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이다.
첫사랑과의 달콤한 키스는 기억도 없다. 가장으로서의 삶의 무게만이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거린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무대 위로 내 몰린 뒤의 당혹감이 투지를 불태운다.
롤러코스트의 인생이었지만 한번도 고해苦海의 삶은 아니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결정이었고 사욕私慾보다는 대의大義였다.
집사람이 이죽거리며 말한다. “ 그래요 당신은 참 멋있게 잘 살았어요. 그럼 애들과 나는 뭐예요?” 집사람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나의 인생관이 ‘아내와 함께, 가족과 함께 With my Wife, With my family’ 이지만 너무나 익숙한 인연을 헤아리지 못하고 남을 위해서 개폼 잡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자! 다시 해보자.
젊었을 때의 기상과 냉철한 판단으로 이제 나라(?)는 그만 구하고 내 가정이나 잘 세우자.
하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나의 초등학교 등교 길은 사계절이 다 아름다웠다. 서울인데도 낮은 야산을 넘어 가야 하는데 야산의 왼쪽에는 배과수원, 오른쪽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봄이 되면 하얀 배꽃이 먼저 핀다. 배꽃이 질 때쯤 핑크빛 복숭아꽃이 피는데 좌우 과수원 사이에 아카시아 나무로 울타리를 만든 오솔길을 걷노라면 향은 없지만 군락을 이루는 꽃 잔치가 장관이었다.
배꽃과 복숭아꽃이 지고 나면 울타리로 심어 놓은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여름이 되면 좌우의 아카시아 나무가 울창해지면서 오솔길은 시원한 터널이 된다. 가을이면 배가 탐스럽게 익는다. 하교 길에 서리해서 먹는 배의 사각거림과 달콤함은 잊을 수가 없다. 주인한테 걸려도 주인 집 앞에 손들고 5분 정도만 서 있으면 된다. 정 먹고 싶으면 서리하지 말고 달라고 하란다. 서리하러 들어가서 안 익은 것 따고 나뭇가지 부러뜨린다고 그냥 달라고 하란다. 상품 가치가 떨어진 배를 깎아 주기도 하고 한 봉지씩 주시면서 다시는 과수원 들어가지 말라 하신다. 옛날에는 정도 많고 인심도 좋았는데…
겨울이 되면 야산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지만 눈이라도 오면 정말 신이 난다. 언덕 꼭대기에서 가방을 깔고 미끄럼을 타다 등교도 잊은 적이 있다. 그 시절은 에버랜드 같은 게 없었기에 정말 신나는 청룡열차였다.
강한 성격인 내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이 많은 게 유년 시절에 자연과 벗하며 살아서 일 것이다.
둘, 노력하면 된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지독한 음치였다. 수업 시간 중에 가끔 오락시간을 가질 때가 있는데 내가 반장이다 보니까 꼭 노래를 시킨다. 끝까지 버티다 할 수 없이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오락시간이 끝나 버린다. 얼굴은 빨개지고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팝송pop song을 접하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팝송pop song을 따라 불렀고 변성기를 거치며 목이 트였다. 점점 자신감이 생기며 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훗날에 쌍용화재 합창단 일원으로 쌍용그룹 합창대회에 나가 국립극장 무대에 설 수가 있었다.
수영은 도저히 못 할 것 같았는데 쌍용화재 다닐 때 새벽 강습을 2년 받고나니 지금은 접영까지 다 할 수 있게 됐다.
가치관이 완성되어 가는 젊은 날에 확실히 각인된 것이 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셋, 기차를 멈추다.
고2 때의 일이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께서 깨우시는 거다. 이제 4시밖에 안 됐는데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니 형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거다. 육군 훈련소에 있는 형을 어떻게 만나냐고 하니 잔말 말고 따라 오라 하신다.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 간 곳은 서울역이었다. 서울역장이 나와서 아버지께 90도 인사를 한다. 그 시절이나 가능했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 호송 열차를 서울역장의 끗발로 세운 것이다.(그때 아버님이 신문사 국장이었는데 그때는 언론의 위세가 대단하긴 했다.)
