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정의란 무엇인가? 두 가지 사례에서 본다.
지난달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을 거듭 천명하였다. 사흘 지난 뒤인 2일엔 그의 장모가 3년 징역 실형을 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조국 교수 부인 정경심 교수 역시 표창장 위조 혐의로 4년 징역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 상태이다. 모두 항고심들이 남아 있지만 표창장 위조에 4년과 25억 횡령에 3년이 공정한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정 교수의 건은 항소심에서 검찰의 증거 조작으로 거의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무엇이 공정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양자 간에 공통된 것은 ‘친인척 비리’라는 점에서 같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를 펴내자, 그의 아들 애덤 샌델이 ‘편견이란 무엇인가’(와이즈배리, 2014)를 출간했다. 아버지 샌델은 수많은 실전 다툼의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칸트, 롤즈와 같은 법철학자들의 견해들을 원용해, 정의와 공정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있다.
‘정의’ 앞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편견’이다. 윤석열은 2013년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과 관련한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발언을 두고 ‘핵사이다’라 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귀에 의아스럽게 들리고 ‘과연’ 그런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버지 샌델은 책 마지막 부분에 자기의 형이나 아버지 그리고 일가친척들의 범행, 즉 친인척 비리 앞에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을 상반된 두 가지 사례들을 통해 소개한다. 조국과 윤석열 모두 가족 앞에 정의란 무엇인가로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마당에 샌델의 저서를 귀감 삼아 오늘의 우리 현실을 진단해 본다.
‘형제를 지키는 사람-벌저 형제’와 ‘형제를 지키는 사람-유나바머’의 두 사례를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벌저와 화이티는 사우스 보스턴 주택 단지에 일곱 형제들 가운데 두 형제간이다. 벌저는 공부를 잘 해 보스턴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장(1978-96), 그 뒤 7년 동안 보스턴대학 총장을 지냈다. 동생 벌저와는 달리 형 화이티는 은행 절도범으로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한 다음에도 갈취, 마약 거래와 조직 범죄의 우두머리 등 19건의 살인 혐의로 1995년 도피 이후 연방수사국의 ‘10대 지명 수배’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형 화이티에 대한 동생 벌저의 태도이다. 벌저는 도피 중인 형과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했지만, 형의 거처를 모른다 하면서 수사 당국에 협조하지 않았다. 2001년 재판에서 검사는 벌저를 향해 “그렇다면 증인은 매사추세츠 사람보다 형에게 더 충직하군요”라고 하자, 벌저는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저는 형을 더 걱정합니다. 형에게 피해가 간다면 누구에게도 협조하고 싶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제게는 형을 체포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협조할 의무가 없습니다.”(마이클 샌델, 331쪽)고 대답한다.
이 소식을 들은 보스턴 사람들은 벌저에 감탄한 나머지 “형제는 형제이지 않아요, 식구를 밀고할 수는 없잖아요”(보스턴 글로브)라면서 벌저를 찬양했다. 그러나 어떤 기고가는 벌저를 두고 “그는 올바른 규범을 택하기보다는 거리의 규범을 선택했다”라고 비난한다. 끝내 벌저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2003년 보스턴대학 총장직을 사퇴했다. 총장직을 사퇴하면서까지 형을 구하려 했다.
벌저의 사례와는 정반대되는 사례를 샌델 교수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유나바머unabomber’란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를 향해 무차별 테러를 감행하는 범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17년 간 폭탄 제조범 유나바머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폭탄 제조를 하자면 고도의 기술과 동기를 가진 범인이 아니면 안 된다.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 나가기 때문에 아무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신문기사를 읽은 뉴욕 스케넥터디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46세의 동생 데이비드는 범인이 자기 친형일지도 모른다고 연방 수사 당국에 연락을 해 1996년에 형을 체포하게 했다. 동생 데이비드는 사형까지는 아닐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형은 사형언도를 받았다.
형은 데이비드를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동생을 두고 형을 배신한 ‘또 하나의 가롯 유다’라고 했다. 동생은 참담한 심경으로 “형제는 서로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형을 죽음으로 내 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토로하였다. 형을 고발한 대가로 그는 법무부로부터 100만 달러의 포상금을 받았다.
동생 데이비드가 형을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형의 테러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이 형을 죽음으로 이끈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윤석열의 장모와 아내의 경우는?
위 두 가지 남의 나라에서 생긴 사례들이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윤석열은 장모 최은순 씨가 “10원 한 장 남에게서 받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자 말을 전달한 사람이 와전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차라리 윤석열이 벌저와 같이 “대한민국 사람보다 장모에게 더 충직하려 합니다” 하고 장모를 지켰더라면 일부 시민들로부터 박수라도 받았을 것이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장인의 과거 전력 문제가 생기자 “그러면 제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고 항변했듯이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발언은 벌저의 발언만큼 효과를 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더 이상 문제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벌저의 경우는 형을 지키는 동생의 우직함에 찬사를 보냈음에도 대의는 결국 그를 보스턴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논어에도 보면 공자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아버지가 남의 집 양을 도둑질 한 것을 보고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물은 적이 있다. 공자는 부자간의 의를 위해 고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양 한 마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살인을 했을 경우, 더욱이 폭탄 테러범일 경우에도 공자가 아들 손을 들어줄는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공자는 첫 번째 사례의 공정과 정의관을 가지고 있었던 같다.
