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미서의 시 '점, 심點心' 감상문 (1)판도 포푸루스 의식혁명으로 간다!

김상일 승인 2019.11.22 22:47 | 최종 수정 2021.06.12 12:07 의견 0
고독한 산티아고 순례자 ⓒ인저리타임

점, 심點心 / 박미서

수많은 새들에게
열매 내준 팽나무 하나,
바라보는 이슬을 위해
켜 주는 외로움 부드러웠다

진초록잎들, 달라 보이는
단풍으로 눈부시게
내리면서 아무 두려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순례자의 청원의 그림자,
스스로 꿈을 이루어가는
억새풀 힘, 감싸듯 떠올랐다

아름다운 사람의
두 눈을 켜놓을 때처럼
고개 들어 보이는 것마다

하늘색 물보라 스치는 움직임
결핍없는 점들의 선물,
마파랑의 미로迷路 속
눈부시게 기이한 그물코

함초롬히 눈 뜨는
천사들의 귓속에서
사그랑사그랑...

내밀한 모든 뿌리빛 통하여
충만하게 강강술래 이루어,
네 따스한 슬픔이 일으키는
점 하나 갖게 되었다

무작정 있는 궤도의 點,
밝음의 심心,
한 덩어리 투명한 잎,
나뭇가지 살아내는
찬눈물의 쪽달 데려오리라

*함초롬히 : 젖거나 서려있는 모습이 가지런하고 차분한 모양.
*마파랑 : 남풍

점은 투명하다

피타고라스가 점에 대한 정의로부터 서양 기하학이 시작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점의 연장이 선이 되고 선의 연장의 부피가 된다. 그래서 ‘점’은 서양 사상에서 ‘원자’와 같아서 만물이 구성하는 기본 입자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의해 이러한 점으로서의 실체는 없다는, 아니 점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20세기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과학은 점에 대한 정의와 함께 새고 지고 한 것 같다. 드디어 20세기 수학의 대부 힐베르트는 점이 ‘의자’일 수도, ‘돌멩이’ 일 수도, 집일 수도, 나무일 수도, 있다고 했다. 피타고라스가 점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로 본 데 비해 힐베르트는 혁명적인 정의를 내놓은 것이다.

박미서의 시제, 점.심에서 ‘점’은 한의 ‘궤적’이고 ‘투명성’이다. 즉, 박미서는 어떤 량과 질의 개념으로서가 아니고 그 량과 질에 상관없이 궤적을 그리는 투명성에서 점의 의미를 찾고 있다.

무작정 있는 궤도의 點
밝음의 심心,
한 덩어리 투명한 잎(8연)

‘무작정 있는 궤도의 점’

점을 ‘무작정 있는 궤도’로 정의한 것은 최소 단위로소의 점이 아닌 힐베르트의 그것과 같이 무엇이라고 해도 좋을 즉, 박미서 시인은 이를 ‘궤도의 점’이라고 한다. 현대 양자 물리학자들은 극소의 작은 실체를 부정하는 대신에 궤적을 추적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궤적은 불확정적이다. 이를 ‘무작정’이라고 한다.

열매를 새들에게 내어준 팽나무엔 잎새들만 남아 있고(1연), 그 잎새들도 가을이 돼

진초록 잎들도 여름의 자기를 잃어버리고 전혀 자기가 아닌 것처럼 변해 ‘단풍’으로 눈부시게 변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나무에게서 잎은 줄기나 뿌리와는 달리, 반드시 상하로 즉, 상은 하늘로 하는 땅을 향한다. 단풍으로 변하면서 상하가 같아져 버리는 그래서 자기를 투명하게 만들어버린다. 단풍으로 변한 잎에서 투명성을 읽는다. 여름 잎의 경우, 위에서는 해를 향해 광합성 작용을 하고, 밑에서는 그것을 받아 연초록색을 만든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잎의 아래 위가 거의 동색이 되어버린다. 아래 위가 투명해지면서 이젠 태양을 외면하고 자기 자체 안에서 온갖 빛을 발산한다.

그래서 봄 여름의 잎이 태양과 합작을 해 만들어내는 반사광과 같다면, 가을의 단풍은 제 자신 안에서 자신의 엽록소를 자기 스스로 삭이고 녹여서 내뿜는 빛과 같다.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가 외부의 빛을 받아 수동적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라면, 수정체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빛을 반사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투명성을 두고 어항과 같다고 하여 어항 의식 혁명이 유래한다. 새에게 열매를 내어준 투명해진 나뭇잎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 떠나는 순례자와도 같다.

3연
어느 순례자의 청원의 그림자,
스스로 꿈을 이루어가는
억새풀 힘, 감싸듯 떠올랐다.

