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93)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4장 송도와 진주여자①

이득수 승인 2024.02.26 07:00 의견 0

18. 송도와 진주여자①

신평의 친가로 제사를 모시러갔던 영서네가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 도착하자

“일찍도 왔다. 길도 안 막히더나?”

영순씨가 묻자

“길이 막혀 한 시간 반도 더 걸렸지.”

“그럼 점심 숟가락 놓고 바로 왔단 말이가?”

“그럼 우짜노? 우리 어머니가 어서 갔으면 하고 노골적으로 눈치를 보이는데.”

“아들이야 그렇다 치고라도 우현이네 그러니까 사위까지 등 떠밀어 보냈나?”

“그렇지 뭐. 원래 장모와 사위 간에 정이 없어 손서방이 점심 숟가락 놓자말자 바로 일어서더군.”

“저런 장모사랑이 사위라고, 씨암탉은 못 잡아 줄망정...”

아무리 서로 조심스러운 안사돈이라고는 해도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우선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아들 도연씨의 딸, 하나밖에 없는 친손녀지만 명절에 만나도

“왔나?”

한 번 안아주고 돈 한 푼 주고나면 끝이었다. 젊어서 쭈욱 직장에 다녀선지 살림살이나 아이 보는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 주 내내 아이를 보는 영순씨가 무슨 급한 일이 생겨 하루만 아이를 봐달라고 해도 그만 볼이 부어 괜히 심통을 부린다고 했다. 요즘은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는 시대이니 당연히 자기는 신경 쓸 일이 없다는 투로.

그렇다고 외손자 우현이한테는 잘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학까지 나온 간호사 자기 딸을 겨우 미용사에게 시집보낸 것이 너무나 원통해 처음부터 사위를 탐탁찮게 여긴 것이 계속 이어진 모양이었다.

“그래 다 내 보내고 너거 시어마시는 뭐 하는데?”

“뭐 하기는 우리가 방문도 채 닫기 전에 자부동부터 폈겠지.”

“자부동이라? 그라면 고스톱 판을 벌린단 말이지.”

“그럼. 옆집에 사는 이모에 혼자 된 외숙모의 기본멤버 셋에다 요새는 미국의 큰아버지 내외까지 왔으니 선수 다섯 명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지.”

“저런!”

신평시장 한 가운데 정책이주 당시의 좁아터진 여섯 평짜리 건물이지만 명색 3층인지라 1층은 가게로 세를 주고 2,3층은 자신들이 썼는데 이제 남희씨가 쓰던 방을 세까지 놓아 집세가 꽤나 짭짤하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퇴직한 안사돈 김금자여사가 자연스레 찾은 일거리가 가만있어도 찾아오는 시장안의 30년 된 이웃들, 이제 다들 밥걱정을 놓고 하루하루가 심심한 중늙은이들이 모여 고스톱 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자식도 손자도 같이 살지 않는 안사돈의 집에 아침부터 멤버들이 모이면 금자씨는 동전을 바꿔주고 라면을 끓여주는 잔심부름을 하면서 간혹 선수가 부족하면 대타로 뛰기도 했다. 비록 점당 백 원이지만 아침나절부터 자정이 되도록 판을 벌여 천원을 먹으면 백 원씩 떼는 개평이 하루 10만원을 넘어 라면 값 소주 값을 빼고도 상당히 남아 오히려 직장 다닐 때 보다 수입이 짭짤한 날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알뜰하기보다 모질게 모은 돈이지만

“너거 요새 돈 급한 일 없나?”

굳이 어려운 일이 없어도 오로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돈천만원씩을 벌써 두 번이나 내 놓았다는 것이었다. 아직 명절이라 찾아온 자식이나 손자들 때문에 집을 못 나오는 다른 멤버들 대신 가족끼리만 다섯 명의 풀 티오를 채울 수 있으니 그 또한 묘한 조화였다.

[그림 = 서상균]

세상의 집안관계 그러니까 친가나 처가의 구성이 조금 한미하거나 한쪽으로 기울거나 엉뚱한 경우도 있겠지만 사위 김서방의 경우는 갈수록 이상한 경우였다. 처음 혼담이 나왔을 때 본관은 어디며 아버지의 고향은 어디며 선산은 어디에 있는지 또 4촌6촌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열찬씨가 물었을 때 사위 될 도연씨가 뭔가 자신이 없어 쭈뼛거리는 자세로

“본관은 김해김씨이고 아버지는 서울서 태어나셨고 선산은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 산자락에 있습니다만 자주 찾아가지 않아 찾아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아버님형제는 4남 3녀가 되는데 제 아버지만 빼고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서 뉴욕을 비롯해 미국전체에 퍼져있고 그 중 몇 분은 돌아가시고 특이하게 100세에 가까운 제 할머니께서 아직도 생존해서 양노원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자네 집은 왜 이민가지 않았는가?”

“예. 아버지가 베트남에 근로자로 갔다 온 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점점 신체가 위축되고 지능이 떨어져 취업이민이 어려운 데다 어머님께서 한국을 떠나기를 싫어해서 말입니다.”

