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그리고 사람들

조송원 승인 2019.09.16 12:24 | 최종 수정 2019.09.16 12:56 의견 0
부산 해운대 장산의 영감할매바위 

#카라카슈의 판결

한 늙은 구두쇠가 있었다. 그는 자주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다가 깨어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가 죽기만을 고대하던 두 조카는 애가 탔다. 그의 유산을 모두 자신들이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두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던 조카들은 구두쇠가 또 쓰러지자 이번에는 아예 장례식 준비를 시작해 버렸다.

조카들은 장의사를 불렀다. 장의사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구두쇠의 옷가지를 부수입으로 챙긴 뒤, 턱이 벌어지지 않도록 묶고서 구두쇠의 몸을 씻기기 시작했다. 사악한 혼령이 죽은 자의 몸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콧구멍과 귓구멍 등에 몸에 난 모든 구멍들을 솜으로 틀어막았다. 발목은 끈으로 묶고 두 손은 가슴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는 사이 구두쇠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막상 벌어지고 있는 일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다시 기절하고 말았고, 조카들은 장례절차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장례행렬이 절반쯤 갔을 때 구두쇠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것을 선행이라 여긴 상여꾼들이 계속 교체되면서 관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느슨하게 닫힌 관 뚜껑을 밀치고 벌떡 일어난 구두쇠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스럽게도 저 멀리 공정한 재판관이라 칭송받는 카라카슈가 말을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구두쇠는 큰 소리로 카라카슈를 불렀다. 심판관이 장례행렬 가까이 다가와 멈추고는 두 조카에게 물었다.

“그대의 삼촌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으리.” 조카들이 냉큼 대답했다.
그러자 카라카슈는 조카들이 돈을 주고 부른 추모객들에게 물었다.
“이 시신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그러자 모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으리”
다급해진 구두쇠가 따져 물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을 직접 보고 있지 않소?”
카라카슈는 준엄한 눈길로 구두쇠를 노려보았다. “알라신께서는 나의 미약한 감각과 너의 맹랑한 말보다는 수많은 증인들의 증언에 따라 판단하라 하셨다. 나는 공정한 재판관이 아니던가? 장례를 계속하라.”

이 말에 늙은 구두쇠는 다시 기절했고, 장례는 순조롭게 끝났다.*

#사람1. 서울법대 출신 상당수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첫째, 초·중·고에서 대부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머리가 좋고, 성취욕구가 강하다. 이런 이력은 지고는 못 배기는 경쟁지상주의자와 자기가 주역이 되지 않으면 친구도 끌어내리는 자기중심주의를 키우는 토양이다. 나경원과 원희룡이 조국에게 퍼부은 독한 말들은 어느 대학 동기간에는 나오기 힘든 것이다. 둘째, 선민의식에 빠져 남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태극기 집회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상처를 후비는 말을 한 김진태 의원 같은 이들이 많은 이유다. 셋째, 학교 공부가 다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서울법대에 다니는 친구 하숙집을 방문했다가 고시과목 말고는 책이 전혀 없어 “왜 이렇게 책이 없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다른 책은 사시의 방해물일 뿐”이라는 그의 대답에 “죄짓지 말아야지. 너한테 재판받을까 겁난다”고 대꾸했다. 예전에는 인문학자인 목민관이 재판장이 되고, 법전문가는 형방의 지위에 머물렀지만, 이젠 법전문가가 법조는 물론 정치까지 장악했다.**

#사람2.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54)가 8월 23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사죄했다. 재현씨는 묘역에 1시간가량 머물며 윤상원, 박관현 열사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기렸다. 그가 머문 두 묘비 아래 누운 이들은 각별한 사람이다.

박관현은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계엄이 확대되자 광주를 빠져나와 여수로 피했다. 1982년 체포된 박관현은 ‘80년 광주’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옥중에서 50일간 단식 끝에 숨졌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으로 졸업 뒤 모두가 부러워하는 은행원이 됐다. 주택은행 봉천동지점에서 일하던 그는 잘 나가는 은행원 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 강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광주항쟁 때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다. 그는 진압 전날인 5월 26일 아침 외신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회견에 참여했던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자신의 책에서 윤상원을 “탁월하게 용감했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내게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브래들리 기자의 말대로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무력진압할 때 그는 끝까지 남아 도청에서 서른 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람3. 윤종오 전 울산 북구청장이 구청장 재직시절 지역 소상공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계 대형마트 허가를 반려한 일 때문에 살고 있는 집이 압류돼 경매에 넘어갔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가 온 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될 처지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윤 전 구청장은 2011년 코스트코 울산점이 들어서기로 한 건물의 건축허가 신청을 3차례 반려했다. 인구 17만 명의 북구에 코스트코까지 들어서면 대형마트가 5개나 돼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상공인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때까지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울산시 행정심판위원회가 2012년 직권으로 건축허가를 내줘 코스트코가 문을 열었다. 이후 건물주가 윤 전 구청장과 북구청을 상대로 건축허가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소송을 냈고, 대법원이 2015년 3억6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윤 전 구청장의 후임인 자유한국당 소속 박천동 전 구청장이 건물주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뒤 윤 전 구청장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이 지난해 6월 4억6천만원의 구상금 지급 판결을 내렸다.****