모성애가 무서운 게 바짝 군기가 든 다 똑 같아 보이는 신병들 중에서 어머니는 형을 정확히 찾아내시는 것이다. 바리바리 싸들고 간 음식들을 펼쳐 보이시며 먹으라 하지만 형은 울고만 있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군대를 가지 말든지, 가게 되더라도 절대 부모님을 부담스럽게 하지 말자고.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를 해서는 집에 편지할 때마다 잘 지내고 있으니 면회를 오실 필요 없다고 썼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제대하는 그날까지 한 번도 면회를 안 오셨다.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큰 절을 올리고는 일어나지 못하고 서러움과 군대의 불합리함이 복받쳐 대성통곡을 한 기억이 있다. 이제는 무지개가 되어 잡히지 않는 추억이지만 서러움의 흔적은 있다.
넷, 운동은 몸만 건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편하게 한다.
나는 지금도 키가 작지만 초등학교 때는 더 작고 몸이 약한 아이였다. 5학년 때 전교회장에 전교 1등을 했지만 체육만 ‘우’였다. 어머니께서 좋은 중학교를 보내기 위해 사립학교로 전학을 시키려 하자 교장선생님이 말리시며 축구부에 들어가면 몸도 튼튼해지고 체육특기자로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 말씀에 팔자에도 없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당연히 후보였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열심히 했고 2학기에는 주전으로 뛰면서 결국은 체육특기자로 중학교에 진학했다.
어려서 전문적으로 축구를 배우니 기본기가 튼튼하고 체력이 좋아 커 가면서 많은 혜택을 본 것 같다. 중 고등학교 때 체육대회를 하면 축구는 늘 우승이었다. 동네에서 공 좀 찬다는 애들하고는 클래스가 다르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위의 평판도 좋았다. “쪼그만 녀석이 공부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운동도 잘하네.” 대학 체육대회 때도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고 군대 가서도 연대대표로 뽑혀 훈련 열외 받고 축구연습만 하고 대회 끝나면 포상 휴가가고… 튼튼한 하체를 지녔기에 골프도 싱글을 치고 작은 키에도 장타를 친다. 운동을 잘해서 평판도 좋게 받으면서 편하게 살았던 것 같다.
다섯,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아들만 4형제에 둘째로 태어난 나는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녀석들이 부러웠다. 여자들은 늘 깨끗하고 노래를 잘 하는 줄 알았다. 특히 예쁜 애들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남녀차이는 없고 인간성이 어떠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모자 똑바로 쓰고 가방 옆에 안 끼고 술, 담배 안 하는 모범생이었던 나는 고 2때까지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2~3등, 전교에서 30등 정도했다. 우리학교가 매년 서울대를 40~50명씩 보냈으니 전교 30등도 좋은 성적이었다.
고 3때 내 인생을 뒤틀리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때 부회장 하던 애를 분식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늦바람(?)이 무섭다 했는가? 공부만 하던 놈이 여자친구가 생기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부는 안하고 빵집으로 공원으로 놀러 다녔다. 결론만 얘기하면 S大는커녕 Y大도 떨어졌고 후기로 H는 붙었지만 재수한다고 등록을 안 했다. 대성학원에 장학생으로 재수를 시작했지만 전두환이 위수령을 발동하면서 대학이 가을까지 수업을 안 하는 거다. 여자친구는 매일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이런 젠장! 입시제도는 예비고사를 1달 남겨두고 갑자기 바뀌는 것이다. 본고사 폐지. 아~ 암기과목들 공부 안 했는데. 국,영,수만 공부했는데… 재수도 완전 실패! 경희대 물리학과에 겨우 입학한다. 그 이후에 쌍용그룹에 1등으로 입사, 최단기 과장진급 등 정말 고생 많이 하고 노력 많이 했다. 그냥 똑바로 갔으면 될 걸 먼 길을 돌아 돌아갔다.
여섯, 우뇌 활성화하기
대학 2학년 때의 일이다. 장영자, 이철희 부부가 1,000억 원을 사기 친 사건이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조희팔이가 4조 원을 사기치고 하니 1000억 원이 크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80년도 초에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물리과 동기들 하고 과연 천억이 얼마나 큰돈이냐고 얘기하고 있었다. 만 원짜리로 서울 운동장에 4층짜리 건물만큼 쌓을 수 있다는 등 1초에 한 장씩 센다고 해도 115일이 걸린다는 등 갑론을박 중에 누군가 얘기를 했다.
“야 그거 아보가드로 넘버에 √(root)만 씌우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큰 숫자야?” “야! 엄청나게 해먹었네.”
다들 동감하는 멋진 멘트였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사회현상까지도 물리적으로 해석을 하다니…’ ‘이러다 외골수로 빠지고 인생을 한 쪽 방향으로만 사는 거 아냐?’
