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 서상균]

21.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9)

이래저래 맘이 안 편해 아이를 핑계로 돌아간 동생을 뒤로 하고 열찬씨부자는 다시 명촌으로 향했다.

남천내 강둑을 따라 물문껄과 방천묵을 지나 자동차가 부리시봇띠미를 넘자

“아버지, 어느 방향이지요?”

정석씨가 묻는데

“조금만 더 직진. 한참 가다 자동차면허시험장이 나오면 좌회전이야.”

해놓고는

“니가 명촌을 그렇게 자주 오고도 길을 모르나?”

“예. 주로 엄마가 운전해서 와서 전 신경을 안 써서요.”
“그렇구나. 한 다리가 천리라고 내게 애틋한 명촌누님도 네게는 4명의 고모 중 한 명,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수많은 친척집 중 하나이겠구나?”

“예, 그렇지요. 뭐.”

“그런데 말이야, 같은 형제 중에서 유독 신경이 쓰이는 사람도 있고 그냥 덤덤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상대가 나를 절절이 사랑하고 챙기는데도 당연한 것처럼 무심히 넘기는 형제도 있지.”

“그런 것 같아요. 김해고모는 철저히 아버지를 챙기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신 신평고모를 알뜰히 챙기는 것 같고 또 명촌누님한테 특히 집착하는 것 같이 보여요.”

“그렇지. 우리 형제가 모두 7남맨데 그 처지와 역할이 다 달랐지. 먼저 장남인 영주형님은 너거 할머니가 그렇게 강조하던 원질, 말하자면 왕실에서 국본(國本)이라고까지 부르며 절대시하는 세자취급을 했지. 더구나 공부를 잘 하지만 늘 돈이 부족해 고학을 하고 밥을 굶고 그 위에 몸까지 약하니 그 고임이 절대적이었지. 어쩌면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6남매보다도 부모님이 생각하는 애착은 더 강한 셈이었지.

다음은 큰누님의 경우인데 명색 큰딸이라 돌아가신 할머니는 물론 큰어머니에게까지 나름대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마음바탕이 워낙 순한데다 무엇 하나 바쁘거나 급하거나 답답한 것이 없는 성격이라 무얼 시켜도 잘 하려들지 않으니 그만 열외가 된 것이야. 나중에 태어난 막내고모도 성격이 그와 비슷했는데 부모로부터 관심이나 사랑도 적게 받았지만 그걸 뭐 애통해하거나 공부든 돈벌이든 하나 못해 남자든 아무 관심도 열정도 없이 덤덤히 살다보니 부모에게 도움도 안 됐지만 속 썩이는 일도 없었는데 재미있는 건 두 사람 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농사꾼에게 시집갔지만 큰 누님은 참으로 애가 많아 젊어서는 전처자식을 키우고 말년에 장바닥에서 반티장사를 한데 비해 막내는 논 두마지기에 닭 스무 마리로 시작한 살림이 장촌마을에서 손꼽히는 대농에 알부자로 변했지. 말하자면 두 사람은 다 무색무취, 그야말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집안이나 형제간에도 큰 역할이 없었지.

그 다음에 너거 막내삼촌 백찬이는 아버지가 쉰여섯, 어머니가 마흔넷에 낳은 늦둥이 눈물상주라 그냥 불쌍하다, 가엾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언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외로운 사춘기를 보내고 성년이 되어서는 영주의 형님집에 근거를 두고 군대생활을 하는 등 고독한 청년기를 보냈지만 다행히 현대자동차에 취직해 생활이 안정되고 알뜰한 아내를 만나 제 앞가림을 잘 하며 살다가 지금은 수원으로 제사를 지내러갈 때 형제들을 싣고 가는 등 나름대로 역할을 잘 하고 있지.”

“예. 아버지, 이번엔 왼쪽방향이지요?”