다이아몬드는 빛을 반사하는 매체이지만 수정체는 빛을 스스로 반사는 매체 없는 그 자체이다. 이러한 매체 없는 반사체 자체를 ‘점點’이라고 한다. 순례자는 단풍과도 같이 ‘스스로 꿈을 이루어가는’ 자. ‘억새풀의 힘’이란 마치 임종을 앞 둔 환자의 마지막 링겔액인 듯. 그러나 억새풀이 자기 안에서 새로운 생기를 찾기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점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심으로 점이 새로운 궤적을 그린다. 그 가능성을 박미서의 시에서 읽는다.

다시 말해서 단풍에서 투명성을 읽을 때에 박미서의 시는 매릴린 퍼거슨의 ‘어항속의 공모 Aquarian Conspiracy’을 바로 연상케 한다. 어항이란 사방 어디서 드려다보아도 그 안을 환히 볼 수 있다. 앞으로 우리 미래는 물고기좌에서 이러한 수정궁시기(보병궁 시기라고 함)로 간다고 한다. 이 말은 미래 인간들이 모두 투명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투명인간이란 다이아몬드같이 외부의 빛에 의존해 광채를 내는 것이 아니고 수정체 같이 자기 스스로의 내면에서 빛은 발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박미서의 시 '점.심'은 우리 시대가 물고기좌에서 보병궁좌 Aquarian로 이동하는 것을 알리는 시 같다. 수정체와 같은 투명성을 박미서는 시에서 '투명한 나뭇잎'에 비유하고 있다. 나뭇잎이 이와 같은 투명성을 갖기 위해서는 새에게 열매를 스스로 내어주고 자신을 비워야 한다. 매릴린 퍼거슨은 그의 책 《의식혁명》*에서, 의식혁명은 “정치적인 신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호소하는 선언도 아니다. 이 혁명에 참가하는 자들의 힘은 분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행동은 구체성을 띠고 있으며 또한 과학적이기도 하다”(퍼거슨, 1982, 19)라고 했다.

그러나 분산된 의식혁명을 단행한 개인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여 공동의 의식장을 만들 수 있으며 이를 ‘공모 conspiracy’라고 했다. 또한 이런 집단을 투명지성 집단이라고도 했다. 이는 애쿼리언(수정궁)같이 그곳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공모를 하는 개인들은 내부로부터 자기혁명을 하기 때문에 구태여 웅변을 원하지 않는다. 이 ‘애쿼리언 혁명’은 “지금까지의 어느 사회혁명보다도 폭넓으며 또한 어느 혁명보다 그 뿌리가 깊다. 그리고 인간의 새로운 자세를 추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려고 한다”(같은 책)라고도 했다.

이 혁명이 폭넓고 뿌리 깊은 이유는 이 혁명이 지니고 있는 논리성 때문이다. 철학자 베아트리스 브록토는 이 혁명이 지니고 있는 논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가 변하고 이에 따라서 우리들도 변해 가는 것이다. 혁명이 우리를 새로운 사회로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제 변화 그 자체이며 또한 우리가 바로 그 혁명 그 자체이다”라고 했다.

박미서 시인은 이러한 공모현상을 ‘강강수월래’라고 한다.

내밀한 모든 뿌리빛 통하여
충만하게 강강술래 이루어,
네 따스한 슬픔이 일으키는
점 하나 갖게 되었다(7연)

유타 주의 판도 포푸루스 pando populus란 나무는 지상의 그루가 수백인 것 같지만 그 뿌리는 단 한 개라고 한다. 한 개의 뿌리가 얼기설기 엉켜 있다고 한다. 이 나무를 주제로 2015년 미국 클레어몬트 과정 사상연구소에서는 학술대회까지 가진 적이 있다. 판다 포푸루스를 의식하고 시인은

내밀한 모든 뿌리빛 통하여
충만하게 강강술래 이루어

라고 한 것 같다. 아래 판도 포푸루스 나무에 단풍이 들어 있는 모습은 시를 연상하기에 족하다. 이 나무는 지상에서 보면 여러 개의 나무인 것 같지만 뿌리는 모두 하나라고 한다.

유타주에 있는 판도 포푸루스 군지에 노란 단풍이 물들어 있다.
미국 유타 주에 있는 판도 포푸루스 군지에 노란 단풍이 물들어 있다.

판도 포푸루스는 지금 분열된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상징이라고 하면서 매리놀이란 기독교 수녀 단체는 이 나무 둘레에서 원무 Circle Dance를 추면서 의식의 하나됨과 인류의 하나됨을 기원한다. 이들이 건설하려는 땅을 ‘판도낙원 Pandotopia’이라고 한다.