그때부터 우뇌 키우기를 시작했다. 인문서적을 열심히 읽고 철학과 음대 강의도 듣고 시도 써보고 수필도 써보고 편협적인 사고를 갖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 피아노를 전공한 집사람과 라디오나 드라마의 배경음악을 듣다가 어? 저게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인데 하면 집사람이 깜짝깜짝 놀란다. 편협적이지 않고 합리적으로 살려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많은 경우의 수를 따질 줄 알게 되었지만 나이가 먹어가니 이때까지 살아온 경험으로만 판단하고 정리하는 선입관과 편견을 갖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스스로 자부해 본다. 좌우 뇌를 균형 있게 발달시켜 그래도 지금까지는 합리적으로 살아왔다고.
일곱, 대선을 치르다.
쌍용화재 과장 때 일이다. 나를 매우 아껴주시고 좋아하셔서 미국 맨해튼에 국제금융과정 연수까지 보내주셨던 대표이사 사장님이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다. 전 조직에 신망도 두터웠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그룹에서 면직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장님을 만나서 얘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인사담당 상무가 사조직을 키우며 회사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기에 자르려고 했더니 그 상무가 먼저 그룹에 손을 써 자기를 그만두게 한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잘못된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내가 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사장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고민하다 사장하고 동격인 노조위원장에 출마하기로 했다. (당시 노조는 회사와 결탁된 어용노조로 문제가 많았다) 조직도 돈도 없는 야당노조가 전국지점들을 방문해서 유세를 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인사부의 방해공작, 음해, 공갈, 협박,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권모술수가 난무했고 30대 중반에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상처였다. 당연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전 조직이 다 알고 있었고 노조 안 해도 장래가 보장된 놈이 봉사 좀 하겠다는 데도 반대파가 있었다.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의大義에 관심이 별로 없다. 옳고 그른 것보다 나한테 뭐가 이익인가 내가 편한 게 뭔가에 방점을 둔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 지점 승리, 본사 승리로 완승을 거뒀다.
하지만 회사라고 하는 거대조직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선거관리위원장을 매수하여 우리가 부정선거를 했다고 투표결과를 미루는 것이다. 단신투쟁도 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고 설상가상으로 투쟁 중에 IMF가 터졌다. 회사는 감원에 들어갔는데 감원 기준은 우리 쪽에 십시일반으로 5만 원, 10만 원씩 입금한 사람들이었다. 유능하고 열정적인 동기들과 나를 지지해준 선후배들이 잘려나가는 것을 더는 방관할 수 없어 사장과 단판을 지었다.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회사를 떠날 테니 더 이상의 감원은 없는 것으로 합시다.” OK를 받고 회사를 떠났지만 그 후로도 많은 나의 지지자들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노조위원장은 횡령혐의로 실형을 살고 인사부장은 간암으로 쓰러지고 인사담당상무는 잘리고… 3적의 몰락이 있었으나 이후 또 반전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고 가장 큰 생채기를 낸 사건이었다. 지금도 수백 명의 가정을 파괴한 죄수로서 반성하며 살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은 게 서러워 그 반전은 안 적기로 한다.
여덟, 첫 번째 실패
윗동서가 정형외과 원장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주변사람들만 좋지 본인에겐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다. 병원 하기를 싫어하더니 결국은 병원을 팔고 스포츠센터를 지었다. 나는 쌍용화재에서 노조위원장 선거로 단식투쟁을 하고 있을 때인데 처형이 전화를 해서 부도나게 생겼다고 3천만 원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준공검사만 남아 있었고 수영장에 물도 차 있었다. 부도가 나면 내 사랑하는 아내의 친정이 몰락하게 생겨 (처갓집의 3층짜리 건물, 2천평 땅들도 담보로 잡혀 있는 상태였다) 3천만 원을 보내줬다. 이후 3~4일 간격으로 5천, 6천... 결국 퇴직금 담보, 아파트 담보로 많은 돈을 보내 줬지만 IMF 칼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3주 정도 쌍용화재 노조의 투쟁을 마치고 회사를 떠나 다음 날 스포츠센터 사장으로 취임을 했다. IMF만 안 터졌으면 회원권 팔아 탄탄하게 운영이 되었을 텐데 회원권 분양이 전혀 안 되는 것이다. 퍼블릭Public으로 전환하여 오픈open을 했다. 대성공이었다. 영업이 잘 되자 빚쟁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 사장 수영장 내려 가봤어? 명절날 목욕탕보다도 사람이 많은데 왜 내 돈 안 갚아?"
