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종편방송이라는 이름의 방송채널이 늘어나면서 주로 가정주부, 그것도 40, 50대의 영악한 중년여성들이 자질구레한 일상을 털어놓고 60, 70대의 원로연예인 한 사람이 한 가운데 버티고 앉아 가끔 고개를 끄떡여주는 방송이 유행을 하더니 요새는 남자 코미디언과 목사나 씨름선수 같은 엉뚱한 사내도 그 종잡을 수 없는 수다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그만 부아가 치밉니다.
그러나 평소 자잘한 일상에 지친 아내는 그 수다를 뜨는 프로그램이 생활 속의 무료함을 달래고 막힌 구멍을 뚫어주는 좋은 탈출구내지 청량제가 되어 <동치미>니 <아궁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하면 만사를 젖히고 보는 지라 저는 설령 제가 좋아하는 프로야구 롯데의 9회말 투아웃이라도 텔레비전시청을 포기하고 서재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수다 떨기 프로그램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의 대화나 결론의 방향이 어떻게 하면 시부모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젊은 아내와 남편의 핵가족이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명절날 돈 몇 푼을 보내고 마음 편히 살아갈지, 또 그런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빠져나갈지 인물도 곱고 연기력도 좋아 국민적 스타였던 여배우가 참으로 영악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하면 엄앵란이나 김영옥, 전원주 같은 점잖은 원로배우도 자기도 그와 비슷한 견해라는 추임새를 넣고 코가 커다란 원로목사 한명도 연신 찬사를 보내는 것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렇지요. 그들의 말이 앞뒤 문맥만 따지만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힘든 세상에 자기 삶만 즐기다 가면 되니 굳이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비혼주의의 주장, 또 어쩌다 결혼을 해도 신혼생활을 좀 더 즐기기 위해 아이를 낳는 일은 뒤로 미루고 어쩌다 아이가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그만으로 자신들의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예사로 하고 찬동을 하곤 합니다.
아니, 만약 아무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머지않아 자기가 연예인이라는 인기는 누구에게서 받고 인적이 끊어진 고층아파트촌에서 혼자 미아가 되어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있고 방송심사위원회가 있어 방송의 내용이 공익에 맞게 조율을 하고 심사를 한다는데 자기 아이가 보다 위생적이고 신세대에 맞게 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시어머니나 할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차단을 시켜야 된다는 저 고학력의 전문직업종사의 여인들, 그러면서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출산을 장려해야 된다는 말을 단 한마디도 않는 방송의 출연자나 프로그램을 왜 그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심사당국은 그냥 못 본 척 외면을 하는지...
한 때 비타민 같은 보조식품이야기가 주제가 되어 영원히 늙지 않는 피부와 몸매를 하느님말씀처럼 존중해마지 않더니 요즘은 갑자기 중년의 고민 경년기장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여인, 특히 자아실현의 기회가 거의 없이 전업주부로 살아온 제 아내 같은 사람은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고 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며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에 홍조를 띄고 모든 신체기능이 떨어지는 모진 갱년기를 앓는 것을 저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은 그런 50대 중반에 마지막 서기관승진을 하느냐 마느냐, 퇴직 전에 아이를 몇 이나 여의느냐로 갱년기 같은 호사스런 병을 앓을 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창 갱년기장애를 호소하는 사람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한 70이 넘어 머리가 하얗게 세어 생각해보면 아직도 가끔 가슴이 뛰는 갱년기가 얼마나 화려하고 행복한 시절인데 갱년기를 인생이 익어가는 시기라는 생각은 몰라도 자기는 여전히 젊고 건강하고 아름답기 위해 온갖 약품과 운동과 비책을 찾아 전전긍긍하는 여자들, 안 그래도 평소 백옥처럼 희고 조각처럼 아름다운 저 여자들이 욕심도 무슨 욕심을 저리도 내는 건지....
한 5년 전 아내가 부유하고 교양 있는 6,70대 여사님들, 제 아들의 학무모의 모임을 통해 제주도로 2박3일 여행을 가서였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7,8명의 모든 회원들이 모두 가방에서 주섬주섬 각종 약을 꺼내 먹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 최 연장 회장의 알약수가 유독 많아
“아니, 큰언니는 말야.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먹어?”
막내회원이 묻자
“사실은 어제 말이야. 제주도 바닷가를 거니는데 어중간한 중늙은이 사내들이 여럿 나를 하도 힐끗거려 오늘 혹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미리 피임약을 먹고 있는 거야.”
말도 아닌 소리를 하면서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그냥 단순히 웃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닌 것이 비록 70이 넘은 여인이지만 아직은 가슴이 뛰던 경년기와 그 이전의 아스라이 흘러간 시간이 그립다는 것이지요.
제가 명촌리로 이사 온 후 한번은 장모님이 오셔서 이웃천전마을의 처이모를 만나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순란아, 니가 댕기는 구포 경로당엔 제일 큰 언니가 몇 살이야.”
“92세. 그럼 언니 댕기는 천전 경로당은?”
“우리 경로당은 우리 같은 젊은 사람이 주로 다니지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없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아주 천진스럽게 웃었는데 세상에 그 때 이모님의 나이가 여든다섯(85세)였습니다. 85세의 할머니가 예사로 <우리 같은 젊은 사람>을 외치는 이 시대에 갱년기는 없습니다. 설령 병이 들었든 먹고 살기가 힘들든 이 세상의 모든 노인들은 <우리 같이 젊은 사람들>입니다. 갱년기 장애, 그 참 웃기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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