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7. 경수와 오미④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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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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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7-4. 가짜 뉴스에 시달리는 여왕
화났구만?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미안해 삐지지 말고 말해봐. 너의 입장이 되어 역지사지해서 들어볼게.
진작에 그렇게 순순이 나와야지. 변명으로만 듣지마. 다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나는 작은 오빠한테 왕위를 물려받고 어떻게 하면 이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며 안정된 나라로 만들지 여러 정책들을 펼쳤어. 가뭄과 흉년으로 고달픈 백성들이 낼 과도한 세금을 면제하고 억울한 죄수들을 사면하기도 했어. 흉악해진 민심을 수습하느라 노력했지. 그렇다고 완전히 개혁적인 정책을 펼치진 못했지. 선왕이던 두 오빠의 정책을 계승하고자 했어. 내가 반성하는 게 바로 그 점이야.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개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사실 그렇게 할 권력이 나한테는 부족했어.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위력이 셌거든. 특히 여자가 왕이라는 거에 날 노골적으로 우습게 보는 신하들도 있었어. 그 놈들 그때 다 숙청했어야 했는데 난 그럴 처지가 못되었어. 덩치만 남자처럼 컸지 여자인 나는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었어. 그리 할 수도 있었는데 겁나기도 했어. 더군다나 나도 선대의 두 여왕들처럼 남편이 없었어. 남편은 없었지만 내가 믿고 따르는 남자는 있었어. 내 유모의 남편이었던 사람으로 나한테는 숙부였지. 숙부면 삼촌인데 어떻게 삼촌과 그럴 수 있냐고 질문하겠지만 당시 왕족 사회에는 그런 일들이 많았어. 근친상간이라기보다 근친혼에 가까웠지. 또 항간에는 내가 그 사람과 불륜의 관계라고 많이들 쑥떡거리고 그랬지. 지금도 여전히 그러더구만. 아예 나의 남편이라고 하더구만. 부정하지는 않겠어. 정식 남편은 아니어도 내가 사랑했던 연상의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그 남자는 권력욕이 아주 많은 사람이 아니었어. 자기를 좋아하는 여왕인 나를 뒷배경으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가 권력을 장악하며 권세를 쥐고 지맘대로 휘둘러댔던 비선실세라고 했지. 근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분히 과장된 부정적 평가야. 다 여자인 나를 우습게 보고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거야. 그는 권력과 정치보다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내가 보기엔 낭만적 로맨티스트에 가까웠어. 그래서 그는 당시 고명한 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백성들 사이에 전래되어 오던 가사집을 묶어서 편찬했어. 나를 칭송하는 구절도 있어서 의도적이라고 하던데 아무튼 문학적 예술적 언어적 가치가 뛰어난 역작이었지. 나라가 망해가는데 그런 쓸데없는 거 썼다고 폄훼하는데… 그렇게 폄하할 일은 아니지.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없어졌어. 너무 안타까워.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났어. 항간에서는 나와 성관계를 하다가 내 배위에서 즉사하였다는데, 그러니까 복상사(腹上死)로 죽었다는 소문이 펴졌는데, 그것도 성관계를 원치않은 그를 억지로 하게 해서 변태적 색광이자 음란한 색녀인 내가 그를 죽였다고 하던데 넌 그런 헛소문을 믿을 수 있니?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인지 가짜 뉴스인지… 그런데 네가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별로 그랬을 거 같지는 않네. 그런데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너랑 관계한 남자가 복상사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그러는 건가?
증거가 있을 수 있겠어. 설령 복상사 했다고 쳐봐. 여왕인 내가 나랑 성관계 중 남자가 내 배 위에서 복상사했다는 증거를 여왕인 내가 남기겠어. 그런 증거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 그건 아니야. 그가 왜 어찌 죽었는지는 그를 사랑했던 장본인인 내가 가장 잘 알 거 아니겠어. 사람들이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냥 들리는 소문을 믿어 버리고 말지. 특히 얼마나 쇼킹하면서 해괴한 재밌는 소문이야! 여왕과 즐긴 불륜남의 복상사? 가히 대서특필 감이지? 내가 솔직히 말하건대 그는 심장 관련 지병으로 사망했어. 믿어줘. 믿지 못한다면 할 수 없지만 여기서 내가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어. 난 솔직한 여자야.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솔직한 편이었지.
알았어. 오미 말을 믿을 게. 믿을 만하네. 네가 좀 측은하며 가여워 보이기 시작하네.
믿어줘서 고마워. 나는 남편처럼 사랑했던 그가 죽자 허망한 마음에 망자를 대왕으로 추존했지. 하지만 난 여왕으로서의 권력의욕을 잃었어. 그러니 조정은 귀족들 저마다 더욱 하고 싶은대로 어지러워졌고 정국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지. 전국에서 도적들이 더욱 창궐하고 지방 호족들이 더욱 득세했어. 특히 선대 두 여왕이 다진 기틀 위에서 우리가 통일을 이룩했을 때 멸망한 옆 나라와 윗 나라가 다시 나라를 되찾겠다며 더욱 설쳐댔어. 이때 내가 정신 차리고 아주 세게 나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어. 내 능력부족이기도 했고 수명을 다한 나라의 운명이기도 했어. 그 어느 막강한 권력자라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런 와중에 나에 대한 악소문은 더욱 해괴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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