“그럼 지금도 큰아버지나 4촌이랑 연락이 되는가?”

“예. 맨 큰아버님이 선산을 지킨다며 끝까지 한국에 남았는데 십 몇 년 전 사업이 기울어 미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명절 때 자주 전화가 옵니다.”

했다. 처제 영옥씨를 덜렁 재미동포와 결혼시켜 졸지에 사람하나만 잃었지 미국에 가면 잘 산다는 이야기도 다 사람 나름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보다 더 지지리 궁상이라는 걸 잘 아는 열찬씨가

“그래? 그럼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는 없겠네?”

하자

“예. 제가 미국에 갈 능력도 없지만 어머님도 싫어하고 또 미국에서도 한국에 저희 집이 남아 선산을 지키는 일을 굉장히 고마운 일로 여겨 들어간다는 말을 할 처지도 아닙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봐라, 됐제?”

영순씨에게 그만 승낙하라는 눈짓을 하자

“내가 뭐 아는 기 있능교?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하며 끝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 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불만이라는 사윗감의 조건중 하나가 학력이 자기딸보다 떨어지는 경우라고 하듯 슬비가 나온 동아대보다 좀 처지는 사립대를 나온 도연씨와 결혼을 하면 머리가 덜 좋은 아이가 태어나 속을 썩일 거라는 불만과 함께 베트남에 근로자로 가서 교통사고로 몸을 다쳤다는 도연씨의 아버지가 혹시 그 말썽 많은 제초제의 피해자가 아닌지 의심을 거둘 수가 없는 판에 시가집의 문벌마자 형편이 없어 무엇 하나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비록 우리 아버님은 지금 몸이 불편하고 우리 어머님이 회사에 다니지만 저와 간호사인 제 동생 남희와 셋이 똘똘 뭉쳐 어떻게든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왔고 이제 약간의 저축도 있습니다. 절대로 슬비를 고생시키지는 않겠습니다.”

해서 자신도 객지에서 혼자 고생을 하며 총각시절을 보낸 열찬씨가 그래도 형편이 그 당시 자신보다는 낫다 싶어 승낙을 했는데 갈수록 뭔가 조금씩 이상한 점이 나타났다. 바로 이웃에 친정오빠의 집이 있어 형부와 언니와 안사돈 셋이 늘 붙어 다니며 잘 지내는 것은 든든했지만 결혼한 지 한해가 좀 넘어 도연씨의 큰아버지가 귀국해서 한국에서 칠순잔치를 한다고 해서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영순씨의 차로 식장인 뷔페식당에 도착하자 키는 작아도 당당한 체구의 곱게 늙은 노인이 다가와 인사를 하고 부인인 60대의 상당한 미인도 함께

“아이구, 반갑습니다. 제가 도연이 큰아버지입니다. 우리 도연이를 잘 보살펴주어 감사합니다.”

아주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식장에 참석은 해도 걸음도 서툴고 얼굴도 좀 이지러진 도연씨부친 밭사돈이

“사, 사, 사돈 오, 오 오셨습니까?”

수없이 연습했지만 막상 잘 되지 않은 발음으로 인사를 하는 걸 역시 정중하게 받고 자리에 앉았는데

“오늘 가로수에서 낙엽이 지고 가로등이 다정하게 빛나는 가을밤 시인의 가슴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가득하겠습니까?”

웬 40대 사내가 열찬씨의 이름을 호명하며 박수를 치게 했다. 슬비의 결혼식 날 미국에서 참석 못 한 백부대신 처조카인 자신이 참석해 열찬씨의 수필집을 받아 읽고 감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7순을 맞은 주인공의 인사에 이어 도연씨 내외가 자리를 깔고 앉아 술잔을 올리며 절을 하는데

“아직 아이는 없지만 지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답니다. 내년 봄에는 아마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나 꽃처럼 예쁜 공주가 태어날 것입니다.”

하고는 식사를 하면서 돌아가면서 노래를 한곡씩 하는데 사돈대표로 열찬씨가 무대로 나서자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안사돈이

“아이구, 사돈! 나도 같이!”

튀어나오자

“동서는 나만 .빼놓고.”

가슴에 꽃을 단 백모도 튀어나와 아주 열찬씨의 노래 최성수의 <동행>에 맞추어 부드럽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뭔가 좀 평범하지는 않다 싶은 사돈댁에 처음으로 진짜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은 일본에 산다던 처이모 그러니까 안사돈의 바로 손위언니가 영구귀국을 하여 신평의 바로 이웃에 방을 얻은 것이었다.

