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오늘의 詩」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허섭 승인 2020.04.02 16:42 | 최종 수정 2020.04.04 12:16 의견 0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시 / 김기웅 작곡 / 박인희 낭송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목마)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1955.6.20 《1954년 연간시집》 / 『박인환 선시집』 1955.10.15

* <목마와 숙녀> 는 연 구분이 없는 단연시(單聯詩)이다.
* <박인환 선시집> 에는 ‘거저’ 로 표기되어 있으나 맞춤법에 따라 ‘그저’ 로 바로잡은 것이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시 / 이진섭 작곡 / (나애심 현인)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눈동자 입술은   (그의)
내 가슴에 있어.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옛날은)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그)
내 가슴에 있어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있네)

- 1956.3.12 《주간 희망》 / 20주기 기념시집 『목마와 숙녀』 근역서재 1976.

*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 에서는 노래 형식에 맞게 연 구분을 하였으며 몇 구절도 조사와 어미를 바꾸었다.

* 자료에 따라 ‘옛날/과거’ 두 가지 시어가 번갈아 나오나, 나는 ‘옛날은 남는 것’ 이라고 해야 비로소 시답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가도 추억은 남는 것’ 이라고 하면 가장 일반적인 진술이 될 터이고, ‘과거/옛날은 가고 없는데’ ‘과거/옛날이 남는다’ 고 하니 이는 생뚱맞은 소리 - 낯선 진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와 ‘옛날’ 은 그 뉘앙스-어감이 사뭇 다르지 않은가? ‘과거’ 는 뭔가 ‘뒤가 켕기는 말’ 이지만 ‘옛날’ 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말’ 이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라고 말하지 ‘옛날은 묻지 마세요’ 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박인환(朴寅煥 )이라는 시인을 가수 박인희의 노래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목마와 숙녀> 는 일찍이 문학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이 땅의 청년들조차 잠시나마 한때의 문학 지망생으로 만들 만큼 충분히 우리의 멘탈을 센치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 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도 모르면서도 때때로 쓰러진 술병 속에서 가을바람에 늑대 우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리고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가요무대> 에서 원로가수 현인 선생께서 <세월이 가면> 을 부를 때면 ‘고인이 된 내 친구 박인환 군이 지은 시’ 라고 요절한 시인을 반드시 언급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하면서, 일명 ‘명동 샹송’ 으로 불리운 이 노래가 전후 한국문단의 명동시대에 어느 선술집의 도라무깡(드럼통) 탁자 위에서 즉석으로 탄생하였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 박인희의 청아한 목소리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대중들 중에는 가수 박인희가 박인환의 친동생이라는, 또는 박두진 시인의 딸이라는 엉터리 호적 관계를 설명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김수영의 시정신을 가장 잘 기리고 기념한 이가 그의 여동생 김수명이라면, 가수 박인희가 시인 박인환의 친동생이라는 오해를 받을 만도 하다.

* 방송작가 정하연이 대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EBS 문화사시리즈 제1편인 《명동백작》에서는 <세월이 가면> 이 태어난 현장을 직접 보여주었으니, 그 주역은 작사가인 박인환 시인, 작곡가인 이진섭 기자, 가수이자 영화배우로 자신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의 주제곡을 불렀던 가수 나애심이었다. 당대의 여러 증언에 따르면, 나애심과 송지영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명동백작 소설가 이봉구에 이끌려 늦게 합석하게 된 테너 임만섭에 의해 이 노래는 그날 밤 명동 골목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으며, 때로는 그 현장에 시인 조병화가 증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나중에 방송작가로 활동한 이진섭 선생은 우리 세대들에게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사회를 본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 의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심사위원석에는 언론인으로 오래 활동한 수필가 조풍연 선생,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 짙고 굵은 안경테로 인상 깊은 가요평론가요 작곡가인 황문평 선생, 백발의 온화한 신사 이진섭 선생, 그리고 70년대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포크시대를 이끈 경음악평론가 이백천 선생이 막내로 앉아 있었다.

박인환 결혼 기념 사진. 

* 나애심이 <세월이 가면> 을 레코드로 취입한 것이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동년 1956년이며, 현인은 1959년에 이 노래를 레코드로 취입해서 불렀고, 박인희가 이를 리메이크한 것은 이필원과 함께 혼성듀엣 뚜아에무아로 가요계에 데뷔한 1971년이다. 이후 현미, 최양숙, 김정호, 조용필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에 도전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노래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려 부른 가수는 아무래도 낭만가객 최백호가 최고가 아닐까 한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말이다.

