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21)겨울 스케치1
말년일기 제1222호(2021.1.21)
이득수
승인
2021.01.20 19:05 | 최종 수정 2021.01.22 16:03
의견
0
콜레라19로 국민의 이동을 자제해 달라는 판국에 올해는 유래 없는 혹한이 겹쳐 마초할배의 <방콕>이 아주 괘도에 올라 꽤 오랫동안 두문불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누구보다도 방콕을 못 견디는 아내가 마침 마을부녀회회장단(회장, 부회장, 총무. 아내는 부회장임)의 모임이 있다고 모처럼 화장을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외출을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혼자 있을 때마다 꿈꾸는 반란(叛亂), 오늘도 얼큰한 김장김치와 함께 안성라면을 끓여 국물과 달걀까지 맛있게 먹고 믹스커피 까지 한잔 하는데 창밖의 잔디밭에서 아까부터 계속 저를 흘낏거리는 마초가 눈에 들어와 오늘은 실내의 <도리뱅뱅>을 포기하고 잔디밭을 돌기로 하고 두꺼운 점퍼로 중무장을 하고 나섰습니다.
정오의 볕이 달아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았는데 오랜만에 볕을 봐 눈이 부셔 한참이나 서 있다 잔디밭을 도는데 하마 들판이나 산으로 산책을 나갈 것이라 기대하던 마초가 실망을 해 잔디밭을 뒹굴며 괴로워하는 것 같아 평소 산책길 반환점에서 휴식하며 지급하던 쇠고기간식 두 점을 미리 지급하였습니다. 저도 한겨울이라 무논도 농작물도 없어 마음대로 뛰고 뒹굴어도 아무 제재를 받지 않는 그 무한대의 자유와 일탈이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
마당을 돌아 장독간에 이르자 맨 먼저 며칠 전 몹시 추운 밤 동치미국물이 얼어 부풀어 가운데로 두 갈래로 쩍 벌어져 어제 얼음덩어리 동치미를 따로 옮긴 깨어진 김칫독의 파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군가가 먹을 시원한 동치미를 품으려고 겨우내 웅크렸다 마침내 가슴이 터져버린 김칫독이 안타깝고 허망한 마음이 제게 금방 옮겨왔습니다.
원두막의 추녀 끝에는 유투브를 열심히 보는 아내의 올겨울 회심의 작품인 주먹만 한 애기메주가 평소에는 두꺼운 감색 융으로 감싸주었는데 오늘 볕이 달아 모처럼 바깥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 두꺼운 담요를 덮은 안쪽에는 수련과 부레옥잠이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도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이 집안에서 마초할배와 마초다음으로 알뜰한 보호를 받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린이합창단처럼 자잘한 자줏빛 옥수수알갱이가 빼곡한 씨앗용 옥수수는 저들끼리 합창이나 행진곡을 부르는 듯 아주 늠름하고 당당한 자세로 아우성을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화단을 한 바퀴 도는데 한 5년 전 수많은 생질 중의 하나가 가져다준 커다란 외짝 신발화분, 이제 화초도 곡식도 없이 알몸이 된 신발화분은 아직도 제 짝을 못구했는데 무려 5년째 대문 밖 동쪽을 향해 출발을 서두르지만 아직도 짝을 못 구해 맨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역시 <에덴의 동쪽>에 이르는 길은 역시 험하고 먼 모양입니다.
방에 들어와 혼자 코로나19를 방송하는 화면을 끄면서 문득 지금쯤 아내가 식사를 끝내고 어디서 차를 마실까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30년 전 서울의 감사원이나 중앙교육을 가면 상계동 사촌누님 집에 묵새기는데 일흔이 넘은 함경도아바이 원산출신 매형이 같이 있으면 한나절 내내 말 한마디를 않다가 누님이 시장만 가면 괜히 “이귀득, 이 귀득!” 누님을 부르다 누님이 돌아오면 다시 말 한 마디를 않던 생각이 떠올랐는데 제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식사와 차 마시기가 끝난 아내는 아마도 자신보다 더 심심해 죽는 이웃마을 천전리의 99세 처이모 집에 가서 한두 시간 같이 시간을 보낼 것이고 용무가 다 끝난 뒤 언양읍으로 가서 제 간식 빵과 유제품을 사고 갈치나 고등어 같은 구이용 생선을 사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자면 아직도 한참 시간이 흘러 이 큰 산 아래 마을에 해가지고 그늘이 진 뒤라야 될 텐데 저는 벌써부터 아내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