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17) 세상을 살아감에는 한 걸음 양보하고, 사람을 대함에는 조금 더 관대하라

허섭 승인 2021.01.16 16:29 | 최종 수정 2021.01.18 20:01 의견 0
겸재 정선 - 인왕제색도

017 - 세상을 살아감에는 한 걸음 양보하고, 사람을 대함에는 조금 더 관대하라

세상을 살아감에 한 걸음 양보함을 높게 여기나니
한 걸음 물러남은 곧 나아감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조금의 관대함이 복이 되나니
남을 이롭게 함이 실로 자기를 이롭게 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 爲高(위고) : 높게 여귀다, 고상하게 여기다. 爲는 ‘여기다’ 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 張本(장본) : 바탕, 근본, 토대. 우리말 ‘밑천’ 에 해당하는 말이다.
  • 寬(관) : 너그러움, 관용(寬容), 관대(寬大)함.
  • 是福(시복) : 복이 되다.
  • 根基(근기) : 바탕, 근거

위 문장에 나온 爲나 是는 모두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다 / ~이 되다. / 여기다(삼다)’ 의 뜻으로 쓰인다.

판교 정섭(板橋 鄭燮, 청, 1693-1765) - 행서오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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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子貢曰(자공왈), 如有博施於民(여유박시어민) 而能濟衆(이능제중) 何如(하여) 可謂仁乎(가위인호). 子曰(자왈), 何事於仁(하사어인) 必也聖乎(필야성호) 堯舜其猶病諸(요순기유병저).
자공이 여쭈었다. “만약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 민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어찌 어질다 뿐이겠느냐? 반드시 성인이라고 할진저. 요순조차 오히려 그렇게 못하심을 마음 아파하셨느니라.”

夫仁者(부인자) 己欲立而立人(기욕립이입인) 己欲達而達人(기욕달이달인) 能近取譬(능근취비) 可謂仁之方也已(가위인지방야이).
무릇 어진 자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우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으면 남을 도달케 한다. 가까운 것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남의 입장을 미루어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인(仁)에 이르는 방법이니라.

여기서의 達은 ‘欲速不達(욕속부달)’ 할 때의 達로 보는 것이 좋다. 따라서 ‘이르다(到達)/이루다(達成)’ 중 어느 것으로 풀이해도 무방하다.

▶「마가복음」10장 43~44절 말씀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10:43-44

잘못하면 걸려 넘어지기 쉬운 말씀이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지)을 품고 일부러 낮은 자리에 내려가 종노릇을 한다면, 그건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 는 예수의 권고는 문자 그대로 종이 되라는 얘기지, 꿍꿍이속을 따로 감추고, 그러니까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하여 짐짓 종노릇을 하라는 그런 얘기는 아니다. 그런 것을 작위 또는 조작이라고 하거니와, 이는 도(道)와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를 거스르는 짓이다.

그렇다면 모든 이의 종이 되라는 말씀의 본의는 무엇인가? 길게 말할 것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높은 자리를 바라고 나아가는 것이 지당한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바로 그 세상을 거역하여 거꾸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세상을 대하여 홀로 반(反)한 분이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그래서 알찬 말씀이다. 이런 말을 참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어떤가? 남의 종노릇은 그만두고 겸손한 척이라도 하는 사람이 아쉬울 지경이다. 제가 수장(首長)인 단체에서 저를 감독 후보로 추대하는, 이건 도대체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없는 건지 체면이고 뭐고 아예 팽개쳐 버리고는 스스로 ‘높은 자리’ 에 앉겠노라 나서는 자가 오히려 박수를 받고 있으니,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예수 엄격히 이르시되,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 마태오」16:25 ) 하셨다. 앞에서 제 목숨을 ‘살리려고’ 라는 표현을 썼으니 뒤에도 제 목숨을 ‘잃으려고’ 라 해야 수사학적으로 맞겠지만 예수는 ‘잃는’ 이라고 하셨다. 잃으려고 폼만 재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얘기다.

죽어야 산다! 죽으려는 시늉만으로는 못 산다. 겸손한 척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진짜로 겸손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크고 많은 일을 이루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 자신을 잃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큰 공을 이루라’ 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죽어 달라’ 는 것이 그의 요청이다.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말할 것이다.” (「마태오」7:22-23 )

- 『길에서 주운 생각들』 이아무개 호미

이 글의 필자인 이현주 목사님은 동화작가이자 번역가이다.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靈性家)로 동서양의 사상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글들을 여기저기에 쓰고 있다. ‘이아무개’ 는 목사님의 오래된 필명이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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