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상식의 잣대란?
‘공정’이란 말이 내년 대선을 앞둔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윤석열과 여당이 공히 ‘공정’의 깃발을 들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도 공정이 최고의 덕목이고, 특히 존 롤스 같은 법철학자는 공정 정신의 화신이라 할 정도이다. 밀의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론이 불공정을 초래할 것은 명확하다. 최대 다수의 불공정을 전제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한 칸트는 동기의 주요성과 공동선을 지향한다. 이에 대하여 존 롤스는 평등 옹호론자로서 공정의 가치를 누구보다 강조한 법철학자이다. 롤스를 이번 대선에 불러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롤스에 의하면 공정의 첫 번째 조건은 언론과 종교의 자유이고, 두 번째 조건은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평등이라고 한다. 윤석열은 지난 6월 29일 대선 출마 선언에서 문재인 정부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에 대선에 나선다고 밝혔다.
그런데 존 롤스는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난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31쪽] 중에서)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다.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긴다.” 그러면 공정을 다루는 ‘방식’은 어떻게 결정한 것인가? 공정 그 자체보다는 그 공정을 다루는 제도와 방식을 결정하기가 더 어렵고 힘들다. 공정에 관한 어떤 준거 같은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샌델은 책에서 공정을 다루는 수많은 방식을 다루고 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300달러냐 당신의 목숨이냐’란 말 그대로 300달러(35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었고 면제를 받은 자들 가운데는 앤드루 카네기, J.P. 모건,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아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버지,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이 된 아서와 클리블렌드 등도 있었다. 이러한 불공정 사례 때문에 1863년 7월 폭동까지 일어나 100여 명이 사망까지 했었다. (같은 책 113쪽).
우리 사회에서도 돈 주고 병역면제 받는 것이 제도화 된다면 대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돈 주고 병역 면제 받는 것이 제도화 되는 것이 오히려 공정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과 자녀들은 모두 거의 면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 한 사람 제외하고 대통령까지 모두 병역 면제자들인 것이 드러났다. 차라리 거액의 돈을 내고 병역면제를 제도화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불공정의 공정’이 회자될 만하다.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이란 함정
도대체 공정을 저울에 단다고 할 때에 그러한 저울이란 있는 것인가?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이 불공정의 화신으로 보고 ‘부동산 정책’을 손꼽으며 연일 대통령의 불공정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지지율은 떨어지고 있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올라가고 있다. 언론의 절대적인 지지와 옹호를 받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 국민들이 바라보는 ‘공정’이란 잣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이 윤석열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그 기준이 되는 잣대란 무엇인가? 그 잣대란 윤석열의 다른 하나의 구호인 ‘상식’이다. 다시 말해서 상식적으로 보아서 문재인의 공정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식이란 것의 잣대는 또 무엇인가? 상식이야 말로 관습과 습관이 결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관습과 습관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은 ‘그럴 리 없다’, ‘그럴 수 없다’고 ‘리 理’와 ‘수 數’를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한다. 생각키로는 우리 국민들의 상식은 ‘리’와 ‘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가장 쉽게 초등학생들이 학급 반장을 선출할 때에 설령 비밀 투표이기는 하지만 반장 자신이 자기를 투표한다면 그것은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차라리 기권을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투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식이다. 만약에 어느 사회에서 상식이 무너졌다면 바로 자기가 자기를 투표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미국 수정 헌법 4조는 “이 수정 헌법은 수정할 수 없다”이다. 이것을 본 괴델은 미국 시민권자 자격 면담을 할 때에 미국이 독재 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아인쉬타인에게 말하자 아인쉬타인은 괴델에게, 면접관에게 절대로 이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괴델은 헌법 4조는 상식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그의 ‘괴델 불완전성 정리’의 핵심이다.
순수 예수의 말이라고 인정되는 소위 ‘Q복음서’는 모두 이런 괴델 정리로 가득 차 있다.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 우리 말 “겨 묻은 개 X묻은 개 흉본다.”의 다른 맥락이다. 바로 이것이 상식의 기준이다. 남을 비판할 때에 자기도 똑 같은 짓이나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상식’의 잣대이다. 쉽게 말해서 시쳇말로 ‘내로남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 윤석열이 공정을 말할 때에 동시에 그가 말하는 상식의 잣대로 한 번 보기로 한다. 그가 검사와 검찰총장이란 제도권 안에서 과연 공정했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삼부토건과 윤우중 두 가지 자기 자신에 연루된 사건은 물론, 처와 장모 등 친인척 들의 비리 등을 비교할 때에 그가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기소와 재판에서 과연 공정하고 상식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고 있다. 그럴 수도 없고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초등학생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을 저 정도로 털 정도로 자기와 자기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털었어야 하지 않는가?
윤석열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를 괴델에게 물어보면 정확한 답이 나온다. 제 자신 안에서는 제 잘못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괴델은 말한다. 그래서 밖에서 검증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윤석열은 그런 검증을 받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고소·고발 하겠다고 한다. 그는 평생 ‘법’으로 먹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법으로 흥한 자 법으로 망하고 말리라!
문재인의 공정과 상식이란 함정
공정과 상식은 윤석열의 기치인 것만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건설을 통치의 그것으로 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공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최재형을 감사원 원장에 각각 임명한 것이었다. 임명 전에 반역과 배신을 우려하는 것이 있었지만 기우가 아닌 현실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정부의 등에 칼을 꽂고 말았다. 큐피드의 화살보다 더 유명해질 역사에 남을 ‘배신의 화살’이 되고 말았다.
