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이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은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도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입니다.” -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테헤란에서의 죽음-
베이비 부머들(baby boomers. 전후세대 혹은 1955년생~1964년생) 대부분은 오로지 물질적 안전을 위해 곁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좌우 돌아보지 않고 전방으로 질주했다. 그 이후의 엑스(X)세대(1965년생~1980년생) 또한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두 세대들은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면서 부의 부피가 커져가는 것으로 ‘성공’이란 단어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덤으로 소비가 주는 쾌락으로 삶에 대한 만족감을 음미하기도 했으리라.
이들의 성공방정식은 일차방정식처럼 간단했다. 가파르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모든 가치를 접어두고 일만 열심히 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가치를 희생해도 ‘일한다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혜택을 입은 사람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잡는 것으로 평생을 보장 받았다.
이제 베이비 부머들은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었다. 엑스세대들은 부모가 되었다. 손(孫)세대와 자식세대가 맞은 21세기 현실은 어떠한가? ‘먹사니즘’이란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앞선 세대들이 오직 전방 질주로 쌓은 부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즐기니즘’을 노래해야 정상이지 않은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부의 불평등’ 문제가 있다. 상위 십 몇 %는 즐기니즘에 도취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니 ‘갓물주’란 신조어가 횡행하는 것은 그 희소가치를 방증한다. 곧, 누구에게나 팔을 뻗치는 범위 내에 있는 대상이라면, 이런 용어 자체가 생기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사회의 허리세대인 엠제트 세대(M세대:1981년생~1996년생+Z세대:1997년생~2012년생) 대부분이 맞은 현실은 ‘먹사니즘’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금수저나 ‘신 위의 건물주’인 갓물주는 우리 사회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로또 복권을 사듯 누구나 불로소득을 원한다. 그러나 금수저나 갓물주에 대한 부러운 시선은 사회병리 현상일 뿐이다.
금수저는 세대로 이어지는 이전소득, 불로소득일 뿐이다. 갓물주가 얻는 이익은 지대추구(rent seeking)의 결과물이다. 임차인의 소득을 넘겨받아 자신의 부에 귀속시킨다. 당연히 사회 전체의 부를 늘리지 않는다. 금수저나 건물주의 소득이 일정 경계를 넘으면, 노동소득자의 노동의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어디까지나 사회의 근간은 노동소득자이다. 이전소득이나 불로소득은 노동소득의 떡고물일 뿐이다. 떡보다 떡고물을 부러워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행운을 폄훼할 필요까지야 없지만, 우리 사회 경제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이유는 충분하다. 적어도 그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사회적 대의와 개인적 이익이 충돌할 때는 대체로 개인적 이익을 선택한다. 이기적 본능은 인간계발의 인센티브이기도 하니, 어떤 틀 안에서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기’(利己)를 도모한 결과가 결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어느 맘카페에서 무기명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 최고 인재들이 어디로 가야 하나?”란 질문에 75%가 넘는 답변이 ‘이공계’를, 9%만이 의대를 꼽았다. 한데 “내 아이가 내신이나 모의고사 1등급 초반이라면?”이란 질문엔 80%가 ‘의대’를 선택했다.
‘안정된 고소득 직업’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누가 모르랴. 마는, 그 엄마의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조선 시대 의원은 역관, 지방관아의 향리나 서얼(양반의 첩 자식)과 같이 중인에 속했다.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을 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말이다.
먼 과거 조선시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조선 시대 100년의 변화는 20세기의 10년의 변화에도 못 미친다. 20세기의 10년의 변화는 21세기의 1년의 변화에도 못 미친다. 생수를 사먹으며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현실이 얼마나 되었는가!
현재 의대에 입학하는 자식들이 20년 30년 후에도 의사가 안정된 고소득 직업일까? AI가 선도하는 의료계에서 의사는 단지 지금의 간호사만도 못한 의료 보조자에 머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혁신이 가속화하는 시대에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은 결코 나침판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인이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도망한 곳이 자기가 죽을 ‘테헤란’이었다. 좌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여 당도한 곳이 ‘먹사니즘’이다. 사회적으로 그렇다손 치더라도, 베이비 부머와 엑스 세대들이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곳에 다다랐는가?
무엇보다 대표 감정은 헛헛함, 혹은 허무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속도보다는 방향에 대하여 자기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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