 책임감이 전혀 없다. 그 순간의 편리에 따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팩트(fact)가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논쟁은 결말이 날 수가 없고 지적 진보도 불가능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상식만 가지고는 실천적인 정책 대안을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한 전문가와 잘 모르는 일반인들 사이의 빈 공간은 종종 조잡한 단순화나 음모론으로 채워진다.
음모론은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지루하고 상세한 설명을 듣는 데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다. 음모론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놀라게 한 사건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한 방식이다. 왜 무고한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이치에 닿는 설명도 없이, 사람들은 그러한 일은 단지 무심한 우주나 이해할 수 없는 신 혹은 조물주의 무작위적인 잔인성으로 받아들일 것임에 틀림없다.
재난과 혼란에 직면한 개인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의미를 찾듯이, 모든 사회는 집단적으로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면 기이한 이론에 끌리게 될 것이다. 캐나다 작가 조나단 케이Jonathan Kay가 지적했듯이, 음모론과 경외감 깊은 추론은 대규모의 집단 충격을 받은 사회에 특히 유혹적이다. 이것이 세계1차대전, 러시아 혁명, 케네디 암살, 9/11 공격, 그리고 다른 주요한 재앙이 발생하고 난 후에 음모론의 인기가 치솟은 이유이다. 같은 이유로 지구화와 지속적인 테러로 인한 경제·사회적 혼란과 같은 현대의 불안정한 추세에 대응하여 음모론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악의 경우, 음모론은 무고한 사람이 다치게 되는 도덕의 공황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사소한 내용일지라도 음모론이 널리 퍼지면, 자유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합리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견 교환을 방해하게 된다. 왜 그런가? 정의定義상, 어떤 음모론도 허위임을 입증할 수가 없다(어떤 음모론에 대해 그 음모론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가 없다.). 곧, 음모론을 반박하는 전문가들은 그들 역시 음모론의 일부라는 사실의 증거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문제가 추가되면,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된다. 일반인이든 전문가든 모든 정치적 신념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확증편향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정치나 다른 주관적 문제에 대한 잘못된 신념을 떨쳐버리기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정치적 견해는 각 개인의 자아상(自我像.self-image)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념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면 우리의 마음이 완강히 저항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겪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편견을 의식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이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것을 논박하는 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서로서로 미친 듯이 논쟁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총질을 해대기도 한다. 예를 들면, 2015년 오하이오 주립대의 학자들은 특정한 뉴스 기사에 대한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반응을 조사했다. 양쪽 다 자신의 세계관을 논박하는 과학이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더욱 충격적이게도, 자신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학적 연구에 노출되었을 때,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반응은 자신의 견해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과학을 의심했다.
"멀리 있는 오만한 전문가보다 인터넷이 좋다"
전문지식의 죽음에 대해 전문가에게 질문하면, 전문가들은 아마 핏대를 세우며 인터넷의 영향에 대해 비난할 것이다. 예전에는 주어진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검색어를 웹브라우저에 연결해 수초 만에 답을 얻어낸다. 그러니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오만한 대머리 지식인들에게 의지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정보기술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는 박학다식하게 되는 분명한 지름길을 제공함으로써 전문가와 일반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디지털 시대는 무한히 제공되는 팩트가 전문지식이라는 환상에 빠지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지적 성취를 흉내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팩트는 지식이나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나오는 것이 항상 팩트도 아니다. 인터넷 사용을 설명하는 모든 금언적인 “법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공상과학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Theodore Sturgeon이 디지털 시대 이전에 꿰뚫어 본 통찰일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스터전 법칙’은 “그 어떤 것도 그것의 90%는 쓰레기다”라는 것이다.
오늘날 10억 개 이상의 웹 사이트가 있다. 좋은 소식은, 스터전의 냉소주의를 따른다 해도, 1억 개는 꽤 괜찮은 사이트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이트에는 세계의 명망 있는 출판물의 사이트; 대학교나 싱크 탱크, 연구기관, 그리고 비정부기구의 홈페이지; 그리고 수많은 다른 훌륭한 정보의 유익한 출처들이 포함된다. 나쁜 소식은, 유익한 사이트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쓸모없고 그릇된 길로 이끄는 쓰레기더미 속을 헤치며 항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쓰레기는 선의의 할머니에서부터 이슬람국가(또는 ISIS)의 선동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이 올린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인터넷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클릭 한 번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인터넷에 쌓여있는 수많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쓰레기더미는 전문가들에게 악몽이다. 수십 종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텔레비전 채널이 있을 때에도 정보를 어디에서 얻어야 할지 선택하기가 곤란했던 보통 사람들이, 이제는 온라인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사람들이 생산한 끝없는 웹페이지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인쇄출판에 대한 기본적인 역설逆說(paradox)의 최신 버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가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가 지적했듯이,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발명은 초기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이 갈기 시합”(round of teeth gnashing)을 일으켰다. 인쇄된 책과 신문의 출판은 종교적 권위를 훼손시킬 것이며, 학자나 저술가의 작품의 품위를 떨어뜨릴 것이며, 난동과 방탕을 부채질 할 것이라고 그들은 우려했다.
인터넷은 광섬유 속도의 인쇄출판이다. 인터넷의 편리함은 엄청난 혜택이다. 그러나 이 혜택은 이미 연구 훈련을 받은 사람들과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불행하게도 인터넷은 정보의 출처나 작가의 명성을 판단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학생이나 훈련 받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곧 (4)편으로 이어집니다.)
※1)전상진, 『음모론 시대』(문학과지성사, 2014), 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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