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 시민의 자격이 있는가(4)

조송원 승인 2018.08.29 14:57 | 최종 수정 2018.08.29 15:47 의견 0

제이 레노Jay Leno가 마이크를 손에 쥐고,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걷는 사람을 대상으로 즉석 상식 퀴즈를 내는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의 ‘제이 워킹’ 코너를 사람들은 재미있어 한다.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뭔지 기억하나요?” 레노가 젊은 청년에게 묻는다. 그러자 긴 머리 젊은이는 “잡지도 해당되나요?” 라고 묻더니, 잠시 후 “음, 아마 만화책이요”라고 대답한다.

“교황은 어디에 사나요?” 고 다른 젊은이에게 묻자, “영국이요”라고 대답한다. “영국 어디죠?” 레노가 시치미를 떼고 묻는다. “음······. 파리.”

“남북전쟁의 다른 명칭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한 참가자가 항의한다. “그런 걸 어떻게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어요? 뭔 놈의 질문이 이렇죠?”(남북전쟁War between the States은 남부 쪽에서 쓴 명칭. 북부에서는 Civil War라는 명칭을 사용한다.)¹⁾

「주간 고등교육 연감」 2007년 1월호에는 테크놀로지와 밀레니엄 세대를 다룬 흥미로운 섹션 기사가 있다. 그 중 <전자 기기와 인터넷에 능하고 멀티태스킹에 강한 새로운 세대가 어떻게 캠퍼스 문화를 바꾸고 있나>라는 기사는 네바다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을 소개했다.

이 행사는 지역 대학생의 관심거리와 습관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는 서두에서 밀레니엄 세대가 ‘똑똑한 것은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밝힌 다음, 그런데도 ‘그들은 거의 신문을 읽지 않으며 독서도 거의 하지 않는다’라는 점도 지적했다. “얼마나 자주 도서관을 방문합니까? 그리고 도서관에서 무엇을 하나요?”라는 질문에 응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아빠는 맨날 책 같은 것에만 몰두해 있어요. 인터넷 같은 것이 책을 대체해버렸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거죠. 사실 저도 도서 대출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오랫동안 책을 대출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는 자주 가요. 거기에는 학교 교재나 교과서가 거의 다 있거든요.”

이 대학생이 얼마나 담담하게 책의 시대가 가고 인터넷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지 보라. 문명의 보고寶庫를 내버리는 것이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말 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말한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고, 자신의 세상이 끝나 버렸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의 전환은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이나 읽는 노땅들은 쥐뿔도 모르며, 젊은이가 노망나기 직전의 비실거리는 할아버지를 봐주듯 그런 어른을 용인한다는 것이다.²⁾

미국 외교전문지 'Foreign Affairs'
미국 외교전문지 'Foreign Affairs'

톰 니콜스 / 미국은 어떻게 전문지식에 대한 믿음을 잃었는가 : 왜 그게 엄청난 문제인가 

((3편)에 이어서)예전에는 도서관이, 적어도 참고문헌과 학술 분야에서는, 시장에 마구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일차적으로 걸러주는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인터넷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누구든 어떤 물건이라도 버릴 수 있는 거대한 저장소이다. 실제로 이것은 정보 검색이 불투명한 기준을 사용하는 돈벌이 회사가 개발한 알고리듬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연구를 행하는 일은 아주 힘들고 따분하다. 실제 연구는 믿을 만한 정보를 찾고, 분류하고, 분석하여 적용할 능력을 요구한다. 우리 앞에 있는 화면이 몇 초 안에 깔끔하고 예쁜 답을 제공해 주는데, 누가 애면글면 이 지루한 작업을 하겠는가?

기술적 낙관론자들은 이러한 반감은 과거에 일을 하던 방식의 유물로서 단지 옛날 생각일 뿐이고, 지금은 사람들이 소위 군중의 지혜에 직접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규모 평범한 사람들의 집합적 판단이 개인이나 심지어 한 전문가의 판단보다 때때로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집합 과정이 터무니없는, 잘못된 생각이나 확증편향을 걸러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군중의 투표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어떻게 전염되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유리항아리 속에 들어있는 사탕의 수를 추측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다. 코미디언 존 올리버John Oliver가 지적했듯이, ‘팩트(facts)'에 대해서는 의견을 모을 필요가 없다. 팩트에 대한 여론조사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어떤 숫자가 더 크냐, 15 혹은 5? 또는, 올빼미는 존재하는가? 또는, 거기에 모자가 있느냐?”