비서가 물어본다. "사장님, 비결이 뭐예요? 모든 빚쟁이들이 찾아오면 30분 정도 큰소리 나고 욕하고 하다 10여분 조용히 있다 나가면서는 사장님 두 손 꼭 잡고 90도로 절하고 가는데... 비결이 있어요?"
"별거 아냐. 빚쟁이 피하지 않고 다 만나주고 억울한 얘기 잘 들어주고 어제까지 번 돈 솔직히 보여주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갚을 수 있다. 지금 독촉하시면 은행권 돈도 못 갚는다. 그러면 경매 들어간다. 공멸하지 말고 공생합시다. 나한테 경영 잘하라고 전하고 갈 수밖에 없지. 샤시 사장은 공사대금으로 받은 아파트도 내 숙소로 그냥 쓰라더라."
5개월 정도 운영을 하니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이 벌리니 사단이 났다. 동서가 숨긴 부채가 나오는 것이다. 군산의 양대 깡패들(백악관파, 그랜드파)에게 빌린 5부 이자의 10억! 이것까지는 견딜만했다. 그네들 사무실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2명의 두목과 2명의 참모들에게 빚 독촉을 받았지만 거꾸로 2천만 원을 빌려오는 등 잘 헤쳐나갔다. 나중에는 전국구 깡패가 와서는 8부 이자에 2억이란다. 2번을 차비 정도만 줘서 보냈지만 동서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다. 동서를 만나 다른 사람 사장으로 쓰라고 하고 그날로 짐을 쌌다.
그 후 외식업을 시작하여 2년 만에 경제를 회복했다. 두 번째 실패는 외식업이 망하는 건데 이건 너무 크게 망가져서 그런지 아직도 회복이 안 된다. 내가 나이가 든 건가, 한국경제가 침체기라 그런가? 아무튼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보험과 외식업인데 자본이 없으니 외식업은 못하고 보험업으로 컴백을 했다. GA(General Agent), 재보험브로커에서 월급쟁이를 하면서 보험의 모든 종목과 모든 조직을 경험한 업계의 원로로 욕 안 먹고 있다.
아홉, 적은 항상 가까운 데 있다.
보험업계에 환멸을 느껴 아예 새로운 길을 걷는다. (Oink라는) 돼지고기 특수부위 전문점을 대학 1년 선배와 같이 창업하여 승승장구 한다. 내가 모르는 분야라 1년을 준비해서 오픈을 했는데 3개월 만에 홍대의 명물로 자리잡았고 방송 3사에 13번 출연했으며 거의 모든 신문, 잡지에 기사가 떴다. 그때 내가 직접 개발한 연기냄새 잡는 구이기구는 지금도 특허기간이 남아 있다. 가맹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며 많은 돈을 벌자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 미용실 프랜차이즈를 하다 망한 친구가 찾아와 자기가 프렌차이즈 경험이 있으니 기존 팀장들을 내보내고 자기 좀 써달란다. 대학 때부터 만나오던 친구고 삼성물산서 퇴직한 유능한 친구라 고용을 했다. 여기서 사단이 났다. 편한 친구라 믿고 썼더니 이놈이 선배한테 붙어서 날 음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불합리한 것을 못 참던 나는 모든 사업장을 그들에게 다 넘겨주고 고기를 독점 공급하던 대전 양돈축협에 찾아갔다. 50페이지짜리 사업계획서를 만들어가서 브리핑 후 대전 양돈 축협에 1억을 펀딩 받아 GoGi라는 브랜드로 천안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한다. 이후 천호점, 분당점을 오픈하고 세 군데서 번 돈으로 결국은 홍대 본점을 다시 찾아왔다. 참 긴 여정이었고 힘든 길을 멀리도 돌아 돌아왔다. 선배나 동기는 교과서대로 둘 다 많이 어렵게 살고 둘이도 서로 원수가 되어있다. 정말로 적은 가까운 데 있고 측근의 배신은 대미지가 크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웠다. 앞에서 언급한 노조 싸움에서도 우리 측 선거위원 중 한 명이 통장을 복사해서 인사담당 상무에게 갖다 주면서 자기는 살려 달라하는 바람에, 감원의 기준이 우리통장에 돈 보낸 사람들이었다.
열, 운도 노력으로 창출할 수 있다.