“그래. 이제 다 와 가구나. 저 쪽 우전방에 커다란 기와집하고 빨간 2층집이 보이지. 거기가 고모집이야. 조금만 더 달려 대밭머리에서 우회전이야.”

“예.”

하면서 어느 새 논길로 접어들어 둘째 조카 또식씨 집 앞의 사거리에 차들 대고 단감 밭 울타리를 돌아

“누님 있능교?”

불러도 대답이 없어 열린 현관문을 열고

“할마시, 설 잘 쑀능교?”

하며 신발을 벗는 순간

“야야, 왔나? 정석이도 왔네.”

키가 작은 금찬씨가 나오자

“외삼촌 오셨어요?”

조카 또식씨가 인사하자 뒤에 선 질부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하더니

“와! 연세대 대름이 오셨네. 애들아, 인사해라. 부산 할아버지 하고 서울에 삼촌 오셨다.”

하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할아버지.”

“삼촌!”

인사를 했다. 순간

“어머니, 저는 친정 갈 준비 좀 하려고...”

“저는 자동차 좀 세차도 해야 되고...”

하면서 내외가 빠져 나가자 고모에게 세배를 하고 일어서는 정석씨에게

“삼촌, 서울 삼촌!”

아이들이 정석씨 주변으로 몰려 신기한 듯 바라보는데

“이 놈들아, 너거도 세배를 해라. 그리고 몇 살 먹는 누군지 신고도 하고.”

하며 열찬씨가 소파에 앉자 동시에 큰절을 하고

“큰딸 열여덟 박지희입니다.”

“그래 고등학생이가?”

“예. 경의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하자 키가 멀쑥한 사내아이가

“장남 상북중하교 3학년 박지만입니다.”

“그래 잘 생겼네. 그 눈웃음이 예사가 아니네.”

하자

“길천초등학교 5학년 박지은입니다.”

덩치가 고2 제 언니보다 더 커 보이는 뚱뚱한 아이가 인사를 하는데 뜻밖에도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그래 니는 살만 빼면 미스코리아다.”

“꿈동산 유치원 개나리반 일곱살 박예은입니다.”

앳되기는 하나 역시 보통덩치가 아닌 막내가 인사를 해

“그래. 다들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바지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하나씩을 주며

“큰놈들은 이해해라. 할아버지는 조카와 손자가 너무 많아서 무조건 만원씩이다.”

하는데

“감사합니다.”

모두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명절이라고 용돈을 받을 곳도 별로 없구나 싶은데

“예들아, 시간 없는데 안 나오고 뭐 하노?”

아이들어머니 최집사의 목소리가 쨍하고 울리면서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우짜노? 우리 정석이 오랜만에 왔는데 제사를 안 지내니 음식도 술도 없고 또 며느리도 없고...”

금찬씨가 멋쩍어하는데

“됐심더. 그냥 커피나 한잔 주소.”

하고
“일식이 내외랑 식구들은 다 어데 갔소?”

“아침 먹고 저거 아부지 산소 갔다와서 준식이는 부산 처가 간다고 가고 일식이는 저거 처남 만나서 죽은 처형 산소 간다고 가고 또 우리 현욱이는 가시난가 머시만가 친구 만나러 가고 작은 놈 정우는 아직 제대 안 했고.”

“그렇지만 맏며느리가 명절날 집을 비우면 쓰나? 내 같은 외삼촌이야 둘째 치더라도 큰손인 현주신랑이 오면 우짤라꼬?”

“몰라. 지 알아서 할 일이지. 전라도 사람들은 사위대접을 우째 하는지 모르지만 지가 아무 음식준비도 안 하는 걸 내가 우짜노?”

“아니, 위서방이 누님 사위지 어데 천집사 사윙교?”

“그렇지만 살림 사는 지가 해야지. 살림 손 놓은 지 십년도 넘은 내가 할까?”

“그라면 위서방도 오고 너거 시누이도 오고 알라도 온다고 먹을 것 좀 준비하라고 누님이 시켜야지요?”