윤석열은 지금 대학총장직 정도가 아니라 한 대통령이 되려한다. 자기 장모를 인지상정에 의해 ‘10원 한 장 안 받았다’고 옹호와 변호하는 것은 벌저와 같이 일부 칭송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단서가 있다. 벌저는 형을 선택한 대신에 대학총장직을 버렸다. 그래서 적어도 1심에서 장모가 3년 징역형을 받은 이상, 혐의가 인정된 것 하나 만으로도 대통령 후보직을 던져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윤석열은 ‘10원 한 장’도 번복해 버리고 대통령 후보직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또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벌저 같은 태도만이라도 보여 주기 바란다. 그래서 윤석열은 지금 오빠의 범행을 감싸던 안티고네 같지도 않고 벌저 같지도 않다. 그래서 그는 이쪽과 저쪽을 향해 좌우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기 살 길 만을 찾는 오스트레일리아 야생동물 같이 말이다. 그러나 벌저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대학총장 직을 버리고 형을 지켰다.
데이비드는 형을 사형수로 법정에 넘긴 대가로 받은 100만 달러를 형 때문에 죽은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같은 책, 333쪽). 윤석열이 앞으로 이 정도라도 할 수 있을 위인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윤석열이 앞으로 형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대학총장 직까지 버린 벌저 같이 될지, 형을 법정에 넘기고 받은 포상금으로 사회봉사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 마당에 다시 한 번 윤석열이 국정감사장에서 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그의 이 말이 지금 와서 다른 버전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나와 가족에게 충성한다”라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바뀐 버전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기울어질 것만 같다.
아니 이 바뀐 버전이 윤석열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첩경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것만 같다. 즉, 돌이켜 볼 때 지금의 윤석열이 왜 ‘박근혜를 탄핵했는가’와 불과 5년 사이에 박근혜 심판과 함께 탄생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 ‘자유민주주의 파괴범’이라고 하는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즉, 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윤석열의 가족 문제는 2010년경 이후부터 축적돼 온 것이다. 아내 김건희와 장모 최은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법적 문제를, 지금부터 10여 년 전부터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12년 결혼하고 2013년 요양병원 사건이 생겼다. 이때부터 윤석열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충성하려 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살아있는 권력을 청산하려 하기보다는 살아있는 권력 앞에 수시로 옮겨가며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2017년부터 그는, 박근혜는 이미 죽어가는 권력, 그래서 새로운 권력에 줄서야 했고, 2020년 총선 전후엔 여당 민주당이 참패할 것으로 누구나 예단하고 있던 마당에 조국의 목줄을 끊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권력으로 이동하려 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르는데, ‘조국의 시간’에서 조국이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내용이다. 윤석열은 앞으로 계속 자기와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선 나라가 망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 것이다. 그 야생동물의 생존비밀 같이 말이다. 그래서 그에겐 지금 생존의 전략 밖에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윤석열은 철저하게 자기와 가족에 충직했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고 포장을 해 윤석열을 띄우고 영웅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족벌 언론들의 사회적 성격이 윤석열의 그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4.7 보궐선거에서 먹혀들었고, 내년 3.9 대선까지 약발이 갈지 모른다.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은 겉과 속이 다른 여름철 수박과 같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일부는 2008년에 이명박에 속듯이 또 속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박주민 의원의 말 대로 그 대가는 모두 우리 국민들 몫으로 돌아오고 국민의 큰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가’는 지금도 치르고 있고, 앞으로는 윤석열의 그것을 치를지도 모른다.
윤석열에게 마지막 당부하고 싶다. 동생 데이비드 같이 형을 고발하라고. 다시 말해서 ‘처와 장모를 고발하라’고. 그러나 이러한 내부자 고발도 못 할 것이다. 윤석열 자신이 내부자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고발한 동생 데이비드 자신은 잘못이 없었다. 그래서 형을 고발하고 포상금까지 받았다. 그러나 윤석열은 앞으로 자신이 고발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후보 사퇴도 못 할 것이다. 사퇴 순간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나라는 거덜 나고 말 것이다.
국민의힘에 들어가는 수순을 밟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한 외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석열의 처음이고 끝이라고 본다. 국민의힘이 윤석열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X파일과 Q복음 문서
윤석열의 X파일이 있듯이 기독교에는 누가 언제 어디서 썼는지 모를 Q문서라는 것이 있다. 성서학자들은 50-60년 사이에 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상의 정체불명의 문서를 ‘Q문서’라고 부른다. Q복음서 가운데(Q20)서 윤석열에게 들여 주고 싶은 구절이 하나 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네 눈 속의 티를 빼어 주마’라고 말 할 수 있겠느뇨? 이 위선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으리라.”
우리 민족의 격언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자, 제 눈에 피눈물 흐르리라!”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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