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 (23)】 인레호수에서2 - 한영숙
조승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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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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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레호수에서 2
한 영 숙
거뭇거뭇한 하늘 갑자기 장대비 퍼붓는다
순식간에 검붉은 흙탕물 차고 넘친다
그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길고 긴 호수는 동요하지 않는다
한때 검은 마스카라 범벅으로 범람했던
속 시끄러운 나는,
여기저기 생채기 내며 슬픔 따라 출렁댔었지
돌아오는 길
수상가옥에서 유독 만지작거렸던
연시로 짠 고가의 하얀 머플러,
세월아 네월아 연실 돌돌 말아
내 안에 물레 돌리면
애인의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혓바닥 같은
머플러 짤 수 있을까
못 짜면 어떠하랴
비우고 또 비우고 나면
나 또한 비루먹은 부처라도 되지 않을까,
- 『한국시인』 2023년 Vol. 05
물안개 가득한 호수에서 새벽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그 낮은 독경소리가 몽환적으로 들리겠다. 인레 호수(Inle lake)는 미얀마 880미터 고지에 있는 꽤나 큰 산정호수이다. 여러 소수민족들이 수상가옥에서 살고 불교가 생활화된 평화로운 곳에서 한영숙 시인의 시심이 깊어졌다. ’순식간에 검붉은 흙탕물 차고 넘치‘는 광경을 보았는데 ’길고 긴 호수는 동요하지 않‘았다.
새벽을 알리려고 배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장대로 호수를 내려쳤지만 마치 물속 고기와 물 밖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고 일상처럼 새날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때 검은 마스카라 범벅으로‘ ’여기저기 생채기 내며 슬픔따라 출렁댔‘던 시인도 깨닫게 된다. 수상가옥에서 구입한 하얀 머플러를 보면서 물레를 돌려 만든 그 과정처럼 ’세월아 네월아 연실 돌돌 말아 내 안에 물레 돌리면‘ 버릴 것은 버리고 알맹이로 남은 것으로 시인이 필요한 고요를 얻을 수 있을까, 빗대어 얘기한다. 그리고 머플러를 ’못 짜면 어떠하랴‘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그렇게 ’비우고 또 비우고 나면‘ 시인도 ’부처라도 되지 않을까,‘ 부처도 그냥 부처가 아닌 몸이 힘들어 흉하게 된, 비루먹은 부처말이다.
마스카라 범벅으로 갈등했지만 세월아 네월아 참고 견디면 되는 일이다. 동요 하지 않는 호수처럼 수상가옥에서 낮은 목소리로 독경하던 그 스님들이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경지가 멀지 않게 보이는 시인의 깨달음이 있으니, 여행의 기쁨이기도 할 것이다.
◇ 조승래 시인 : ▷경남 함안 출생,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시집: 《칭다오 잔교 위》, 《뼈가 눕다》, 《어느 봄바다 활동서 어류에 대한 보고서》, 《적막이 오는 순서》 외 ▷계간문예 문학상(2020), 조지훈 문학상(2021) 수상 ▷단국대 겸임교수 역임(경영학 박사)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집 서울, 한국문인협회 이사,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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