“저거가 안 하는 것을 내가 와? 평양감사도 지 싫으면 안 하면 그 뿐이지.”

“그 기 아이지. 누님이 안 할 말은 하고 할 말은 안 하니 집안이 질서가 없지?”

“마, 시끄럽다. 그래 잘 하면 니가 와서 하든지!”

“...?”

기가 찬 열찬씨가 벌쭉 웃었다. 현주씨가 재혼한 뒤 위서방이랑 처음 설 명절에 친정에 왔는데 큰오빠 일식씨와 올케 천집사는 아침부터 전라도 친정에 간다고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나고 텅 빈 집에서

“왔나?”

한 마디를 던지고 밥 줄 생각을 않는 제 어머에게

“엄마, 올캐하고 오빠는?”

“전라도 친정 간다고 아침에 나갔다.”

“위서방 오는 줄 알면서 밥도 안 해놨나?”

찬바람이 쌩 도는 부엌을 둘러보며

“제사를 안 지내니 뭐 채릴 끼 있나? 아침에 명절예배 드리고 삼겹살 꿉어 묵었다.”

“그라면 고기는 좀 남았을까?”

뒤적이던 현주씨가

“알뜰히도 먹었네.”

혀를 끌끌 차더니

“엄마는 사위가 첫 처가걸음을 하는데 이기 뭐꼬?”

“내가 우짜란 말이고 살림 사는 너거 월깨가 할 일이지.”

“아니, 위서방이 엄마사우가 올캐사우가?”

“마, 시끄럽다. 너거 월깨한테 가서 따지든동 말든동!”

도로 화를 더럭 내자

“됐습니다. 장모님 나가서 먹지요.”

위서방이 일촉즉발의 모녀를 뜯어말리고 읍내로 나가 외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 밤을 묵고 돌아가는 차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현주씨가 막내이모 덕찬씨에게 전화를 걸어 엉엉 울며 전후사정을 이야기하자

“너거 엄마 성질 그런 줄 몰랐나? 음식도 맛있으면 묵고 맛없으면 숟가락 놓고 일도 돈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고 말도 할 말은 안 하고 안할 말은 남의 말이 땅에 떨어져서 고물 묻을까 겁나게 내 갈기고...”

도로 성질을 내는데

“암만 그래도 이모, 사위가 첫 처가를 왔는데 말이다. 사위가...”

“그거 저거 체면 체릴 사람이가? 한 번 물어봐라? 그것 저것 체면 다 차리면 남편 죽고 아이 다섯이랑 우째 묵고 살았겠냐고 성질을 버럭 낼 긴데.”

“암만 그래도 이모.”

“마, 시끄럽다. 니는 40몇 년 골치 아프지만 나는 근 70년째다.”

“...”

그렇게 또 마음만 상해 마침내 영순씨에게 전화가 와서 엉엉 우는 걸 다독거린 기억이 나서 말하는데

“동생 하고 올캐는 많이 배우고 돈도 많고 아이들도 잘 되고 하이 그런 저런 체면 다 따지는지 몰라도 나는 돈도 없고 또 못 배우고 모르겠다.”

“누님, 그런 뜻이 아니라...”

“마, 잘 하거든 니나 잘해라. 우리 위서방이야 묵든 굶든 너거 사우한테나 잘해서 배가 터지도록 해 믹이라.”
“...”

더는 할 말이 없이 뻘쭘한 분위기로 커피를 마시는데

“그래 김해언니 말이다.”
“예. 설대목에 우리 같이 가서 보고 왔다 아잉교? 정신이 왔다갔다해서 그렇지 밥도 잘 묵고 몸은 아직 까딱없던데요?”

“그거사 그렇지. 그런데...”

“예. 어제 용철이가 가서 모시고 와서 상철이집에서 딸들이랑 다 모여서 잘 지낸다고 아침에 전화 왔습디다. 시간 나면 내라도 내일 한번 가보든지.”