#사람4. 모스크 테러로 50명이 사망하자 ‘테러 청정국’ 뉴질랜드의 이미지가 큰 상처를 받았다는 말이 나왔지만, 사건 직후 이민 희망자가 급증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3월 29일 현지 매체 <스터프>를 보면, 크라이스트처치 테러 발생일인 3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뉴질랜드 이민국에 접수된 이주 희망 신청은 6457건으로 그 전 열흘간(4844건)에 비해 33% 증가했다. 무슬림이 주류인 나라들의 이민 신청건수 증가율은 더 크다. 자국 출신 이민자 9명이 희생당한 파키스탄은 65건에서 333건으로 412%, 말레이시아는 67건에서 165건으로 146% 늘었다.

최악의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민 희망자가 증가한 것에 대해 <스터프>는 아던 총리의 ‘공감 리더십’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던 총리는 무슬림 희생자들에 대해 “그들이 우리”라고 말하며 이민자 사회를 보듬고 백인 민족주의에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번 테러에도 쓰인 반자동 소총 판매를 금지했다. 무슬림 사회를 위로할 때는 히잡을 쓰고 “인종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아던 총리의 행보는 인종간·종교간 혐오를 부추기겠다는 테러범의 의도를 좌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질랜드 무슬림 사회는 아던 총리를 극찬하고, 파키스탄에서는 히잡을 쓴 그의 사진을 현수막으로 내건 추모집회가 열렸다. 3월 29일 사고 현장인 알누르 모스크 근처 공원에서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추도식에서 아던 총리는 기립 박수를 받았다.*****

저신다 아던 호주 총리

#사람5. 5월 24일 전남 순천시 봉화산 기슭에 머물고 있는 송기득(88) 교수를 찾았다. 봉화는 공동체의 위기에 타오른다. 그는 봉화다. 그러나 송 교수는 자신을 다 타버린 숯인 양 “이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인 발걸음이냐”고 했다. 대학을 정연 은퇴한 뒤 2001년부터 계간지 <신학비평>을 내고 이어 낸 <신학비평너머>마저 지난해 폐간시켰으니 허언만은 아니다.

그런 그가 끝내 놓지 않는 단 하나의 글이 있다. ‘아내 정순애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의 아내는 2016년 7월 22일 96살을 일기로 ‘몸옷’을 벗었다. 송 교수가 대학생 때, 여순사건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전도사로 살며 아이 셋을 키우던, 11살 연상의 아내를 만나 63년을 해로했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매일처럼 870통의 편지를 써 10권 째 책을 냈다. 별난 사랑이다. 아내는 63년을 살면서 늘 따뜻한 미소를 짓고,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쌍둥이 큰딸에게 물었다. ‘너희들 어릴 때도 엄마가 그랬느냐’고. 그중 한 딸은 어린 시절 너무 배가 고파 남의 집 고구마를 훔쳤는데, 그때 딱 한 번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다고 한다. 그때 고구마 주인이 집에 쫓아와 “전도사 딸도 남의 고구마를 훔치느냐”고 힐난하자 평생 말대답을 삼가던 어머니가 “전도사 딸은 사람이 아니다요?”라고 했단다. 인근 요양원에 사는 81살의 그 딸이 거동도 힘겨운 노구를 이끌고 점심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수양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준다.****** (안타깝게도 송기득 교수는 지난 9월 3일 88세를 일기로 '몸옷'을 벗었다.)

*앤드루 샤오·오드리아 림 엮음/김은영 옮김, 『저항자들의 책』(쌤앤파커스, 2012), 40~42쪽. **이봉수(세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서울법대 공화국’의 파탄」, 『경향신문』, 2019년 9월 11일. ***사설, 「노태우 아들이 찾은 묘비명」, 『미디어오늘』, 2019년 8월 28일. ****사설, 「소상공인 보호하려다 거리에 나앉게 된 구청장」, 『한겨레신문』, 2019년 6월 14일. *****이본영, 「‘공감의 리더십’ 아던 총리 효과? 테러 뒤 뉴질랜드 이민 희망 급증」, 『한겨레신문』, 2019년 3월 30일. ******조현(종교전문기자), 「인터뷰┃원로신학자 송기득 교수」, 『한겨레신문』, 2019년 6월 5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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