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
같은 내용의 다른 버전도 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이건 아니다’란 정치현실에 맞닥뜨리거나 선거철이 되면, ‘플라톤의 경구’라며 소셜미디어 이곳저곳에서 떠도는 말이다. 누구의 통찰이건 간에, 요즘 대부분의 국민들의 폐부를 찌르는 말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장관 중에서 교육부장관 노릇하기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국민 대부분이 ‘교육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학교를 다녔고, 학부모 경험을 통해 누구나 교육에 대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어떤 교육정책을 내놔도, 각각의 그 일가견에 맞출 수가 없다.
신분사회를 극복한 민주사회에서 ‘계층상승의 사다리’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객관적인 사회제도가 교육이다. 그 사다리를 길고 튼튼하게 하는 교육정책도, 그 사다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정책도 찬반양론에서 길을 잃는다.
이러나저러나 욕을 먹는다. 그러니 ‘이왕이면’ 하고, 힘 있는 자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는다. 교육에 관해 안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자기 이익’에 봉사하는 교육정책에 밝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선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에는 무관심하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정치 전문가이다. 한데 그 앎의 대부분은 ‘정치 혐오증’이나 ‘반정치 이데올로기’이다. ‘이놈이 하든 저놈이 하든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다 도둑놈들이다’, 맨날 싸움박질하는 국회, 그 따위는 없애버려도 된다’
그러면 정말 소는 누가 키우나? 몇 가지 짚어보자. 우선, 대한민국은 신분사회가 아니다. 국회의원이란 ‘직업’이 있지, 국회의원이란 신분이 세습되는 게 아니다. 그 국회의원은 국민이 채용한다(뽑는다). 그 대표적인 직무는 법을 제정·개정·폐지하고, 예산안 심의 등 행정부를 견제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싸움박질’을 한다. 민주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의 ‘이해의 충돌’을 전제한다. 각자의 이익이 다르므로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때 국민은 ‘국사(나랏일)라는 경기’에서 방관자(구경꾼)이 아니라 심판자이다. 선수(국회의원)가 왜 싸우는지, 어떤 선수가 반칙을 하는지, 모두 반칙을 하더라도 반칙의 경중을 가려, 심판이 심판해줘야 한다.
반칙하는 선수든 정당한 선수든, 선수라면 누구나 승리를 쟁취하고 싶어 한다. 당연한 일이다. 한데 심판이 심판하기를 포기하면, 경기는 엉망이 된다. 이렇게 경기(나랏일)가 엉망이 되어 삶의 조건이 망가지면, 그 책임은 선수 못지않게 심판에게도 있다. 이 책임이야말로 민주사회에서 누리는 각종 권리에 따르는 당연한 의무이다.
다음으로, 국회를 없애거나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면, 누가 가장 좋아할까? 단연 관료들과 재벌들이다. 재벌들은 돈벌이가 목적이고, 자본은 무한 증식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규제·간섭·감독하는 국회(국회의원)를 성가신 시어머니보다 싫어한다.
분명한 건, 재벌의 무한 시장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국회의원 등의 정치세력뿐이라는 사실이다. NGO(비정부기구) 등의 시민단체도 국회의 입법을 통해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 저명인사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경우, 초심 유지 여부가 관건이지 시민단체 활동을 ‘출세의 디딤돌’로 이용한다는 비난은 본질에서 벗어난 편견이다.
관료들은 대체로 기득권층 쪽으로 기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이 창대한’ 고위 관료는 자신을 기득권층에 위치 지우기 때문이다. 한미한 서민 가정 출신도 고시(考試) 등을 통해 환로(宦路.벼슬길)에 나선 후, 어느 정도의 직위에 오르면, 서민의 눈이 아닌 엘리트 상층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이들이 갖는 공통분모는 선민의식과 보상심리이다. 남보다 머리가 좋고, 노력도 더 많이 하여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다. 공직(公職)에 들어서서도 경쟁하여 이만큼 왔다. 이런 사실을 근거 삼아 남보다 뛰어나다는 선민의식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선민’이기기에 보상을 받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득권층이란 신분은 없다. 부(富)는 대물림되지만 공직은 자식들에 물려줄 수 없다. 그런데도 어느 사회에서나 기득권층 관료가 존재한다. 한 가계(家系)가 고위직을 세습하여 독점한다는 뜻이 아니다. 물러난 그 빈자리를 또 다른 그 누군가가 채우며, 구성원과 그 가계는 달라도, 기득권층 그 자체는 영원히 이어진다는 말이다. 조선조 500년 기득권층 충원 방식이기도 하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한다’는 개인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 공부가 그 개인의 출세를 위한 방편, 곧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면, 사회에서 대접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머리가 좋은 사람은 양날의 칼이다. 사회에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가 도리이며,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덕행이라고 믿고, 가까운 데서부터 착수해 나가되, 자신의 이해(심득.心得)를 통해서 몸소 실천하는 것(궁행.躬行)을 목표로 삼는 공부이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란, 심득과 궁행에 힘쓰는 대신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고, 관심을 바깥으로 돌려, 지위와 명성을 취하는 공부이다.” -퇴계 이황-
지식인들도 ‘반정치 이데올로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어느 토론에서 한 원로 교수가 2012년 안철수 의원이 제기한 ‘국회의원 30% 감축’이 옳다고 주장한 것을 보았다. 국민 여론이 압도적으로 찬성한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 근거는 참인가?
연구 성과도 없고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수가 많으니, ‘기레기’가 많으니, 말썽 일으키는 판사와 검사가 많으니, 교수를 30% 줄이고, 언론사도 통·폐합으로 30% 줄이고, 판검사도 30% 줄이자고 제안한 뒤, 여론조사를 하면 찬·반 어느 쪽이 많을까?
안철수 의원이나 그 교수는 ‘뼈 속까지’ 기득권층 옹호자거나, 포퓰리스트거나, ‘정치 문맹’일 뿐이다. OECD 주요국의 의원수의 평균은 인구 9만9천명당 1명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17만명당 1명이다. 제헌국회에서도 인구 약 2천만 명에 의원 정수는 200명이었다. 대부분의 정치학자들도 우리나라 국회의원 정수는 10만명당 1명인 500명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역사 이래 노동자(서민)의 권리 보장과 사회 정의는 상층 엘리트 집단(기득권층)에 의해 항상 저지돼 왔다. 그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영속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반정치 이데올로기를 퍼뜨려, 대중들이 ‘정치 혐오증’을 갖도록 획책해 왔다. 자기들끼리만 다 해먹겠다는 심보에서다. 지금까지 그 선동은 대체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을 못 참’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서민과 약자가 기댈 곳은 정치가 유일하다는 사실이다. 기득권 세력 의 이익 쪽으로 편향된 사회제도를 누구에게나 공평한 제도로 바꾸는 일은 정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검희 특별법’을 굳이 ‘도이취모터스 특별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정치인이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국회의 민주적 가치를 크게 훼손하고 편파적인 입법, 참사의 정쟁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국회의원이다.
도끼도 도끼 나름이라고 했던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 수도 있다. 어떤 정치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선택의 후과는 선택한 자의 몫이다. ‘투표권 불행사’도 선택의 한 종류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글 첫머리의 문장은 비슷한 게 플라톤의 『국가』에 나온다. 다음 글에서는 『국가』에서 시작하여 논변을 이어가고자 한다. <계속>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