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인가? 그렇다. 대표자란 대표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민중의 이익과 관심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사람일뿐이다. 곧, 국회의원과 선출한 국민과의 관계는 위아래가 아닌 대등한 위임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연발생적인 제도가 아니다. 역사의 발명품인 인위적인 정치제도이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독재자와 압제자에게서 권력을 국민으로 옮겨오기 위해 애국자와 압제자 공히 많은 피를 흘렸다.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일갈했다.
물음을 약간 바꿔보자. 지금의 국회의원들은 ‘나의’ 이익과 관심사를 대표하고, 대변하고 있는가? 부정적인 답변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국민인데,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이 왜 ‘내’ 이익과 관심사를 대변하지 않는가? 그러나 국회의원은 대표자이므로 ‘나’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국민은 단일체가 아니다. 5천만 개인과 수많은 조직과 단체로 구성된다. 그리고 민주사회는 이들 각각의 이해관계가 충돌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요점은 내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야, 내 이익을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아비지트 바네로지 교수와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 하버드대의 마이클 크레이머 교수 3명에게 돌아갔다. 수상 이유는 세계 빈곤을 완화하기 위하여 실험적 접근방식을 택한 데 대한 공로이다. ‘전 세계 빈곤 퇴치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상당히 높였으며’, ‘발전경제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자신들은 자유시장의 고위 성직자이며, 정부의 역할을 무시하고,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에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훌륭한 경제학자들은 이 고정관념에 도전하여, 정부정책을 통하여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시민들의 빈곤 탈출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3명은 이 범주에 든다.
뒤플로 교수는 2017년 한 연설에서 발전경제학자들을 배관공에 비유했다. 전반적이고 보편적인 해결책을 찾는 대신에 특정한 상황의 현실세계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빈곤 문제는 장소마다 그 원인이 다르므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몸소 손을 더럽히면서 각각의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투자와 산업화가 가난한 나라를 부유한 나라로 변모시킴은 자명하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가 증명하고 있다. 성장을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뒤처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산업화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우선 가난으로 겪는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단기간에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정책인 것이다.*
17일 김정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세청에서 받은 ‘2017년 귀속연도 통합소득 천분위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상위 0.1%에 속하는 2만2482명은 총 33조1390억 원의 통합소득을 올렸다. 통합소득은 근로소득과 종합소득(사업·이자·배당·기타소득)을 합친 것이다. 이 상위 0.1%의 통합소득 33조 원은 하위 27% 구간에 속하는 629만5080명의 통합소득(34조8838억 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통합소득을 신고한 사람 전체를 소득순으로 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소득(중위소득)은 2301만 원이다. 상위 0.1% 소득자가 중위소득의 64배를 번 셈이다. 상위 1%로 범위를 넓혀 봐도 소득집중 현상은 마찬가지이다. 2017년 상위 1%의 통합소득은 전체의 11.4%를 차지했다. 상위 1%의 통합소득 87조7954억 원은 하위 43%의 소득 87조7898억 원과 맞먹는다.
좁혀지지 않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산 등 불로소득 과세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김정우 의원은 “성장의 결실을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이전해 다시 내수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도록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이다. 중위소득은 월수입이 20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아직도 ‘성장’과 ‘상속세 감면’을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이 너무 많다. 이들은 분명 국민의 이익과 관심사를 대변하는 사람들인데, 누가 그들을 대표자로 밀었을까?
20대 국회의원의 평균 순자산(채무제외)이 22억 8천만 원이다. 기업인 출신의 거액 자산가나 배우자의 채무 등으로 채무가 과다한 경우 등 상·하위 3명씩을 제외하고, 의원직 상실이나 재선거 의원 등 재산공개가 안 된 3명의 의원을 제외한 285명을 대상으로 한 결과이다.
각 당별로 구분하면, 자유한국당 32억, 바른미래당 25억 3천, 민주평화당 16억 3천, 더불어민주당 15억 8천, 정의당 4억 5천만원 순이다. 순자산이 몇 십억 원에 1천만 원 이상의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이 월수입 200만 원 안팎인 서민의 관심사를 알기나 할까? 대표성을 고려하면 정의당의 의원수가 가장 많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소득불균형이 심화된 것은 국민이 그 대표자를 잘못 뽑은 부산물이 아닐까? 민주사회에서는 국민이 주인이다. 국회의원은 그 대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에게 유리한 정치는 정치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못 가진 자’가 그 대리인을 잘못 선정한 탓이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을 탓할 수 없다. 오직 주인인 ‘내 탓’만 있는 것이다.
정치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자신들이 봉사하고자 하고 대표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그 다수보다 가난하게 산 정치인이 있다. 호세 무히카(1935~) 우루과이 전 대통령(재위 2010.03~2015.02)이다. 비서나 경호원은커녕 부인이나 자녀도 없이, 다리 저는 개와 함께 다니며, 손수 장비를 들고 이웃집을 수리하기도 한 그는 간디 이후 자발적 가난으로 산 유일한 지도자다. 월급의 90%를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하고 남은 액수도 국민 평균소득 80만 원보다 많다고 하여, 유일한 재산인 낡은 차로 출퇴근하는 길에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고, 단 한 번의 비리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부정하며, 정말 가난한 사람이란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 사람들처럼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속담에 ‘천석꾼이 하나 나면 삼이웃이 망한다’는 게 있다. 시장원리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세상에선 돈이 돈을 벌고, 가진 자의 탐욕은 그 끝을 모른다. 자본의 탐욕을 규제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은 정치가의 몫이다. 정치가들은 ‘민의’를 법으로 제도화하고 정책으로 실행한다. 그 정치가를 우리가 선출한다. 우리가 국회무용론을 외쳐대기 전에 우리 자신이 대표자 선택에 잘못을 없었는지 곰곰이 자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내년 4월 총선, 대한민국 역사의 변곡점이 될 중대한 고빗사위를 앞둔 소회이다.
*NOAH SMITH(블룸버그 칼럼니스트), 「Economics Nobel for three pragmatic poverty-fighters」, 『The Korea Herald』, OCTOBER 17, 2019. **이경미, 「상위 0.1% 2만여명 통합소득 33조 하위 27% 630만명이 번 돈에 육박, 『한겨레신문』, 2019년 10월 17일. ***박홍규(영남대 명예교수),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대통령」, 『한겨레신문』, 2019년 9월 21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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