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22)아주 작은 휴머니즘
말년일기 제1223호(2021.1.22)
이득수
승인
2021.01.21 15:30 | 최종 수정 2021.01.25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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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어느 집 할 것 없이 가정상비약품을 준비하는 붐이 일었는데 그 중 가장 대종을 이루는 것이 사진에 나오는 <타이레놀>이라는 감기약입니다. 가벼운 감기나 두통 심지어 알레르기에 까지 효과가 있으니 거의 만병통치약인 셈입니다.
그런데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저 <타이레놀>을 복용해본 사람이라면 저 완강한 곱표로 막힌 포장지 뒷면을 뜯고 하얀 캡슐을 꺼내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은 일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 약을 만들어낸 회사의 포장지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무슨 맘을 먹고 저렇게 좀체 잘 뜯어지지 않는 포장법을 개발했는지, 그 개발담당자가 20대의 한창 젊고 손가락의 운동신경이 매우 부드러운 사람인지는 몰라도 운동신경이 무디어진 저 같은 노인네는 저 완강하게 가로 막은 엑스 자(字) 포장을 뜯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손톱을 깎은 지 얼마 안 되거나 눈이 침침한 날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지만 저 포장 디자인을 개발할 당시의 제약회사에서는 지금까지 어는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엑스자표시의 뒷면포장이 다른 유사제품보다 월등 디자인이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새로운 캡슐포장시대를 열었다고 기뻐하며 개발자에게 상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상비약이 뭡니까? 문득 코가 막히고 숨이 가쁘고 열이 나는 사람이 누구라도 쉽게 금방 먹고 열을 내려야 하는 약인데 저 같은 사람처럼 포장을 뜯지 못해 5분, 10분을 헤맨다면 그게 어떻게 바상약이고 상비약이 되겠습니까? 그냥 단순하게 약의 모습이 보이는 포장지 위쪽의 캡슐이나 알약 모양을 꾹꾹 누르면 뒤쪽의 얇은 포장지가 터지면서 간단하게 알약이 손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바상약이며 그게 나이 들어 감각이 무딘 사람을 배려한 아주 작지만 꼭 필요한 <휴머니즘> 곧 인간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꼭 개량(改良)을 해야 될 물건이 있는데 바로 손톱깎이입니다. 세상에는 크고 작고 앙증맞고 귀여운 손톱깎이가 참 많지만 써보신 분들은 잘 알지만 불과 몇 번 쓰지 않으면 그 날이 무디어져 손톱이 예쁘게 잘리기는커녕 이리저리 찢어지며 피가 나기도 합니다. 저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를 단단하고 편리하게 만들지 않고 그저 보기 좋게만 만드는 사람들, 특히 저처럼 나이가 들고 운동신경이 무딘 사람은 왼손으로 오른손 손톱을 깎는 것만 해도 힘이 든데 교통사고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약간 뒤로 휘어진 저는 복숭아뼈 아래쪽은 제 몸을 제 손으로 만지고 씻기가 힘 드는데 거가다 발톱을 깎는 일은 더 한층 힘든 일이지요. 또 우리가 보통으로 먹는 갈색 캐러멜도 어떤 종류는 그 포장지 빠딱종이(비닐)을 벗기는 일이 너무나 힘든 경우가 많고요.
또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빠지고 수염이 희어지는 대신 엄지발가락의 발톱이 자꾸 두꺼워지기 마련인지 어릴 적 제 아버지의 발톱을 한 번 깎으려면 손톱깎이로는 어림도 없어 새파랗게 간 낫 끝으로 조금씩 떼어내곤 했는데 이제 제가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끙끙거릴 때마다 제 아내가 나서 해결해주니 이제 저는 아내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할멈의 할배>가 되었고 제 아내가 기분이 좋아 이것, 저것 잘 챙겨주는 <휴머니즘>의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 되는데 다행히 아내는 별로 까탈을 부리지 않고 시원시원 잘 해주는 편입니다. 그건 아마도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등이 가렵거나 파스를 붙여야 할 때 반드시 제가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 한 번은 무슨 만화나 드라마에서 3남 1녀의 손자들이 부모와 8순이 넘은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막내딸이 냉장고의 콜라를 마실 때마다 김이 빠져 짜증을 내지만 다른 가족들은 모두 모르는 척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입니다. 20대의 큰 오빠가 자다 말고 거실로 나오더니 냉장고의 콜라병, 얼마 전 막내여동생이 마시고 단단히 뚜껑을 조인 병을 꺼내 다시 뚜껑을 열고는 남이 열기 쉽게 대충 닫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할머니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오더니 콜라 한 잔을 맛있게 마시고 돌아갔습니다. 막내딸만 뺀 모든 가족이 콜라 맛이 좀 떨어져도 모두들 콜라병의 마개를 좀 헐겁게 잠근 것이지요. 그게 바로 가족사랑, 노인을 보살피는 작은 휴머니즘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관광지에서 흔히 파는 효자손을 사서 늙은 할머니나 아버지에게 사다주는 사람이 있는데 요새 유행하는 노인복지차원에서 보면 <효자손>만큼 대단한 발명품도 없고 그 단순한 죽공(竹工)품하나가 바로 장수시대의 휴머니즘인 것입니다.
이튿날 모처럼 두 누님을 모시고 점심도 먹을 겸 코로나로 위축된 맘도 달래려 약속을 한 날, 이제 점점 숱이 적어지고 탈색이 되어 좀체 눈에 뜨이지 않는 수염을 한번 깎기로 하다 물을 데운 김에 목욕까지 하라는 아내의 요구대로 몸을 맡겨 모처럼 개운하기는 하지만 금방 체력이 방전(放電)이 되어 침대에서 한동안 꿀맛 같은 낮잠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서 나도 아내나 누구를 위한 작은 봉사나 배려, 그러니까 휴머니즘을 좀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마초의 간식 통을 열고 평소 두 개씩 주던 쇠고기과자를 4개나 주니 마초가 아주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곰곰 생각해보니 마초를 도와준 것은 휴머니즘의 본래 영역인 인간주의, 또는 인본주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처럼 마초할배의 작은 휴머니즘은 그만 견(犬)본주의가 되고 만 것입니다. ㅎㅎㅎ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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