* 원로가수 현인 선생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전설의 가수 남인수와 그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가수이다. 원래 홍난파가 졸업한 일본 우에노 음악학원에 유학한 성악가로 일제시대 말기 학병을 피해 상해로 건너가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대중가요 가수로 전향한 분이다. 현인 선생의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노래가 <세월이 가면> 과 <서울야곡> 이라는 노래이다. 현인은 샹송과 깐소네를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대중가수로 이른바 ‘명동샹송’ 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그 특유의 창법으로 노래하고 있다. 물론 1956년에 이 노래를 부른 (당대로서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마스크에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인) 나애심도 샹송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불렀다.

* 노래방에서 <세월이 가면> 을 검색하면, 최호섭이라는 젊은 가수가 부른 <세월이 가면> 이 나온다. 혹시나 노래 제목을 잘못 기억하였나 생각하여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을 검색하면 박건이 부른 노래가 나온다. 그러나 그 노래는 신명순이 작사하고 김희갑이 작곡한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라는 동숭동 서울대 시절의 노래이다. 따라서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은 노래방에서는 반주곡으로 부를 수는 없다. (트롯트를 좋아하는 ‘쉰세대들’ 에게 적합한 금영노래방에서는 이 노래가 나오지 않지만 발라드를 좋아하는 ‘신세대들’ 에게 알맞은 태진노래방에서는 박인희의 노래로 검색이 가능하니 1279번곡이다.)

현인 <세월이 가면> https://www.youtube.com/watch?v=2gIs1FHJjvc
나애심 <세월이 가면> https://www.youtube.com/watch?v=BKSr-9BmhAQ
최백호 <세월이 가면> https://www.youtube.com/watch?v=f_IedCXFYDE
박인희 <얼굴> 자작시 낭송 https://www.youtube.com/watch?v=kpt2zdlfsTk

얼굴 - 박인희 시 / 손흥수 작곡 / 박인희 낭송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 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 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 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출처는 미상, 스크랩 자료
- 박인환 전시집(全詩集)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 스타북스 2016.

지금까지 나온 박인환 시집과 전집 중에서, 기본 자료로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저작물은 아래와 같다.

박인환 선시집(選詩集) 1955 산호장 *복각판이 2016년 그여름 출판사에서 나옴.
목마와 숙녀 1976 근역서재 *20주기 기념시집으로 유족들이 발간한 것임.
박인환 전집 2008 실천문학사 맹문재 편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박인환 전집 2009 예옥 문승묵 편
박인환 문학전집 1. 시 2015 소명출판 염철/업동섭 편
박인환 번역 전집 2019 푸른사상 맹문재 편

이들 중에서도 각 관련 자료들을 일일이 수록함으로써 문학연구자들이 어떤 것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야 할지를 제시한 것은 염철/엄동섭이 편집한 소명출판의 책이다. 앞으로 이 중요한 작업은 이어 출간될 것으로 본다.

이 낭송시는 모두가 박인희의 자작시로 알고 있는데, 최근 박인환 시전집을 간행한 후배 시인은 이 시를 박인환의 시로 확정지었다. 그 후배 시인은 이 시의 출처를 ‘출처 미상의 스크랩 자료’ 라고 했으며, 기존에 알고 알려진 박인희 시와는 달리 행과 연의 배열에 차이가 있고 몇 구절의 시어 다르게 되어 있다.

이는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제이다. 우선 그렇게 판단한 근거인 문제의 그 ‘스크랩 자료’ 를 밝혀야 할 것이고, 지난 2016년 미국에서 귀국해 35년 만에 컴백 공연을 마친 박인희 씨에게 직접 사실 여부를 물어 오해를 불식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있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판단은 이러하다.

1. 박인희 씨가 박인환 시인의 작품을 자작시로 슬쩍했을 리가 만무하다. 박인희 씨는 시재(詩才)가 뛰어난 가수로 그가 작사한 여러 노랫말을 보면 이 정도의 수작(秀作)은 충분히 지을 만하다고 본다.

2. <얼굴> 은 몇몇 대목에서는 박인환 식 어투가 묻어 있지만 이는 박인희 씨가 박인환 시인에 깊이 심취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이 시의 어조는 박인환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기에는 너무 여성적이다.

