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이야기(12) - 주요한 시인의 주례로 치러진 결혼식

소락 승인 2021.01.25 07:07 | 최종 수정 2021.01.25 07:18 의견 0
결혼하는 박찬명군과 유시정양
결혼하는 박찬명군과 유시정양

엄마와 아버지의 혼인일은 1959년 4월 19일이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기 딱 1년 전이었다. 6․25 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와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아버지는 서울 토박이인 엄마를 만나 보금자리를 이루었다.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시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커다란 장독이었단다. 실질적으로 유산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시댁으로부터 물려받기는커녕 집도 절도 없는 고아가 된 아버지를 엄마가 은혜롭게 품어주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겨서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엄마 집안의 반대가 거세게 심했을 것이 당연하다. 부모도 없는 오남매 맏이인 남자, 직업도 없는 남자, 게다가 가진 재산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남자와 같이 살겠다는데 이를 반길 부모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를 지극히 불쌍하게 여겼다. 그 긍휼의 마음은 사랑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불나방처럼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엄마는 잘 살기 위해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도와주기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같이 살며 결혼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엄마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엄마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버티기 힘드셨을 것이다. 긍휼심(矜恤心)이었던 사랑의 힘을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꽃다운 나이에 1957년 어느 날부터 가출하다시피 하며 전격적으로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고 1958년에 누나를 낳고 누나가 첫돌 지난 1959년에 결국 혼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부모가 돌아가셔서 시집이 없었으니 엄마는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거의 데릴사위 식으로 장가를 간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엄마가 아버지를 수렁에서 건진 결혼식
엄마가 아버지를 수렁에서 건진 결혼식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힘들게 사셨을 텐데 이렇게 근사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살 길이 생겼다. 결혼도 하지 않고 어렵사리 엄마와 같이 살던 아버지가 취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북에서 같이 내려온 아버지의 고모뻘 친척이 계셨는데 미아리에 사셨기에 미아리 고모라고 불렀다. 미아리 고모께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는데 조카의 처지가 하도 불쌍하기에 신부님한테 도움을 요청하셨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신부님의 추천 덕분에 경향신문사 보급부에 취직할 수 있었다. 발간된 신문을 각 보급소로 수송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제 처가에 위신이 서게 된 것이다. 엄마는 지금도 이제는 돌아가신 미아리 고모님을 감사히 여기며 사신다. 아버지의 형편이 좋아지게 되어 첫 아이인 딸의 돌이 지난 후 늦게나마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 은혜로운 결혼식의 주례는 주요한 선생님이셨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국어책에도 등장하는 시인이셨던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서울고등학교 친구의 지인이었는데 당시 유명한 인사이셨다. 그런데도 가난한 젊은이의 결혼식 주례를 기꺼이 서주셨다. 넉넉한 덕을 베푸셨던 일이었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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