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모로써 속일 수 없다(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따르게 되고(得其心則服之),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등을 돌린다(不得其心則去之).
등 돌림과 따름의 차이는(去就之間)
털끝만큼도 되지 않는다(不容毫髮焉). -정도전-
삼봉 정도전(1342~1398)은 조선 개국 후 술자리에서 종종 이런 말을 했다.
“한나라 고조(유방)가 장자방(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일 뿐이야!”
태조 이성계를 한 고조에, 삼봉 자신을 장자방에 비유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한 고조에, 자신 혹은 어떤 세력을 장자방에 비유하고 있지는 않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나(혹은 우리)를 쓴 게 아니라, 내(혹은 우리)가 윤석열을 쓴 것일 뿐이야!”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이 지난 16일 한국방송(KBS)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게 과연 진정한가.”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다는 망발인가.
이 말에 대해 한민수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가해자가 사과를 거부하면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정의관인가? 이런 망언이 어떻게 대한민국 외교·안보 정책을 컨트롤하는 국가안보실 1차장의 입에서 나올 수 있나. 김태효 차장의 망언은 윤석열 정권이 친일 매국 정권임을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김보협 조국혁신당 수석대변인도 ‘중꺽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는 들어봤어도 중일마(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는 처음이다’는 제목의 논평을 내어 “이종찬 광복회장은 최근 ‘용산 밀정’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제 그 밀정이 누구인지 분명해지는 것 같다”고 김 차장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김 차장은 학자 시절부터 줄곧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강조해 왔다. 2012년 7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추진하다 ‘밀실 논란’으로 사퇴한 바 있다. ‘일본과의 안보 협력’ 앞에 ‘과거사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면,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윤석열 정부 들어 국가안보실장은 벌써 4번째다. 1년을 넘긴 실장이 없다. 김태효 차장만 붙박이다. 국가안보실장엔 아무나 와도 상관없는 구조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일본에 더 큰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일본은 방위비 부담을 떠안고서라도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 이처럼 미·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나, 한국은 미·일 동맹의 하부구조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편승해, 이를 주도하는 자가 바로 김태효 차장이라고 다들 이야기한다. 김 차장은 2007년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선언’에도 이름을 올렸다.
“윤석열 정부 인사가 무척 힘들다. 웬만한 사람은 안 하려 든다. 5순위·6순위까지 내려가는데, 요즘에 십 몇 순위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뻔뻔하거나 반드시 이뤄야 할 미션이 있는 사람들만 하려 든다.”고 국민의힘 관계자가 실토했다고 한다.
정신이 온전히 박힌 사람이라면 가라앉는 배에 누가 승선하려 하겠는가. 마는, ‘뻔뻔한 사람’도 있고, ‘미션을 지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미션? 김태효 차장의 미션이 무엇일까? 두렵지 아니한가.
인재풀이 바닥난 윤석열 정부는 정권 지키기에만 급급해, ‘극우’ ‘친일’ 세력에 기대고 있다. 이승만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외교 문제는 불가역적이다. 오늘의 잘못을 내일 되돌릴 수 없다. 한 줌 사적 이익이나 야욕을 위해 과거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외교안보를 망쳐 놓으면, 그 후과는 고스란히 애먼 국민이 짊어져야 한다.
절대 권력을 한 손에 쥔 왕조시대의 삼봉도 백성들의 인심에 왕조의 성패가 좌우됨을 알았다. 그러나 왕조시대이기에 단지 ‘등 돌림’이란 완곡한 표현을 썼다. 국민주권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위임 받는 자’가 국민의 뜻을 저버림을 넘어 배신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고 자명하다. ‘위임 받은 자’에 대한 위임을 철회하고, 그 자와 그 자에게 복무한 자들까지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은 무너지기 전까지는 난공불락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다. 그렇다고 그냥 그날이 방문하는 것은 아니다. 정중동(靜中動)! 각기 나름대로의 작은 행동이 모인 결과인 것이다.
방관으로서는 역사의 퇴보를 막을 수 없다. ‘선량한 방관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몇 번이나 인용한 마르티 니묄러 목사의 금언을 다시 한 번 더 새긴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 / 마르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민당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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