3. <목마와 숙녀> 와 비교하자면, 박인환의 시는 의식의 흐름-자동기술법이 두드러짐에 비해 <얼굴>은 전체적인 흐름을 쉽게 감지할 수 있어 누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결코 난해시라 할 수 없다. 단지 그 우수적인 분위기가 <목마와 숙녀>와 비슷할 뿐이다.

4. <목마와 숙녀> 에는 박인환 시 특유의 한자어와 관념어들이 많이 나오지만 <얼굴>에는 그런 단어가 거의 없다. (굳이 찾자면 ‘습성/기억/신기루(蜃氣樓)’ 정도이다.) 다만 ‘기(旗)를 꽂고 산들 무얼 하나’ 하는 제3행의 말은 낭송시를 듣는 대중들이 거의 ‘길을 걷고 산들 무얼 하나’ 로 들을 정도로 당시 대학생 신분이던 화자가 말할 수 있는 인생 체험의 성숙도를 넘어선 시어이다. (<얼굴> 은 박인희 씨가 숙명여대 불문과 시절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문학용어도 생소했지만 우리는 박인환이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982~1941)’ 라는 작가에 대해 심취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목마와 숙녀> 는 말하자면 ‘버지니아 울프라’ 는 한 여류작가에게 바친 박인환의 만사(輓詞) - 추모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에 나오는 핵심 시어인 <세월> <등대로> 는 곧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명이다.

박인환의 전반기 시들이 다소 난해한 이유는 그가 초현실주의 문학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 자유연상(自由聯想), 자동기술(自動記述)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버지니아 울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최근 우리 문학 출판계에서 버지니아 울프 전집이 완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박인환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도 본격화 되어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 규범이 엄격했던 그 시절에, 사회 곳곳에 마초(macho)적인 남자들이 출몰하던 당시 박인환은 어쩌면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인 것 같다. 김수영이 아방가르드 모던걸인 아내 김현경을 끔찍이도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감당이 안 되어 종종 폭력을 휘둘렀음에 비해 박인환은 자신의 경제적 무능을 미안해하면서도 아내에게는 깍듯이 서로 예의를 차렸던 것 같다. 박인환 전집에는 아내에게 보낸 서간들이 여러 편 남아있기에 이러한 정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014년 박인환 시인의 미망인 이정숙 여사는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 마초(macho) : 남자다움을 지나치게 과시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는 남자.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미 넘치는 남자다움을 뜻하기도 하고, 남자의 거칠고 힘만 앞세우며 덤비는 단순 무식한 성격을 뜻하기도 한다.

오는 3월 20일은 박인환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1956년 3월 20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시인은 차가운 방에 누워 ‘답답해, 답답해! 목이 마르다. 생명수를 달라’ 고 외치며 심장마비로 죽었다. 차마 뜬 눈을 감지 못한 채 그가 운명한 시간은 밤 9시경이었다. * 물론 여기서 ‘생명수’ 는 주체(酒滯)를 포함한 급체(急滯)에 먹는 소화제 - 지금의 ‘활명수(活命水)’ 를 말하는 것이다.

1956년 3월 17일 식민지시대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 이상을 추모하는 문학의 밤 행사를 치른 후 연 3일 이어진 그의 폭음은 결국 사흘 후인 3월 20일 만30세를 다 채우지 못한 그를 저 세상으로 데려갔다.

강원도 인제군과 그 옆 양구군에 가면 박인환 문학관과 박수근 미술관이 있다. 지자체에서 세운 문학관이나 미술관이 대개 그렇지만 서귀포시의 이중섭미술관이나 양구군의 박수근미술관을 개관할 적에 그의 원작을 한두 점도 확보하지 못하여 모사품들로 채워진 것이 우리 문화예술계의 현실임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관광 상품을 목적으로 해서 설립했든, 단순히 지차체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서 건물이 지워졌든지 간에, 그 인물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또는 잠시 머물렀다는 그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기린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공간을 명실공히 그 인물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살려 본래 목적에 맞게 운영하는 일이다. 모든 인력이나 자원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지역문화를 만들고 키워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각 지역에 설립한 문학관이나 미술관이나 기념관들이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 고향에서 태어났으니, 무조건 그 인물이 대단하고 소중한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사랑을 넘어 엄정한 역사적 평가도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훌륭한 후대인들이 그 고장에서 자라날 것이 아니겠는가?