일흔이 다 되도록 일본에서 무얼 했는지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일절 말을 하지 않은 이모는 특별하게 벌어놓은 재산도 없는 모양으로 달랑 여행가방하나에 옷가지 몇 벌을 넣어 와서 방 한 칸, 부엌 한 간의 거처를 마련하고 시장에서 이불 몇 개와 식기 몇 개를 사고 여동생 둘에게 간장 한 병과 된장과 고추장 약간을 얻어 아주 간단하게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는 날이 새기 바쁘게 혼자 사는 여동생 집에 찾아와서 역시 날마다 시누이 댁을 찾아오는 도연씨 외숙모와 셋이 어울려 점당 백 원의 점 백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다 차츰 시장골목의 심심한 노파들, 젊어서는 제법 크게 장사도 하고 해서 지금도 용돈도 넉넉하고 씀씀이가 좋은 사람들이 모여 날마다 장이 서는 고스톱 방이 되고 말았다. 1/10을 떼다 보니 자연 하루에 몇 만원씩 잃는 사람도 생겨 가끔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관이 출동하기는 해도 겨우 점 백 고스톱인데다 다들 나이든 노인네 들이라 크게 문제는 되지 않고 겨우 화투장이나 압수해가는 정도였다.

거기에다 지난번에 한국에서 처가식구들이 베푼 칠순잔치를 하고 돌아간 도연씨의 백부가 영구귀국을 했다. 장님인 자신이 다 늙은 지금부터라도 선산을 돌보고 제 태어난 땅에서 죽어 묻히기 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이제 미국이나 한국이나 노인에 대한 기초생활보호비나 노인연금이 비스한 판에 굳이 미국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보다 10년 가까이 젊은 부인이 운영하는 손톱청소를 하고 멋을 내는 네일아트를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도연씨와 어머니가 짐작은 해도 입 밖에 꺼낼 일은 아니었다. 더더욱 옛날 사업실패로 미국으로 도피하다 시피 떠난 후유증, 거래관계상의 은원관계나 빚으로 부터도 이제 자유로울 만큼 세월이 흐르기도 한 것이었다. 부인이 다 늦게 미국에서 만난 사람인 것으로 보아 한국이나 미국에 본처나 자식들이 있을 것도 같았지만 아무도 도연씨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고 조카 도연씨와 이제 갓 태어난 아이 영서에게까지 몹시 집착하는 것으로 보아 자식이 없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고국이라도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졸지에 세 사람의 어른을 더 모시게 된 슬비가 차마 노골적인 불평은 못해도 뭔가 못 마땅한 표정이 되자

“그래 우짜겠노? 내 손에서 뭔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도연씨도 그저 머리나 긁적거릴 뿐인데

“젊어 열심히 살아 부지런히 세금을 낸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 갑자기 조국이란 이름을 빙자해 공짜로 먹고살 속셈으로 귀국을 하다니, 그렇다고 오지 못 하게 막을 수도 없고...”

열찬씨내외는 좀 더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하여간 시집살이 우리 슬비 만 한 사람도 없지.”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는 이유는 비록 맞벌이라고는 하지만 월급이 얼마 안 되는 중소기업에다 근래 운영난으로 문을 닫느니 마느니 하는 판에 명절만 닥치면 시어머니와 친정부모 셋에 구포의 외할머니 봉투 넷을 마련하다 이제는 백부와 백모, 혼자 된 이모와 외숙모까지 무려 여덟 개의 봉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슬비가 매번 내색을 않은 것은 원래 천성이 좀 대범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 남편 도연씨가 늘 아내의 눈치를 보며 너무나도 정중하고 싹싹하게 처가식구를 대하는 바람에 무어라 말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안사돈 김금자여사는 살림살이나 생활태도가 너무 소탈한 정도를 넘어 거의 대부분을 생략하고 그저 안 굶어죽을 만큼만 밥을 해먹고 정 배가 고프면 빵이나 과자, 시장골목의 삶은 감자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는 성격이라 명절이 되어도

“요즘 세상에 제사상이라고 크게 차릴 것이 있나? 내가 간단히 기본음식만 준비할 테니 영서애미 너거는 집에서 편하게 자고 아침에 넘어오너라.”

해서 명절이라 조상을 위한 튀김 한 번 붙일 일도 없는 며느리가 소박해도 너무 소박한 제사를 지내고 아침을 먹으면 “영서 외할머니 기다릴 텐데 차 막히기 전에 어서 연산동으로 넘어가지.”

하는 바람에 연산동 처가에서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서울 정석이네를 비롯한 여섯 식구가 하룻밤을 지내고

“이거, 원! 내가 잘 하는 건지 모르겠네.”

구포처가를 가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열찬씨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미 예순이 넘은 사람이 사위와 며느리에 손녀들까지 무려 여덟 식구나 거느리고 처갓집에 가는 것이 영 어색한 것이었다.

“보소. 당신 안 가면 우리 엄마가 하루 종일 기다릴 텐데. 또 가서방 올 때까지 기다리자면서 다른 사람 밥을 굶길 긴데.”

영순씨가 모처럼 아주 낮은 자세로 엎드리며

“정 당신이 안 가면 이튿날 엄마는 물론 성아, 성신이, 갑린이네 식구들까지 몽땅 당신 보러 온다고 우리 집에 몰려오면 내가 죽을 판 아잉교?”

하는 판이라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