‘판도낙원’ 건설을 위해 인류가 하나 되자고 노래하면서 춤춘다. 이는 우리 강강수월래와 하나 다른 것 없는 원무라고 본다. 박미서 시의 경이로움을 새삼 발견한다.

강강수월래는 하나의 뿌리와 수천, 수만 개의 나무를 만드는 힘의 상징이다. 그것은 점이 심으로 변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의 점이지만 수천 개의 심일 수 있다. 이것이 판도 포푸루스가 갖는 상징적 힘이다. 그 심의 정체란 ‘따스한 슬픔’이다. 따스하지 않는 슬픔은 심이 아니다. 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점에서 나온 수만 가지의 다양한 심일 수는 없다. 점의 일의성과 심의 다의성의 대조, 이것이 시가 갖는 구조라 할 수 있다. 하나의 뿌리에 수천 가지 나무가 가능한 다시 말해서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추이듯이.

매리놀 수녀들이 모여 춤추는 원무 Circle Dance(강강수월래)
매리놀 수녀들이 모여 춤추는 원무 Circle Dance(강강수월래)

네 따스한 슬픔이 일으키는
점 하나 갖게 되었다.

박미서시인은 판도 포푸루스 대신에 팽나무를 시에서 말하고 있다. 뿌리 빛의

무작정 있는 궤도의 點,
밝음의 심心,
한 덩어리 투명한 잎,
나뭇가지 살아내는
찬눈물의 쪽달 데려오리라(8연)

하나의 달과 천강의 달 대신에 시는 ‘찬눈물의 쪽달’과 투명한 잎을 연관시킴으로 판도 포푸루스의 ‘판도낙원’을 꿈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브레이크와 박미서의 시

시인 가운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살았던 윌리엄 브레이크는 “나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본다”라고 했다. 이 말은 ‘눈으로’ 사물을 보지만 그 눈으로 눈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이제 사물을 보기 위해 눈 자체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바깥 사물을 의식하려고 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뵈메의 사상은 스웨덴보르크에게 전해졌고 다시 브레이크로 전해져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로 발전한다. 초월주의는 인간 내면의 새로운 빛을 찾기 시작했으며, 이는 지금까지의 정통 기독교에서 인간의 내면세계가 원죄로 썩어 있다는 주장과는 불과 물처럼 서로 상용될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이런 초월주의적 경향은 문학‧교육‧정치‧경제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초월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은 나다니엘 호손, 에밀리 디킨스, 허만 멜빌, 월트 호이트만, 존 듀이, 영국 노동당 창설자들, 간디, 마틴 루터 킹, 에머슨, 휘트먼 등이다.

여기에 한 가지 첨가해 말해둘 것은 이러한 이단적 성격을 지닌 사상들은 ‘여성적’ 이고 동시에 ‘동양적 성격이 강했으며 결국 현재와 같은 가부장제적 전통이 이런 여성적인 가치들을 이단시한 것과는 그 맥락이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은 모두 서양의 잣대로 보았을 때 이단이다.

박미서는 눈에는 점으로서의 눈과 심으로서의 눈이 있다고 본다. 점으로서의 보는 것은 나무를 보는 것과 같고, 심으로 보는 것은 숲을 보는 것과 같다. 눈동자란 점으로 사물을 볼 때(見)와, 눈을 통해 심으로 볼 때(觀)에, 같은 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판이하게 다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거나, 숲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경우 모두가 눈병의 원인이 된다.

1960년대 뉴에이지 New Age 운동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했고, 1910년대 공산주의 혁명은 반대로 숲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했다.

1901년 리처드 버크는 우주의식과 자의식이 합일되는 황홀감에 대하여 “이 황홀감에 빠지는 사람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고, 한 번 이러한 경험을 해본 사람은 이 땅위를 걷거나 공기를 마시고는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종족은 우리 안에서 태어나서 앞으로 지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만약에 이러한 우주의식을 자각한 인간들이 주류를 이룰 때에는 이 세계의 가치관이 전면적으로 바뀔 때에, 이들 인간들에 의한 ‘공모현상 conspiracy’은 예측 불허의 혁명을 유발할 것이다.

혁명도 하나의 그림 찾기와 같다. 그림 찾기에서 한 번 숨겨진 그림을 찾으면 그 다음 사람들은 쉽게 그 숨겨진 그림이 무엇이라는 것, 그리고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듯이, 정신세계에서도 한번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면 그 다음에 많은 구도자들은 무임승차를 하게 된다. 박미서의 시는 이런 숨겨진 그림 찾기의 안내서와 같다. 그리고, 점.심을 통해 한 번 그림을 찾으면 다른 구도자들은 무임승차를 수 있으리라.

*매릴린 퍼거슨(1982), 의식혁명(Aquarian Conspiracy), 서울 민지사, 정성호 역.

<창이 / 북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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