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한국인의 자격과 적자생존

조송원 승인 2024.08.20 10:17 의견 0
[사단법인서은문병란문학연구소 유튜브]

독일은 귀화시험에서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면 어떤 처벌을 받는가?”라고 묻는다. 독일에서는 나치의 만행을 부정하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독일 내무장관은 “과거사 책임은 독일 정체성의 일부이며, 이런 가치를 공유하지 않으면 독일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파리올림픽 탁구 동메달리스트 전지희가 한국 귀화시험에서는 어떤 질문을 받았을까? 한국의 귀화시험은 국적법에 규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곧, 한국인이 되기 위한 자격시험인 셈이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은 후보자 면접 당시 ‘일제 식민지배 때 한국의 국적은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일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귀화시험에는 ‘광복절의 의미를 설명하라’는 질문이 단골로 나온다. 이 질문에 전지희가 김 씨의 말대로 ‘일본 국적을 잃은 날’로 대답했다면, 귀화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귀화시험에 합격하면 국정증서를 받는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서시’ 기념비 앞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처럼 일제 때 순국한 선열의 얼이 깃든 곳에서 수여식이 열린다. 지난 3월 수여식은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거행됐다.

항일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인 정체성을 표상한다. 이에 대한 자긍심은 ‘한국인의 기본 소양’이다. 한데도 이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창궐하고 있다. 왜 이 꼴이 났을까?

‘광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光復’의 ‘光’을 ‘빛’으로 해석하여 ‘빛을 되찾은 날’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사전에도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되찾음’으로 설명한다. 맥락에 기댄 잘못된 해석이다. 어법상 이런 뜻으로 해석되려면, ‘동사+목적어’ 순서로 ‘復光’이 되어야 한다.

‘광복’에서 ‘광’은 서술어 ‘복’을 꾸미는 부사어이고, ‘나라와 주권’은 생략된 목적어이다. 따라서 ‘빛나게 (나라와 주권을) 회복함, 되찾음’의 뜻이다. ‘빛나게’에 존중의 뜻을 담아 ‘영예롭게’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광복절은 ‘영예롭게 나라와 주권을 되찾음을 기념하는 날’로 풀이할 수 있다.

축자적(逐字的) 해석이 어쨌건, 광복이라는 단어에는 ‘빛/어둠’ ‘영예롭게/수치스럽게’란 대립쌍을 전제한다. 곧,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그 이전 일제강점기는 ‘어둠이었고, 수치스러운 날’이었다. 그 이후는 ‘빛이고 영예로운 날’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란 ‘민국’(民國)의 국민에게는, 해방은 ‘빛이고 영예로움’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신민’(臣民)으로 자임한 친일부역자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어떤 날이었을까? 그들에게 그 날은 ‘어둠이고 수치스런 날’이었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200만 명 이상의 친독일부역자를 기소하여 이 중 99만 명을 재판에 넘겼다. 6,70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26,000여 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처벌 받지 않은 친독부역자들도 가혹한 여론의 돌멩이를 맞았다. 독일군과 잠자리를 한 여성들은 강제로 삭발을 당한 채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도 부역자들에게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희망을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일’(알베르 카뮈)이라며 청산을 강행했다. 그 결과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샤를 드골)이라 자신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

우리는 친일부역자 청산은커녕, 되레 악례(惡例)만 남겼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된다. 반면 친일부역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물론 프랑스와 한국과는 강점당한 기간(4년 대 35년)에 큰 차이가 있다. 국제정세도 한국에 불리했다.

우리 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기록되는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해에 태어난 아이는 해방될 때는 35세가 된다. 곧, 조선의 신민, 임시정부의 국민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일본제국의 신민임을 교육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1935년생인 문병란의 시, <식민지 국어시간>을 읽어보자.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히노마루(일본 국기)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한국인 비칭)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더럽다)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선생)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후략)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우등자가 아니라 그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곧, 적자생존(適者生存·survival of the fittest)이다. 인간도 생물종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제에 굴종, 아니 식민지배에 적응하는 게 정당하다는 형식논리가 성립될까?

인간에는 자연환경뿐 아니라, 인위적인 사회환경이라는 것이 있다. ‘짐승 같은 놈’이 욕이 되는 것은 인간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사회환경에도 적응해야 함을 방증한다. 인간은 인간답기 위해, 사회화를 통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을 내재화한다.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불의에 항거하고’, 생존을 위협 받는데도 정의나 어떤 가치를 위해 고난을 자처하는 게 인간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행동준칙으로 강제하지 않더라도 그런 바람직한 행위가 상찬 받는 사회분위기(에토스)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짐승 같은 놈’이 승자가 되고, 우글거리는 참혹한 사회환경이 조성되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당시의 사회환경에 순응하는 것, 곧 ‘생계형 친일’은 지금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웃과 민족과 조국을 배신하고 팔아먹으며 일제에 붙어 재산을 축적하고 작위를 받는 등 일신의 영달을 꾀한 친일부역자들의 청산을 얘기하는 것이다.

광복 직후는 물론 거의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도 ‘친일부역자 청산’ 작업은 중요하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희망을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의 범죄를 처벌 받지 않아, 오늘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 곧 뉴라이트(신보수)들이 등장하지 않은가!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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