여당인 민주당도 역시 공정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법사위원장 자리를 야당에게 양보하겠다고 한다. 전광훈 목사와 극우 태극기 부대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빨갱이’, ‘죽일 놈’, ‘파렴치 사기꾼’ 등 입에 담지 못 할 욕설과 육두문자를 그것도 백주대낮 광장에서 내뱉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이명박을 향해 이런 욕설을 했다고 해 보자. 아예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놓고 법의 족쇄를 채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이 되도록 이를 내버려 두고 있다. 공정의 화신임을 끝까지 과시나 하듯이.
이를 두고 후대 역사는 문재인의 ‘위선적 공정’이라 부르지 않을까 한다. 선보다 나쁜 것이 악이고, 악보다 더 나쁜 것은 ‘위선’이다. 그런 점에서 위선은 최악의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은 사람들이 쉽게 판별을 하기 때문에 고칠 수도 제거할 수도 있지만 위선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아노미 상태로 몰고 가 선악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정치지도자가 위선을 할 땐 국가 사회를 망치고 만다.
‘문재인’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니고 선출된, 그것도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공인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국가와 나아가 그를 선출해진 국민이 그렇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 개인이 아닌 이들 후자들을 위해서라고 법적 대처와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런데 ‘착한 대통령’, ‘좋은 대통령’이란 소리를 듣고 역사에 남기 위해서인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위선적 공정’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상식적이지 않다.
이것은 대통령이 공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나아가 ‘위선’ 즉, 자기 개인의 오만에서 나오는 위선일 수 있다. 진정한 국가의 훌륭한 대통령이라면 자기 개인은 설령 나쁜 존재로 역사에 남을지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선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언론과 태극기 부대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칸트가 본다면 ‘근본악 radical sin’이라 할 것이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자처하는 교만’이란 위선 말이다.
민주당 내 ‘수박’들의 공정이란 위선
진보진영의 극히 낭만적인 정치인들 가운데 특히 현대 민주당 안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가운데 이런 위선적 인간들이 많다. ‘이철희’를 한 번 생각해 보다. 그는 진보의 대명사로서 2020년 4·15 총선 때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다시 청와대에 최근 입성했다. 그의 하는 말을 들어 보면 ‘핵사이다’이다. 그러나 이들 진보 정치인들은 쉽게 위선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여당이 조국을 물리치는 것이 마치 공정하다는 것을 과시나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위선이 선과 다른 점은 후자의 경우는 ‘용기 勇氣’를 반드시 동반하지만 위선은 그 반대인 ‘비겁’을 동반한다. 소위 ‘수박들’이란 민주당 내 의원들의 언행을 보면 매우 공정해 보이고 합리적인 것 같다. 이는 조국 장관에 대해서 이들이 대하는 태도에서 여실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용렬하다 못해 어리석은가는 조금만 분석해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이들 수박들은 조국과 김경수를 보고 한껏 겁을 집어 먹고 있다. 지금 한국 검사들과 판사들의 손에는 법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올가미’만을 손에 들고 있다. 언제 어디서 이 올가미가 자기 목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있는 존재들이 수박들이다. 거기다 언론과 검찰이 유착이 돼 공을 법원에 던지면 판사들은(대법원 판사까지) 이를 받아 족쇄를 채우는 것을 볼 때에 수박들뿐만 아니라 누구도 겁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을 보라, 안희정을 보라, 김경수를 보라, 모두 겁날 것이다.
이들의 위선은 이런 공포감을 극복 못하는 비겁함에서 나온 것이다. ‘해님’이는 똑똑했지만 동생 ‘달님’이는 어리석어 호랑이 꼬임에 속아 넘어가 대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이 만큼 잘 그려낸 동화도 없을 것이다. 민주당 180석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 중에 해님은 겨우 15명 정도 밖에 안 된다. 나머지 다수는 위선으로 위장한 가장 공정한 것처럼 자처하면서 비겁의 뒤안길에서 얼굴을 내밀고 국회의원 행세하고 있다. 우린 지금 대선 후보 가운데서 누가 과연 ‘해님’이고 누가 과연 ‘달님’인지 분간할 엄중한 순간 앞에 서 있다.
윤석열의 공정은 ‘제왕무치 帝王無恥’의 결과
민주당의 공정이 비겁과 용렬함의 소치라고 했다. 다시 돌아가 윤석열의 공정을 생각해 볼 때에 그것은 반대인 ‘제왕무치’의 소산이다. 봉건왕조 시절에 임금은 무슨 짓을 해도 수치가 아니라는 법이 있었다. 윤석열은 검찰 생활 30여 년 동안 제왕적 기질이 체질화되었다. 제왕은 괴델 정리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잘못을 절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인정도 하지 않는다. 이를 제왕무치라고 한다. 봉건 왕조를 지탱하는 데는 이것이 공정이고 상식이다. 지금 윤석열은 대통령도 되기 전에 이런 제왕무치의 법칙에 보호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 윤석열과 문재인 정부는 서로 각을 세우면서도 공정과 상식을 같이 말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우리 역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양 진영이 모두 올바른 공정과 상식을 국민 앞에 말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과 최재형을 임명한 것을 두고 공정과 상식이라 누구도 말하지 않게 되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 엄중한 ‘현실감각의 상실’. 그것이 답이다. 재벌들에 의해 언론이 장악되고 있는 이 엄중한 현실 앞에 문재인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은 참으로 현실감각이 떨어진 결과라 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의 제왕무치 역시 시대감각과 현실감각을 몰지각한 소치이고 이런 몰지각의 원인은 모두 언론 때문이다.
그래도 민중들은 ‘해님’의 후예들이었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감옥에서 나온 후 첫 소리가 “재임 기간에 언론을 개혁하지 못한 것, 이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한 말을 명심할 때이다. 정치인들이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언론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리’와 ‘수’에 밝은 우리 민중들은 해님들이었다.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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