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선거 대신 추첨으로 뽑자

조송원 승인 2019.09.11 23:23 | 최종 수정 2019.09.11 23:43 의견 0
국회 본회의. 대한민국 국회 홈페이지.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미확인비행물체)를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없어도 그 존재를 믿는가? 본 적도 없고, 믿지를 않아도 UFO의 개념은 중요하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돼 코앞의 일도 험산준령이다. 그러나 어쩌다 UFO를 떠올린 순간, 우리의 사고는 먹고 사는 일과 지구와 태양계를 훌쩍 뛰어넘어, 아득한 우주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지 않을까?

‘삭발의 정치학’이 난비亂飛한다. 대통령의 적법한 인사권 행사에 대해 ‘문재인 좌파독재정부의 의회민주주의 파괴 규탄 삭발식’이란 펼침막이 커다랗다. 반면 박지원 의원은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3대 쇼는 의원직 사퇴, 삭발, 단식”이라며 “머리는 자라고, 굶어죽은 의원 없다”며 삭발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박 의원 말마따나 머리칼은 자라고 단식으로 굶어죽은 의원은 없다. 하여 국회의원의 삭발은 단순히 ‘정치행위’란 단어도 과분하다. 단지 ‘정치쇼’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정치쇼에 의해 정치 허무주의가 깊어간다는 것이다. ‘어떤 놈이 해도 꼭 같다’. 민주주의를 뿌리까지 썩게 하는 독약이다. 이 정치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있다. 도발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이 놈이 그 놈이고 그 놈이 저 놈이고 저 놈이 이 놈인, 자신의 이해에나 밝은 선거로 뽑힌 국회의원, 그들을 타매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너와 내가 직접 국회의원을 하자. 어떻게? 시민을 무작위로 추첨하여 국회의원의 일을 하는 것이다. 망상인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카시아(Ariel Procaccia)*의 글을 함께 읽어보자.

정식으로 선출된 미국의회의 멤버들보다 거리에서 무작위로 뽑은 535명이 확실히 일을 더 잘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몇 천 년 전에서 온 사람이다. ‘추첨’이라고 알려진, 국가 공무원을 무작위로 뽑는다는 아이디어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터무니없지도 않고 독창적인 것도 아니다.

BC 4세기와 5세기에 아테네 정부의 일부 중앙행정기관 공무원은 지원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뽑아 임명됐다. 예를 들면, 500명의 평의회 멤버들은 임기는 1년이고, 무작위로 선출되었다. 평의회의 책무는 법안 제출, 행정부 감시, 외교관계 관리 등이다. 놀랍게도 30세(공무원 담임 최소 연령) 이상의 아테네 시민 50~70%가 적어도 1회 이상 평의회 의원으로 봉사했다. 이것은 고대 아테네 시민의 전체 인구가 현대 로마 시민 숫자와 거의 비슷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추첨은 대단히 유행했다. 몇 세기 동안 피렌체 정부 공무원과 베니스 총독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추첨이 핵심 역할을 했다. 현대의 스페인 일부인 아라곤 왕국에서도 추첨이 널리 적용되었다. 추첨은 실제로 20세기에도 정부 시스템으로 지속하여 왔다. 산마리노(이탈리아 동부에 있는 세계 최소의 공화국)의 두 국가원수는 최근 1945년까지 60명의 평의회 의원들 중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도시국가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 추첨제도를 이용한 역사적 선례는 풍부하다. 그렇다면 추첨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시민이 수만 명인 도시국가는 물론 수억 명인 현대국가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고 본다.

『선거에 반대하여』란 그의 명저에서, 레이브룩(David Van Reybrouk)은 정치학자 부리시우스(Terrill Bouricius)가 설계한, 추첨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현대적 청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아테네 모델에 의존하여, 부리시우스는 다체제(multi-body system)를 제안한다. 이 다체제에는 입법 주제를 선택하는 의제위원회(Agenda Council), 법률을 제정하는 검토위원회(Review Panels), 입법절차 자체를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규칙위원회(Rules Council)가 포함된다. 이 기관들의 멤버는 지원자 집단에 무작위로 선출된다. 임기는 3년이고, 임기 동안에 꽤 많은 보수를 받는다.

이 아이디어에서 가장 흥미로운 면은 법안을 의결할 권한은 다른 기관, 곧 정책 배심원단(Policy Jury)에 있다는 점이다. 각 법안마다 정책 배심원이 소집된다. 400명의 배심원은 물론 무작위로 선출된다. 단, 지원자 가운데에서 뽑는 게 아니라 전체 성인에서 선출한다. 선출된 배심원은 회의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되고, 자신들의 봉사(수고)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이것은 재판의 배심원과 매우 흡사하다. 배심원들은 며칠만 업무를 한다. 업무 동안에 논의 중인 법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 받고, 그 법안의 찬반양론을 듣는다. 그러고 난 후 마지막으로 비밀 투표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표면상으로 봐 현대 민주주의를 괴롭히는 질병의 대부분을 치료할 것이다. 특별 이익단체나 기부자, 그리고 정당에 신세를 진 국회의원, 막을 수 있다. 부패나 권력의 사적 이용, 막을 수 있다. 인종적 편견을 반영하는 정부, 막을 수 있다. 내가 베나데(Gerdus Benade)와 고엘츠(Paul Goelz)와 함께 한 최근의 공동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정확한 통계 기법을 사용했을 때, 추첨이 광범위한 집단과 의견을 대표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묘한 정책 문제에 대해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의 판단을 믿을 수 있을까? 적절한 상황 하에서, 믿을 수 있다는 증거는 아주 많다. 지난 20년 동안 아일랜드, 네덜란드, 그리고 캐나다의 두 주(온타리와 브리티시 컬럼비아)는 선거나 헌법 개혁에 관해 정부에 의견을 개진해 줄 시민의회를 소집했다. 이 시민의회들의 100~160명 멤버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무작위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제안 내용을 심사숙고하고 개발하여 투표하는 데 9~12개월이 걸렸다.

아일랜드의 실험은 특히 인상적이다. 2013년과 2016년에 소집된 시민의회는 민감한 헌법 문제를 토론했다. 시민의회는 동성 결혼(gay marriage)과 낙태를 합법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뒤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큰 표 차로 승인받았다. 동성결혼은 62%, 낙태는 66% 찬성표를 받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실한 가톨릭 국가에서 동성 결혼이나 낙태와 같은 중요한 쟁점에 대해 비교적 여론 합의를 도출했다는 사실은 (심사숙고와 함께) 추첨제도의 효력(power)을 증명한다.

올해 초 벨기에의 독일어 사용 공동체 국회(the Parliament of the German-speaking community)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상설 시민회(a permanent Citizens' Council)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민 24명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18개월이다. 시민회는 정기적으로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를 소집할 것이다. 그러면 독일어 사용 공동체 국회는 시민의회가 만들어 낸 건의를 토의해야 한다. 이것은 추점제도 옹호자들에겐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성취이다. 세계적으로 전파될 선구자이기를 희망한다.

명백히, 벨기에의 구상까지도 부리시우스 스타일의 추첨 유토피아와 아직 거리가 멀다. 그리고 배심원단(우리)은 그렇게까지 멀리 가고 싶은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혼란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아마도 약간의 무작위 선출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다.

*Ariel Procaccia(카네기 멜론 대학교 컴퓨터과학부 부교수), 「Lotteries instead of election? Not so arbitrary」, 『The Korea Herald』, SEPTEMBER 9, 2019.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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