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73) 봄 한 채 - 이서화
조승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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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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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한 채
이 서 화
부모님이 다 쓰고 간
낡은 집 틈으로 말벌들이 분주히 드나든다
살면서 봄날 다 쓰고
여름과 가을 겨울까지 쓰고 간 집
그 집 어느 구석에 아직도
봄이 남아 있어 벌들이 한철일까
보이지 않는 곳에 그들만의 성이 따로 있는 듯하다
무뚝뚝한 아버지
살뜰했던 엄마 적금 들 듯
집 어딘가에 봄을 조금씩 아껴 두었던 것은 아닐까
119를 불러 떼어 내자는 말들이
벌들의 날갯짓 소리처럼 분분했지만
생전의 집주인들이 조금씩
아껴 둔 봄이려니
그냥 두기로 한다
좁은 틈 저쪽엔 지금
온갖 꽃들이 활짝 핀 봄날이
한창 만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초가을 방바닥도 미지근해진다
-시집 시시콜콜하든 구구절절이든, 여여시 04, 쏠트라인)
시 해설
집 한 채를 두고 부모님이 알뜰하게 쓰셨다. 집이 낡도록 오래 사용하신 그 집 낡은 집 틈으로 말벌들이 드나든다. 건강하시던 봄부터 차분히 정리하신 여름과 가을, 겨울까지 살다가 떠나신 뒤에는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라서 아무것도 안 남기신 줄 알았는데 자식들 따스하게 잘 살라고 봄을 유산처럼 남겨주신 것이다. 그 따뜻한 구석을 공유하려고 벌들이 거주하고 있다. 좁은 틈새 안에 그들만의 성城을 따로 숨겨두고 있는 듯하다.
잘 모르지만 부모님과 생전에 무주택자 특례 계약을 맺었을 수도 있겠다. 봄이 없으면 계약이 성립 안 되는 것이니까 ‘무뚝뚝한 아버지는 살뜰했던 엄마 적금 들 듯’ 보이지 않는 곳에 은밀히 ‘봄을 조금씩 아껴 두었’다가 벌에게 양도하신 것은 아닐까 라고 시인은 상상해 본다. 어머니의 묵시적 동의도 있었을 것이므로 ‘119를 불러 떼어 내자는 말들’은 무시하기로 했다.
‘생전의 집주인들이 조금씩 아껴 둔 봄’이라 생각하고 그냥 두기로 한 것이다. 아껴 둔 봄은 부모님의 사랑이고 그리움을 상징한다. 부모님 덕분에 ‘좁은 틈 저쪽엔 지금 온갖 꽃들이 활짝 핀 봄날이 한창 만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 계절이 지나고도 그 온기는 ‘초가을 방바닥도 미지근’하게 해 준다. 봄 한 채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이유이다.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구)포에지창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취미생활로는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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