가을이면 동문체육대회를 하는데 잘 된 동문들의 협찬품이 많아 아이들과 같이 가서 뛰어 놀고 선물을 한 보따리씩 받아왔었다. 그런데 어느 한해는 협찬품이 별로 없어 아들이 징징 되는 것이다. “아빠! 괜히 왔나 봐. 재미도 없고 선물도 안 주네.” 아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는데 사회자가 모두 운동장으로 나오라는 거다. 500명 중에 가위 바위 보로 1등 한 명에게 제주도 여행권을 준다는 것이다. 아들한테 얘기했다. “아빠가 저거 타 줄게.” 남자는 주먹을 선호하니 남자를 잡아서 보를 내서 이겼다. 그러면서 옆 사람이 내는 것을 봤다. 500명이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는 아까 냈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또 내게 되어있다. 가위를 내서 이기면서 또 옆 사람을 보고 대비하고… 전부 한 번에 이기고 500대 1을 뚫고 내가 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노력하면 정말 안 되는 게 없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열 하나, 하나님을 만나다
불교신도 회장을 종신으로 맡고 있는 어머님 밑에서 교회는 꿈도 못 꿨고 외식사업도 내 단점인 정에 이끌려 투자를 잘못하는 바람에 48세에 망했지만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믿는 나로서는 종교에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50세 되던 해에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스테반보리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을 읽고 교회에 갈 마음이 생겼다. 나이도 이제 50이 됐으니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도 되겠다는 마음에 집사람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착하게 살고 마음의 위안이나 받자고 다니기 시작했지만 정말 좋은 교회인 우리 ‘제자들 교회’에서 교육 받고 말씀과 기도 속에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베트남에 학교를 지어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내라는 비전vision도 받았다. 매일 새벽기도도 하면서 말씀과 기도 속에 살지만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내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세상일에 기웃거린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많이 행복하다. 과거에 집사람과 스테이크를 썰 때보다 지금 4천 원짜리 잔치국수를 먹으며 나누는 대화가 더 진지하고 귀한 시간이다. 나를 배신한 선배와 동기를 용서하고 지금은 모임도 같이한다. 내가 변한 모습을 보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후배를 보며 흐뭇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 서면 너무 초라해져 자괴감이 든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한테 덜 부끄러울까? 하나님 앞에 가서 “저 정말 열심히 잘 살았지요? 근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정말 힘들었거든요”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나를 낮추고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숙제. 아! 숙제 검사를 언제 받을 수 있을까? 지금은 아닌데. 숙제 다 못했는데…
에필로그,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놈이 60이 되기 전에 인생을 되돌아 봤다. 아직 체력도 열정도 살아있는데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나이들이 무기력하다. 나도 무기력해지기 싫어 정수리에 대못을 박는다는 심정으로 써봤다. 지기 싫어하고 불의를 못 참고 아무리 옳은 일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을 몰랐던 저돌적인 성격, 그러면서도 내면으론 정이 많아 징징대는 놈들한테는 백전백패 하는 아둔함! 그래도 나는 참 행복한 놈이다. 지금도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아내, 씩씩하게 잘 성장한 아들 딸, 나를 인정해 주는 선후배들, 제자들 교회의 성령 충만한 아름다운 사람들... 검소하되 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살아볼 랍니다. 70 즈음에 다시 쓸 때는 주님의 비전vision도 이루고 온유와 평강 속에서 섬기는 삶을 살아왔다고 쓸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8. 가을의 끝자락에.
P.S.
하나, 자랑스럽거나 잘 한 일
- 하나님을 만난 일
- 집사람과 결혼한 일
- 본사에서 기업보험만 취급하던 내가 폐쇄하겠다는 지점을 1년 반 만에 수도권에서 1등 지점 만든 일
- 남들보다 하루를 길게 살았던 일(새벽에 골프연습을 하고 영어학원 갔다가 사무실에 8시 도착, 23년째 하루 4~5시간 정도 잔다)
- 군산 깡패 두목들과 그 참모들에게 혼자서 빚 독촉 받다 거꾸로 2천만원 빌려온 일
- 대전 충남 양돈조합에 사업계획서 하나로 1억 펀딩 받은 일
- 늘 운동을 하며 튼튼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일
둘, 아쉽거나 부끄럽거나 잘못한 일
- 하나님을 깊이 못 만난 일
- 자신감이 지나쳐 교만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일
-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일(특히 아직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일)
- 예쁜 여자를 좋아한 일
- 사람을 너무 믿는 일
- 외식업을 망해 먹은 일(특히 부채처리를 잘못해 아직도 빚을 남긴 일)
- 술, 담배를 끊지 못한 일
- 경제력 회복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지 않고 안일한 구상만 한 일
<Guardian Korea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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