“그, 그기 아이라 언니는 인자 돈도 모르고 돈 쓸 일도 없고...”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차마 하지 못 해 망설이는데

“고모!”

정석씨가 봉투하나를 꺼내주자

“고맙다.”

얼굴이 확 펴지는데

“누님, 큰누님 살아계실 때 둘째누님은 우리 형제가 근 20년을 명절에 가고 용돈을 주어도 절대로 말을 안 했다. 그 입바른 사람도 누님이 많아 우선 맏이만 챙긴다는 원칙에 동의를 했으니까. 그리고 큰누님이 돌아가시고 명절에 내나 백찬이가 가면 너무 기뻐하고 이제 자기가 농사에 손을 놓았지만 그래도 다믄 단감 한 상자라도 못 줘서 안달을 하고. 용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동생들한테 받는 자체가 너무 좋아 그냥 할렐루야를 외치며 반가워하고.”

“...”

“내 누님이 무슨 말 하려는지 알지만 아직 김해누님이 살았으니까 누님은 기다리소.”

“언니가 살았지만 인자 용돈이 필요 없으니까 그 봉투는 어데로 가는가 말이지.”

“....”

“...”

한참이나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

“자영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었네. 다음엔 조카들 하고 자영산소에 가서 술이나 한잔 부었으면.”

겨우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술은 무슨 술? 죽은 구신이 오는 줄을 아나, 가는 줄을 아나? 맹탕 헛 기다!”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데

“차 막힐라. 가자.”

열찬씨가 일어나며

“누님, 감더.”

신발을 신고 돌아서자

“그래 잘 가거라. 점심도 못 주고 미안하다.”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오던 길로 가면 되지요?”

“아이다. 속도 시끄럽고 하니 우회전해서 작천정 쪽으로 가자.”

해서 해묵은 기와집이 주욱 늘어서고 앞에 정각과 세적비가 보이는 집성촌 명촌 본 마을을 지나자

“여기가 언양바닥 제일 양반촌 명촌이란다. 너거 고모집은 명촌김씨도 아닌 타성바지에다 등말리에 떨어져 사는 아웃사이더라...”

“요즘도 그런 게 있나요?”

“그럼, 양반이란 자존심, 유림이란 기개가 하늘을 찌르지.”

하고 차가 광대고개를 넘어 화천리를 지나 작천정을 돌아나올 때까지

“내가 니 고모집이랑 다니며 좋은 모습은 못 보여주지만 어쩌면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일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자라던 시절은 먹고살기가 힘든 만큼 그런 갈등이나 애로사항도 한층 더 했고.”

“아무튼 그런 가족이라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라.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태어난 사람에 비하면 든든한 신불산이란 배경하나가 있는 것만 해도 어디야.”

“예. 지금 서울에서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은데 전에 토론토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는 그놈의 캐나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늘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불던 언양과 신불산이 얼마나 새삼스럽던지 정말 아버지 말씀대로 신불산 보고 자란 기개로 그 강추위를 버텼지요. 여기 현실적인 힘보다도 그런 무형의 재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긴 한데 니 말은 매번 너무 모범답안이라 재미가 없다. 꼭 너거 큰 아부지가 쓴 시(詩) 같아. 나는 시를 펜으로 쓰는데 형님은 꼭 칼끝으로 쓰는 것 같았어. 그게 머리가 좋은 사람들 특징인데 니는 내 자식이지만 책을 읽고 주제를 파악하거나 무슨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나보다 나은 것 같아. 그러나 니가 쓴 글을 보면 꼭 너거 큰아부지를 닮은 것 같아 나는 걱정이다. 정확함보다 부드러움이, 날카로움보다 따뜻함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해.”

“예. 알겠습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에 올라가 장승백이고개를 넘고 메가마트 옆을 지나자

“지금 이 지점에서 신불산을 보는 것이 제일 품이 넓고 산세가 웅장하지. 그래서 인구가 많은 언양보다 허허벌판 삼남에서 인물이 더 많이 난다잖아?”

