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비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밝힙니다. 여러분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여러분의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도마복음』 제62절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는 <마태복음>(6:3)의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마태복음>의 가르침은 누구나 알다시피, 자선을 베풀 때 위선자들처럼 남의 칭찬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나팔을 불어대지 말고, 조용히 남모르게 하고 이를 숨겨두라는 윤리적인 교훈이다. 따져보면, 선한 사람이라면, ‘그때 그 상황’에서의 선행은 물 흐르듯 당연한 일이다. 구태여 무슨 특별한 행위라고 의식하지 않게 되니, 오른손이 왼손을 염두에 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영악한 대중은 이해관계에 밝다. 받는 게 없으면 줄 리가 없다. 하여 예수는 이 가르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선행에 대한 대가를 제시한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4)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비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밝혀준다고 말한다. 그리스교 초기 전통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밀의(密意)적 성격을 가졌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받아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노파선을 설하지 말라” 노파선(老婆禪)이란, 할미가 손자를 위하듯이 공부의 전후를 시시콜콜히 너무 자세하게 일러주는 것을 말한다.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 오히려 독(毒)이 되기 십상이니, 각별히 자제가 필요하다. 하여 노파선을 설하지 말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부는 학습과 다른 뜻이다. 우리는 공부를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의 뜻으로 쓴다. 이건 학습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부는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다’, 특히 ‘참선(參禪)에 진력한다’는 뜻이다.
남의 돈을 아무리 많이 세어 봤자 내가 부자가 될 수 없다. 남의 목장의 송아지 머리를 세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숟가락은 국 맛을 알 수가 없다. 하여 스스로의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경전의 학습으로 ‘남의 머리’를 빌려 깨친 척하는 것을 몹시 경계한다.
「조주 선사가 말하기를, “만약 나로 하여금 저들의 근기(불법을 듣고 깨달아 아는 능력)를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3승12분교(三乘十二分敎.부처의 가르침 전체)로 그들을 제접(提接.스승이 학승學僧을 맡아, 문답을 통해 가르치고 지도함)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다만 본분사(本分事.전심전력으로 공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로 사람을 제접했는데, 만약 제접하여 얻지 못하더라도 배우는 사람의 근성이 더디고 둔한 때문이다. 나의 일에 아무 관계가 없다” 고 했다. 생각하고 생각하라.」 -대혜종고/『서장書狀』/고산 체 장노(대혜선사의 손제자)에게 답함-
조주 선사는 오로지 본분사로 가르칠 뿐, 미주알고주알 노파선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치지 못하는 것은 조주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근성이 약하고 아둔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향엄 선사(香嚴禪師)가 불도에 입문하여, 처음에 백장(百丈) 스님을 모실 때에 무척 총명했다. 여러 해를 모셨으나 깨침을 얻지 못했다. 백장 스님이 돌아가셔서 위산 스님에게로 갔다. 위산 스님이 “너는 한 가지를 물으면 열 가지로 답할 정도로 똑똑하다고 들었다. 이것은 분별심(分別心.지적知的으로 생각해서 헤아림)이 시킨 것이다. 생사의 근본 문제인 ‘부모님이 낳기 이전의 일’을 시험 삼아 일러 보라”고 했다.
향엄 선사는 이 질문을 받고 아득하여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와 평소 공부한 문자(文字. 경전)에 찾아보았으나, 한 글귀도 대답할 것이 없었다. 마침내 얻지 못하고 탄식하며 ‘그림의 떡은 굶주림을 채우게 할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
여러 번 위산 스님에게 설파해주기를 빌었다. 위산은 ‘내가 너를 위하여 설파하면, 너는 다른 날에 반드시 나를 꾸짖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끝내 설파해주지 않았다. 향엄은 어쩔 수 없어서 문자를 다 태워버리고, ‘이번 생에 부처님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스님들을 시봉하여 심신의 노역이나 면하겠다’고 작심하고, 한 암자에 머물렀다.
하루는 풀과 나무를 베다가, 기왓장이 바람에 날려 대나무를 쳐서 소리가 날 때, 문득 깨달았다. 이에 향엄은 멀리 위산 스님께 예배를 드리며, “화상의 큰 자비는 은혜가 부모보다 크십니다. 당시에 저를 위하여 설파해 주셨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 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노자』 제1장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쉬운 한자 6개로 이루어진 문장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대표적인 것 2가지를 보자.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오강남)
도는 가르쳐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가르쳐 말한 도는 ‘상자연常自然의 도’가 아니다. (기세춘)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가르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강남은, ‘도’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定義)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실재 혹은 절대적 실재는 우리의 제한된 표현을 초월한다. ‘도’라든가 뭐라고 이름이나 속성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그 이름이나 속성의 제한을 받는 무엇이 되어, 절대적인 ‘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세춘은, 노자가 말한 도는 유가(儒家)들의 도학(道學)에서 말하는 도와는 전혀 다름을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유가의 도를 ‘인륜의 도’라고 말하고, 노자의 도는 ‘자연의 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륜의 도는 당위법칙이요, 자연의 도는 존재법칙이다.
노자의 도는 사물의 본질이며 질서이다. 이를 ‘상자연’(常自然)으로 표기했다. 다만 노자에게서 그 자연은 물질로서의 자연에 머물지 않고, 다시 ‘영혼을 내재한 자연’으로 발전한 것이다. 곧, 자연도 인간도 모두 영성을 품었다는 범신론(汎神論)이다.
“唯上知與下愚不移(유상지여하우불이) 상지와 하우는 변하지 않는다”고 공자는 가르쳤다(논어/양화3). 아주 지혜로운 사람(상지)과 아주 어리석은 사람(하우)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는, 태어나면서 아는 성인-배워서 아는 군자-막히면 그때서야 배우는 소인-막혀 있으면서도 배우지 못하는 하민, 이렇게 사람을 4등급으로 나누는 사품설(四品說)을 주장했다. 물론 공자는 혈통만으로 신분이 정해지는 것을 반대했다. 지혜와 학문으로 신분 등급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본의와는 달리, 사품설은 신분차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전한(前漢) 동중서(기원전 179~104)와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 한유(768~824)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은 공자의 사품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필자는 진리의 탐구자가 아니다. 삶과 세상을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나아가 삶의 조건인 이 사회를 어떻게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시킬까,에 관심한다. 세상 변화의 중심에는 정치가 있다. 싫든 좋든 정치가 우리 삶의 조건을 정한다.
하여 인류의 스승인 종교적 천재들의 통찰과 지혜에서 현실 정치 개선의 실마리를 포착할까에 관심한다. 우선 서론으로 몇 가지 이야기 혹은 이론을 살펴봤다. 다음 글에서 본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할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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