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세상사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강물이 제 길을 따라 흘러감이 자연스럽듯, 일단 방향을 잡은 현재의 세상사의 흐름이 영속될 것 같은 믿음을 갖게 한다. 존재에는 다 이유가 있다. ‘현재의 세상사’가 있게 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여 흐름에는 관성이 붙는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생전까지는 영속할 것은 도도한 흐름은 진상(眞相)의 일부일 뿐이다. 수면 아래에는 우리 상상을 넘어서는 크기의 구조가 존재한다. 일정한 흐름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에서는 수많은 요인이 얽히고설켜 상호작용을 한다.

이러한 수면 아래의 움직임이 점차 축적되다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기존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궤도의 흐름을 형성한다. 바야흐로 세상사의 흐름에 변곡점을 맞이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재명 무죄’, 현대사의 흔치 않는 굵직한 변곡점임을 지적 본능으로 알아차린다. 12·3 계엄, 응원봉, 키세스 우주전사, 검찰의 폭주 등등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떠오르다 스러진다.

축하를 해야지. 축배는 ‘쨍’하고 부딪침이 제격이다. 마는 곁에 있고 싶은 이들, 너무 멀다. 자축이라도 해야지. 시골 서생이 막걸리 한 병이면 족하겠지. 설도(薛濤, 768?~832)의 심정이 헤아려진다.

피는 꽃 함께 즐길 이 없고 (花開不同賞)
지는 꽃 함께 슬퍼할 이 없네 (花落不同悲)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欲問相思處)
꽃 피고 꽃 지는 이때 (花開花落時)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른다. 매미는 일 년이란 세월을 모른다. 하루살이와 계절을, 매미와 일 년에 대해 논할 수 없는 법이다.

근세까지 천연두를 ‘마마’라고 불렀다. 어른이나 높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그분들이 기분 나빠 할 수 있기 때문에 직함이라든가 그밖에 높여 부르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 했다.

천연두와 같은 질병이 바이러스를 통해 감염된다는 사실은 몰랐고, 귀신의 장난으로 여겼다. 그래서 천연두 귀신을 그냥 ‘천연두 귀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임금님이나 궁중 어른에게나 쓰는 칭호인 ‘천연두 귀신 마마’라 높여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병에 걸린 사람이 생겼을 때, “우리 마을에 천연두 걸린 사람이 있다”과 말하면, 그 말을 듣고 천연두 귀신이 기분 나빠서 그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같은 말을 “우리 마을에 마마가 오셨다”라고 돌려 말했다. 천연두는 1977년의 마지막 발병을 끝으로 더 이상 자연적인 발생 사례가 없는, 곧 인류가 처음으로 박멸한 병이다.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것 중 가장 강렬한 것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현상은 원인의 결과물이다. 바람이 세게 불어 나뭇가지가 부러진 일에는 쉽게 인과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사는 복합 원인을 가진다. 더구나 그 원인들이 상호작용을 하기에 대단히 복잡해서 원인 규명이 개인의 지적 한계를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리적으로는, 세상사나 목전의 현상에 대해 알고 싶다든지 발언하고 싶으면, 원인과 그 상호작용을 따져봄이 자연스런 일이다. 팩트 체크를 하거나 관련 전문가의 논문이나 저서를 읽어봐야 한다.

그렇지만 세상사는 가짓수가 너무 많다. 시간적으로나 지적 능력으로거나 개인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다. 하여 자신의 집중하는 분야 외에는 ‘모름’을 인정하고, 그 모름을 참고 견디는 힘이 절실히 요구된다.

마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고, 견뎌 하지도 못한다. 기본적인 팩트 체크를 하는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사에 모른다는 것이 없다는 듯이 거칠게 없이 발언한다. 그래서 ‘가상 원인의 오류’가 발생한다.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쓴 말이다. 사람이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을 때, 현실과 거리가 먼 설명이나 이유를 만들어내는 경향을 말한다. 어떤 설명이든 설명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원인을 알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좀은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이재명 무죄는 좌편향된 판사들 때문이다’, ‘사법부가 정치화되었다.’

가상 원인은 인과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추론의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인으로 제시되는 설명의 오류 여부를 헤아리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그 설명이 입맛에 맞으면, 맞는 것이 맞는지의 여부를 가릴 것 없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래서 ‘음모론’이 판을 치게 된다.

이 봄날에, 여러 지인들과 이별해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이별은 눈물을 흘리게 한다. 눈물은 짠맛이다. 그 짠맛을 영혼을 순화하는 역할을 한다. 어디 이별이 현대만의, 개인만의 몫이었던가. 이별이 뭇 인류 삶의 한 부분이었음은 왕지환(王之煥, 688~742)의 ‘송별’(送別)에서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버들은 봄바람 걸리는 나무 (楊柳東風樹)
장안 강가 이별교 아래 푸르구나 (靑靑夾御河)
요즈음 휘어 잡혀 꺾이는 아픔 (近來攀折苦)
이별이 많은 까닭이라는군 (應爲別離多)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