박인환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를 두고 흔히 멋쟁이 미남자, 당대 최고의 댄디스트(dandist)요 낭만주의자(sentimentalist)로 기억하는 것은 박인환의 피상적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후대의 대중들에게 박인환이라는 존재를 알린 공으로 치자면 박인희의 역할이 참으로 지대하지만 반대급부(反對給付)로 그를 단순한 센치멘탈리스트로 각인시킨 아쉬움도 크다.

문단에서는 다섯 살이나 위였던 김수영이 가졌던 박인환에 대한 콤플렉스와 그가 행한 박인환 폄하의 발언들이 박인환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수영 사후에 그를 존숭하는 비평가들이 상대적으로 박인환을 무시한 것은 당연히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당대에 박인환의 군계일학(群鷄一鶴)적 풍모와 그의 전방위(全方位)에 걸친 예술가적 역량에 콤플렉스를 갖지 아니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분명 그는 한국 문단의 최고 미남자였으며 전후 문단의 총아(寵兒)요 기린아(麒麟兒)였다. 1930년대 이후 한국문단에 백석이 있었다면 해방 이후 10년은 분명 박인환의 시대였다. 해방 이후 한국문학사에서 박인환, 김수영, 김춘수 이 세 사람은 변증법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콤플렉스, 김수영에 대한 김춘수의 콤플렉스는 해방후 우리 시문학사의 전개에서 매우 긍적적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나의 직관에 근거한 단순논리이지만 문학 연구자들도 귀담아 들어야할 충고이기도 할 것이다.

박인환 그는 센치멘탈리즘의 기수로 단순한 댄디스트가 아니였다. 그는 동서냉전의 시대를 넘어 자본이 지배하게 될 세계사의 흐름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당대의 깨어있는 지식인이요, 이상(李箱 1910~1937) 이후 가장 다재다능한 다방면의 종합예술인이었다. 6.25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밖으로부터 강요된 이념의 틀을 벗어나 현실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6.25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 ‘충격과 인지의 지체현상’ 을 거쳐 휴전 후에나 비로소 작품으로 나타났으며 그것도 반공의 관점만이 존재할 당시에, 6.25를 가장 가까운 정면에서 맨얼굴로 바라본 유일한 작가가 박인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해방과 동시에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민족에도 뜨거운 관심과 애정을 보내었던, 일찍이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사적 문명사적 안목을 지닌 시인이었다.

오늘 3월 20일 그의 기일을 맞아 시인에 대한 재평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위에서 언급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시켜 줄 몇 편의 시를 소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우선 이 정도에서 마무리한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거의 모두가 미래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 T.S. 엘리엇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冷酷)하고 절실한
회상(回想)과 체험(體驗)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殺戮)에 복종(服從)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復讐)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
명상(瞑想)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懷疑)와 불안만이 다정(多情)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 아 최후로 이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畫)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回想)도 고뇌(苦惱)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판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 1952.11.1 《수험생》 2-3호 * 20주년 기념시집인『목마와 숙녀』에는 1951.1 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 대학시절 이 시를 읽으며 전혀 알 수 없었던 밑줄 친 구절은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피카소의 그림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피카소의 출세작인 <이비뇽의 처녀들-1907년작> 에서부터 스페인 내란의 참상을 고발한 <게르니카-1937년작> 와, 또 한국전쟁에서 양민학살을 고발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작 5월에 전시> 에까지 그 의식이 닿아 있는 것이다.

 

검은 강(江) / 박인환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最終)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軍隊)의 합창(合唱)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列車)에 앉아
정욕(情慾)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交叉)하는 지대(地帶)
거기엔 일체의 불순(不純)한 욕망이 반사(反射)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爆音)과 초연(硝煙)이 가득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境地)에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視線)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退却)하는 자(者)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江)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 1955.10.15 『박인환 선시집』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 박인환

동양의 오케스트라
가믈란의 반주악(伴奏樂)이 들려온다
오, 약소민족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삼백년 동안 너의 자원은
구미(歐美) 자본주의 국가에 빼앗기고
반면 비참한 희생을 받지 않으면
구라파(歐羅巴)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메란은 미칠 듯이 울었다