“예. 산세가 좋긴 좋군요. 하면서도 전방을 주시하느라 금방 고개를 돌리는데

“그래 아까 하던 이야기 형제간의 처지와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지.

그러니까 이제 남은 사람이 김해와 명촌누님과 나 이렇게 셋인데 돌아가신 형님을 포함한 이 네 사람이 가장 파란만장한 삶이라기보다는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들이지. 우선 김해누님은 매우 총명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천하태평 신평누님대신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게 사랑이기 보다는 집안일은 물론 심부름을 시키다 나중에는 진장골짜기의 논을 개간하고 우물을 같이 팔정도로 일손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고 마침내는 6.25때 면사무소를 지키는 보초도 대신 서게 할 정도였지. 그러나 너무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도 공부를 못 한 점, 또 나이 스무 살에 단지 골짝논 서마지기가 있어 밥은 안 굶는다고 일자무식, 머슴 살던 자영한테 시집을 보내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심한 조울증, 아니 정신분열까지 겪은 사람인데 장남인 형님이 고향을 버리고 영주로 떠나 달팽이처럼 껍질 속으로 숨어버리자 둘째인 내게 병적으로 집착했는데 그건 열다섯 살 많은 내가 태어났을 때 자신이 업어 키운 점, 시집갈 때 눈에 밟혀서 진장 신혼집에 데리고 가 같이 살다시피 한 점, 거기다 공부를 잘해 엄청난 기대를 한 점이 더욱 집착하게 해 내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는 거의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로 집착했지.

단순히 친정동생이기라기 보다는 친정이라는 그 자체, 나도 친정이 있고 공무원을 하는 의젓한 동생이 있다는 그 상징으로 나를 좋아했고 또 천성이 나서기를 좋아해 아무 실익도 없이 제 돈 들여, 시간 내어 형제간의 모든 일을 다 끼어들고 반드시 원칙에 가깝게 돌아가게 하고 술고래 박서방을 기어이 교회에 데리고 간 점이나 명촌누님일가를 크리스천으로 만든 여장부지. 만약 우리 집안이 잘 되되려면 김해누님이 장남이 되고 영주형님이 딸로 태어났다면 든든한 장남에 알뜰한 장녀의 좋은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동네어른들의 말이 많았어. 아무튼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힘들어도 원망을 않고 형제들을 위해 무한대의 사랑을 베푼 사람이지. 특히 나는 그 사랑의 절반도 돌려주지 못하고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셈이지.”

하고 한참 뜸을 들인 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를 특별히 좋아한 사람으로 또 신평의 큰누님이 있는데 어릴 때 같이 지낸 기억은 별 없지만 난 단지 큰누님이라 좀 챙기는 정도였는데 그 천진한 누님은 친정이라고 딱히 내세우거나 기댈 곳도 없는데 공무원을 하는 동생, 제법 높은 자리에 있는 동생이 너무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언양장날 만나면 양식미꾸라지를 섞어 팔던 바께스에서 몸매가 가늘고 색깔이 예쁜 자연산을 고른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믄 호박 한 덩이라도 더 챙겨줄려고 애를 쓰고 내가 소피국물을 한 그릇 사주기라도 하면 너무 기분이 좋아 국밥집 주인은 물론 옆에서 같이 장사하는 사람이나 단골손님들에게 ‘이 사람이 우리 부산 동생이고 이 사람은 또 월깨라고’ 자랑이 늘어졌지. 오죽하면 병이 깊어 돌아가시기 직전 나는 안 죽는다고 내 가슴을 파고들며 울었을까 말이야.”

“예, 그랬군요.”