게다가 군중의 지혜라는 것의 요점은 군중의 구성원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다양한 독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사실상, 인터넷은 같은 생각을 가진 집단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기존의 신념을 확인하는 데 전념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는 단지 이 반향실(反響室. echo chamber)을 확대시킬 뿐이며, 정치적·지적 편견에 빠져있는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허우적거리게 하고 있다.

전문지식과 민주주의

전문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주 실패한다. 가장 악의 없고 평범한 실패는 우리가 보통 과학의 실패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 또는 전문직업인들도 현상을 관찰하거나 문제를 조사하고, 거기에 대한 이론이나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결과를 테스트해 본다.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류는 결국에는 교정된다. 지적 진보를 이루어 나가는 길에서 수많은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거나 방향을 잘못 잡기도 한다.

다른 형태의 전문가 실패는 좀 더 걱정스런 것이다. 예를 들면, 전문가들이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전문지식을 확장하려고 할 때, 잘못을 저지른다. 이것은 전문지식의 실패라기보다는 일종의 작은 사기행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논의 중인 특정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전반적인 권위를 주장하며 전문가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나 아주 유해하며, 전체 전문 분야의 신뢰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내 자신이 내 전공을 벗어나 다른 분야로 침범하는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의 의견과 결론은 내 전문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사회에서 전문지식의 역할을 연구한 학자들의 연구와, 여러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과 가진 토론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드물지만 가장 위험한 범주가 있다. 명백한 사기와 부정행위이다. 곧, 전문가들이 고의적으로 연구 결과를 조작하거나 최고 입찰자에게 전문가의 권위를 빌려주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실수를 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취할 조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공공정책 세계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공정책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주 주관적이고, 학문적 규범보다 훨씬 더 정치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정책 전문가들은 현재까지의 자신들의 실적이 결코 완벽하지 못했음을 좀 더 투명하게 밝혀야 하고, 정직해야 하며,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일반인도 실수와 무능, 부패나 명백한 사기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교육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무능과 부패와 명백한 사기에 대해서는 처벌을 주장하되, 단순한 실수에 대해서는 좀 봐주어야 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예전에 썼듯이, 전문가에 대한 일반인의 적절한 태도는 회의懷疑와 겸손의 조화여야 한다.

내가 옹호하는 회의론은 다음 세 가지에 국한된다. 첫째,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할 때, 그 반대되는 의견이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둘째,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비전문가에 의한 어떤 의견도 확실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셋째, 긍정적인 의견을 갖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전문가들 모두가 주장할 때, 일반인은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명제가 온건해 보일지 모르지만, 만약 받아들여진다면, 이것들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삶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러셀은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전문지식은 서로에 의존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국민의 안녕을 보장하는 기술적, 경제적 발전은 노동의 분화를 요구하고, 이는 다시 전문직업의 창출로 이어진다.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장려하고, 자신들의 지식 영역을 존중하도록 장려한다. 그리고 전문가주의는 궁극적인 고객인 사회 그 자체에 대한 모든 서비스 중의 한 부분으로서 전문가의 지식 영역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존중받기를 요구하도록 장려한다.

독재정권도 이와 같은 전문가의 서비스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위협으로 전문가의 서비스를 이끌어내어, 그것을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독재정권이 민주국가보다 실제로 효율적이지 못하고 생산적이지 못한 이유이다(몇 가지 통속적인 고정관념은 이와 반대이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민주국가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라는 말은 틀렸다.).

민주국가에서 일반 대중에 대한 전문가의 서비스는 사회계약의 일부분이다. 시민들은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결정권한을 선출된 대표자와 대표자에게 조언하는 전문가들에게 위임한다. 반면에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진 대중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선의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전문가의 핵심 요구사항은 ‘충분한 정보를 가진 대중’이다.

(곧 마지막 (5)편이 이어집니다.)

※1)마크 바우어라인/김선아 옮김, 『가장 멍청한 세대』(인물과사상사, 2014), 17~19쪽. 2)앞의 책,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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