홀랜드의 58배나 되는 면적에
오란다인은 조금도 갖지 않은 슬픔을
밀림(密林)처럼 지니고
육천칠십삼만인(六千七十三萬人) 중 한 사람도
빛나는 남십자성은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수도 족자카르타
상업항 스라바야
고원분지의 중심지 반돈의 시민이여
너희들의 습성이 용서하지 않는
남을 때리지 못하는 것은
회교정신에서 온 것만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붕괴한 다음
홀랜드의 식민정책 밑에
모든 힘까지도 빼앗긴 것이다

사나이는 일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약한 여자들이 백인 아래 눈물 흘렸다
수만의 혼혈아는
살길을 잊어 애비를 찾았으나
스라바야를 떠나는 상선(商船)은
벌써 기적을 울렸다

홀랜드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사원(寺院)을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인처럼 은행도 세우지 않았다
토인(土人)은 저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축할 여유란 도무지 없었다
홀랜드인은 옛말처럼 도로를 닦고
아시아의 창고에서 임자 없는 사이
자원을 본국으로 끌고만 갔다

주거와 의식은 최저도(最抵度)
노예적 지위는 더욱 심하고
옛과 같은 창조적 혈액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생의 광영은 홀랜드의 소유만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늬들의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 임시 정부란 또 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삼백 년 동안 받아온
눈물겨운 박해의 반응으로
너의 조상이 남겨놓은
야자나무의 노래를 부르며
홀랜드군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라

제국주의의 야만적 제재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참혹한 몇 달이 지나면
피 흘린 자바섬에는
붉은 칸나 꽃이 피리니
죽음의 보람은 남해의 태양처럼
조선에 사는 우리에게도 빛이려니
해류가 부딪치는 모든 육지에선
거룩한 인도네시아 인민의
내일을 축복하리라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고대 문화의 대유적 보로부두르의 밤
평화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메란에 맞추어 스림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

- 1948.2.1 《신천지》 3-2호  *원고 완성일이 1947.7.26로 부기되어 있음.
가메란(gamelan) : 인도네시아의 전통악기.
홀랜드(Holland 和蘭) : 네덜란드의 이칭. 시에서는 네덜란드의 한 지역인 홀랜드를
가명으로 사용한 것임.
수라바야(Surabaya) : 인도네시아 동(東)자바주(州)의 주도(州都).
반돈(Ban Don) : 수라타니(Surat Thani), 말레이 반도 타이 남부에 있는 도시. 시에서는 말레이 반도의 고원지대를 말하는 듯함.
보로부두르(Borobu역) :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족자카르타 북쪽에 있는 불교유적.
스림피(Srimpi) : 자바의 전통무용

이 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도네시아의 역사

인도네시아는 세계 4위의 인구와 방대한 영토를 보유한 국가로,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쳐 1945년 독립을 이루었다. 1세기경부터 인도문화가 전하여졌으며, 불교와 힌두교를 배경으로 한 왕국이 세워졌다가 16세기 초 이슬람교도에게 멸망되었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를 대신한 일본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거쳐 1945년 8월 17일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네덜란드가 다시 식민지화 하려고 하자 이에 맞서 다시 4년간의 전쟁을 겪었으며 1949년 12월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끌어낸 수카르노 대동령이 1945~66까지 집권하였고 그 뒤를 이어 수하르토 대통령이 1966~98까지 장기집권하는 정치적인 후진국이 되었으나 이후 아직도 지난한 민주화 과정을 밟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우경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50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위의 박인환의 시는 인도네시아를 재식민화 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싸우던 당시의 인도네시아의 인민들에게 준 격려와 응원의 시인 셈이다.

‘인민’ 이란 단어는, 분명 좌파적인 용어이나, 이 시가 씌어진 당시인 해방정국에서는 지금처럼 이념에 착색된 용어가 아님을 감안하고 이 시를 읽어야 한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출생년도를 밝히면 다음과 같다.

박인환(1926년생) / 이진섭(1922년생) / 나애심(1930년생) // 김수영(1921년생) / 현인(1919년생 본명 현동주) / 이백천(1933년생) / 이봉구(1916년생) / 송지영(1916년생) / 조병화(1921년생) / 박인희(1945년생) / 정하연 (1944년생) / 최백호(1950년생) / 김동건(1939년생)

팔방미인 이진섭 선생 https://news.joins.com/article/6266354
『버지니아 울프 전집』 전13권 솔출판사 2019년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4605447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