“다음 명촌누님 순선데 그 누님은 우리 7남매 중 가장 눈치도 빠르고 손끝도 야무져 어릴 때는 동네사람들이 나중에 가장 잘 살 것이라고 했대. 그래서 양식도 부족하고 해서 입을 하나 줄인다고 밀양 이모집으로, 부산 식모살이로, 공장생활로 부모 품을 떠나 가장 많이 고생을 했지. 그러면서도 자신이 번 돈이나 노력을 오로지 장남이자 손위오빠인 영주형님에게 다 바쳤는데 형님이 무정하게 영주로 떠나고 뒤도 안 돌아보자 못 배워서 술고래 농사꾼에게 시집온 자신의 처지가 모두 오빠를 비롯한 가족들의 탓이라고 원망을 했는데 엉뚱하게도 그 마음을 위로해준 역할은 김해 둘째누님이 맡았고 현실적으로 돈이 오고가고 부대낀 역할은 내게로 돌아왔으니 어쩌면 그 역할들에 운명적인 무엇이 있나 봐. 좌우간 너거가 어릴 때 오롱조롱한 조카들이 굶을까 싶어 소를 사주고 논을 사주고 돈을 댄 것 때문에 우리는 결혼 20년이 다 되도록 셋방살이를 전전했는데 그래도 너거 엄마가 내게 원망을 않은 건 참으로 대단한 이해심이었지. 남편이 일찍 죽어 어린 자식 다섯을 키우고 그 와중에 다 큰 넷째가 방위복무 중에 불의의 사고로 죽자 정신세계도 많이 황폐한데다 자기만 오빠에게 희생되었고 끝내 불행하다는 불만에 빠져 형제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아, 예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난데 아버지는 공부 잘 하는 형님이 있어 나는 농사를 지으면 좋겠다고 이미 한글은 물론 천자문도 거의 다 땐 나를 국민학교에 입학도 못 하게 해서 김해누님이 싸움싸움해서 겨우 입학을 할 정도였는데 형님누님들이 다 결혼해서 떠나고 병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해다 나르고 천식으로 기침이 나오고 배가 아파 잠을 못 드는 아버지의 아랫배를 만져드리며 밤을 새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작이 굼뜨고 눈치가 없다고 별 고임을 못 받았는데 그래도 돌아가실 때 혼자 임종을 해 종신(終身)자식이라는 영예를 차지해 형제들의 부러움을 샀지. 아무튼 재산은 못 받았지만 공무원시험하나는 늘 무난히 걸릴 만큼 머리라도 하나 타고 나서 이만큼 사는 것이 다 부모님 아니, 조상님 은덕인데 영주형님이 달팽이껍질에 들어가 버린, 아니 어둠과 불안이 가득한 자신의 마음속에 침몰해버린 바람에 모든 역할을 대신하면서 오히려 욕만 먹은 경우에 해당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이루고 살고 자식이 무던하니 다행이지.”

버스 자동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도시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어디까지 왔냐는 영순씨의 전화를 받고 곧 도착할 테니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을 한 열찬씨가

“이제 일곱 남매의 상호의존과 대립관계를 설명해야 마무리가 되겠지.”

뜸을 한번 들이고

“먼저 돌아가신 신평 큰누님은 맏이답게 대체로 양순하고 큰 갈등이 없었어. 단지 자신이 천하태평인데 비해 너무 나대는 아시동생 김해둘째누님이 좀 성가시기는 해도 말년에 아무도 없는 집에 그나마 가끔 찾아와 눈물로 기도를 드리는 둘째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난 점, 또 영주의 형님과 형수가 논밭을 부지런히 팔아갈 때는 다른 형제들이 한 목소리로 욕을 해도 ‘저 사람들이 와 저라노?’하다가 땅을 다 팔아가고는 다시 언양 걸음을 안 하자 ‘영주 동생하고 우야 엄마가 참 못 됐다.’ 할 정도로 대체로 무색무취했고 나이 들어 장날마다 자식 같은 두 남동생을 많이 기다리는 정도였지.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