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사진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야 될 텐데. 어서 일어나 서재로 가서 포토 에세이 카톡도 보내고 대하소설 교정도 오늘 몫 한 80페이지는 보아야 되는데...)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벌써 아침볕이 거실바닥을 지나 텔레비전 화면 앞까지 진출한 한낮이 다 되어 가는데 아침 먹고 쿠션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던 저는 도무지 두 무릎에 잔뜩 힘을 주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마악 물을 차고 오르는 제비처럼 벌떡 일어나 서재로 향해야 되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이제 고만 자기로 하고 벗어던진 목 베게와 실내화가 벌써부터 어서 일어나라고 조르고 창너머 데크에서는 마초가 왜 오늘은 산책도 않고 데크에 나와 보지도 않느냐고 눈을 홍끔하게 뜨고 바라보는 것이 잘못하면 매일 주는 쇠고기 간식 두 점이 지급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는 모양입니다.
나이 일흔 한 살, 거기다 병든 몸. 그래도 사람이니까 살아있으니까 저렇게 해야 할 일들이 줄을 서는데, 그러니까 2만 명의 인구가 넘는 마을의 동장을 하고 15억의 구민이 쓸 1천억 원의 예산을 받아들이고 나눠주는 경리관을 하던 시절 나는 얼마나 바쁘고 얼마나 많은 역할에 날마다 하루 일정표를 만들어 여러 곳을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며 껄껄껄 홍소(哄笑)를 날리고...
그러니까 독한 항암제를 먹던 지난 가을 3개월이 내 살아온 생애 중에서 가장 몸이 부자유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때일 것입니다. 심지어 대수술을 다섯 번이나 하고 회복실에 누었을 때도, 일리라로프라는 쇠막대기와 쇠바퀴로 오른쪽 다리를 챙챙 감았을 때도 그 때는 주변에 의사와 간호사와 아내와 가족이 있고 하루하루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고 앉고 일어서기가 조금씩 발전했는데 고작 항암제 부작용으로 손발가락이 부르트고 식욕이 없이 설사가 나고 현기증으로 늘 어지럽고 근력이 빠져 앉고 일어서기가 다 힘드니 이제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아직 허리도 못 이기는 아이처럼 나는 다시 나 태어날 때의 그 무력하고 순수한 몸으로 돌아가고 마는가 하는 조바심에서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 제가 말년의 아버지를 보살필 때
“사람은 무르팍이 튼튼하고 종아리에 살이 있어 마음대로 앉고 일어서고 일할 수 있을 때가 제일이야. 농사꾼이 아랫도리에 힘이 빠져 무릎을 세울 수 없고 지게를 지고 일어날 수 없으면 끝이야.”
하고 유난히 긴 촛대뼈 뒤쪽에 살 한 점도 없이 그냥 빈 주머니처럼 출렁거리는 종아리를 만져보며 슬퍼하시더니 당시 열여섯 살 한층 키도 크고 살도 오르는 제 종아리를 만져보고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농사꾼으로서 종아리에 대한 인식(認識)을 가진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20년 후쯤 김해 둘째 매형의 살이 하나도 없이 다 빠진 다리, 그렇지만 무릎에서 찬바람이 난다는 다리를 두어 시간 주물러주는데
(처남아, 나는 인자 텄다. 니는 저 닭장에 닭이나 두어 마리 잡아묵고 가거라. 세상에 내가 못 일어나니 일곱 식구 중에 닭잡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해서 제 손으로 닭을 두 마리나 잡아 여남은 식구가 닭도리탕을 끓여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또 몇 년이 지나 이번에는 고향 언양의 진장이라는 곳에 집을 짓고 선산을 지키는 사촌형님이 기관지천식으로 위독해 아무 대책도 없는 시점이 되어 하릴 없이 그 뼈와 가죽만 남은 다리를 한 나절 주무르다 저 먼 나라도 보낸 일도 있고 3년 전에는 폐렴으로 급사한 막내자형의 메마른 종아리를 주무르기도 했습니다.
읍내 장에 갔던 아내가 돌아오는 자동차소리가 나 저는 양팔을 바닥에 짚고 두 무릎에 힘을 써 죽을 힘으로 방바닥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식욕이 없는 남편을 위해 찰떡과 어묵을 사고 도토리묵을 사다 점심에 묵국수를 해 먹일 아내에게 차마 아직도 일어나지 못 하고 뭉개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 그러고 보니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같이 조기축구회에서 공도 차고 산우회에서 산행도 하던 두 살 많은 형 김몽룡씨, 젊은 시절 리비아대수로 공사에 한 3년 다녀온 일을 일생일대의 자랑거리와 긍지로 삼고 살아온 그는 주로 수도관과 하수관을 신설하거나 막힌 곳을 뚫는 일로 평생을 보냈는데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는 바람에 예순이 가까우면서 무릎관절이 상했는데 무릎이 아파 자주 잠을 깨는 그에게 아내가 내일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자고 졸라도 내일은 바쁘니 모래 가자는 식으로 연기에 연기를 반복 저녁마다 소주에 절여 살다 하다하다 못 견뎌 병원에 가니 X-ray사진을 본 의사가 도대체 무얼 하느라 이렇게 무릎이 다 닳았느냐, 이젠 관절은 물론 무릎 뼈 자체가 닳아 인공관절로 수술을 해도 성공할지 모르겠다고 했답니다.
사실 그 동안도 일요일만 되면 그는 날마다 독한 진통제를 먹고 금정산과 영남알프스 등 아무리 높은 산도 악착같이 오르다 등산 중에 약기운이 떨어져 통증이 오면 온 산천을 데굴데굴 굴렀는데 겨우겨우 마을로 돌아오면 그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술집을 찾아 한 꺼 번에 몇 잔을 마시면 조금 통증이 갈아 앉곤 했습니다.
제가 명촌리로 귀촌한 뒤 자동으로 좀체 같이 산행을 하거나 만날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그의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와서 경남고성의 장례식장에 갔는데 이제 무릎이 너무 아픈 그가 일일이 앉고 일어서기가 어려워 비록 맏사위이지만 아예 빈소에는 가지 못 하고 손님들 자리만 찾아다니는데 한 손에 목욕탕에서 앉는 플라스틱 간의의자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그 우직한 배관공은 4년 전 제가 두 번째 수술로 갈비뼈들 떼어낸다고 굿을 벌일 때 목욕탕에 가다 미끄러져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늙고 병들면서 느낀 철칙중의 하나가 우리가 젊을 때 노인들을 보고 저 양반은 저 몸으로 불편해서 어떻게 사나, 저렇게 심하게 고통 받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던 일이 차례로 내게 닥치고 내가 그 불편과 고통들을 하나둘 겪으면서 아내와 자식들과 누님과 동생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목욕을 해도 동그란 의자에 앉아 벽에 단단히 손을 잡고 고정해야 아내가 머리를 감기고 등을 씻어줍니다. 부부는 둘 중 먼저 죽는 사람이 호강이라더니, 정말 아내가 고맙기보다는 제가 체면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랜 의논 끝에 침대를 하나 사기로 했는데 좁은 거실의 가구를 옮기느라 힘은 들었지만 지금은 침대도 있지만 약까지 끊어 아주 편안하게 앉고서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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