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대표하는 4개의 식을 모두 결합할 경우 전기장과 자기장이 파동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알아냈다. 이후 헤르츠(Heinrich Rudolf)는 이 전자기파동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주파수의 단위 헤르츠(Hz)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는 송신기 회로에서 전파를 발생시킨 다음 수신기 역할을 하는 작은 틈을 지닌 금속 링을 적당히 떨어진 곳에 두면 그 틈에서 불꽃이 유발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선통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뻔한 결과이지만 그 당시에는 나름 충격적인 실험 결과였다. 바다의 파도와 호수 위의 파문처럼 파장과 주기를 지니는 파동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전기와 자기의 출렁거림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가로질러 간 증거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텅 빈 공간에서 떨어져 있는 극성이 다른 두 전하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당기는 것 같은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자석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다. 마주한 극이 서로 같다면 밀어내고 다르다면 당긴다. 빈 공간에서 작동하는 전기력과 자기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하다. 중력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전기와 자기의 힘을 화살표로 그려둔 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는 착각과 함께 호기심을 잃어 버린다. 하지만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은 한 어린아이가 나침반을 돌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사과를 잡아 당기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길고 긴 사유의 결과다.
전자기파동을 수면 위의 물결이나 파도의 경험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무언가가 출렁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파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바닷물이 출렁거려야 하고 호수 위 파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호수의 물이 출렁거려야 한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출렁거리기 위해서는 ‘에테르’라는 빛의 매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공은 빈 공간처럼 보이지만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물질이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테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신 혹은 일종의 물질적 기운 같은 존재인데 그리스인들은 인간 세상에는 공기가 있지만, 신들이 사는 천상에는 영혼과 기운이 담긴 ‘에테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빛이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파동이라면 도플러 효과를 고려할 수 있다. 호수 위에서 오리가 제자리를 유지하며 발을 움직이면 파문이 만들어진다. 수면 위를 번져 나가는 파문의 속력은 오리의 몸짓과 별개로 호수를 채운 물의 재질에 의해 결정된다. 즉, 파문의 속력은 탄성과 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오리가 앞으로 나아가며 만들어지는 파문을 보면 진행하는 방향으로 파문의 간격이 좁아진다. 먼저 만들어 낸 파문이 충분히 번져가기 전에 다음 파문를 만들어 낼 오리가 앞으로 조금 이동해 새로운 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리가 헤엄치는 속력이 좀 더 빨라지면 진행하는 방향의 파문들은 점점 더 촘촘해진다. 만약 오리가 헤엄치는 속력이 파문이 퍼져가는 속력과 똑같을 만큼 빠르면, 진행하는 방향의 파문들은 결국 모두 포개어지게 된다. 앞으로 진행하는 오리 입장에서 보면 파문들은 모두 겹쳐져 앞으로 번져가지 못한다.
만약 빛이 ‘에테르’라는 매질에 의해 퍼져 가는 파동이라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빛의 속력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손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내 얼굴에서 나오는 빛의 파동이 거울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통해 내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 안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관성계의 ‘불변성’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정지한 지상과 등속 운동하는 기차 안에서 목격한 물리 현상으로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상에 서있는 관찰자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자유낙하하는 공의 모습을 관찰하면 기차의 수평 속도 성분만큼 추가되어 포물선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기차에 직접 승차해 자유낙하하는 공을 관찰해 보면, 지상에서 보던 운동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곧장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게된다. 따라서 등속으로 움직이는 기차의 창문을 모두 벽으로 막아 그럴듯한 방으로 꾸민 이후 관찰자를 기차 안으로 데리고 오면, 그는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만 봐서는 그곳이 정지상태의 지상인지 달리는 기차 안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도플러 효과와 같은 파동의 경우는 관성계의 ‘불변성’ 원리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오해의 본질은 ‘매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파동은 공간을 가득 채운 매질을 경유해서 운동을 드러내고 매질은 파원이 정지하거나 움직이는 것과 상관없이 고유한 속력 값을 제공한다. 파동의 속력이 매질이 지닌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일정하게 유지되는 반면, 파원의 움직임은 파장이나 주파수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빛으로 요약되는 전자기파동은 진공에서도 작동하는 전기와 자기 법칙의 결과이지만 ‘에테르’라는 빛의 매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관성계의 ‘불변성’과의 연결에 문제가 생긴다. 또한 텅 빈 우주가 ‘에테르’라는 매질로 채워져 있다는 생각의 배후에는 정지한 절대공간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때로는 감각적 경험이 진리를 알아내는 데 방해가 된다. 특히 물리학적 진리는 감각적 경험이 그 진리와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일상의 감각을 기반으로 한 무의식적 사유를 ‘직관’이라 부른다면 그런 부류의 “감각적 직관”은 오히려 제대로 된 진리를 찾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 물리학 내용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이런 감각적 직관과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런 괴리감은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일 수 있다. 19세기 “에테르”에 대한 논의는 이론과 실험 분야 모두에서 활발하게 토론되었지만, 물리학자들은 파도나 호수의 경험에서부터 얻은 파동의 “매질”이라는 개념을 100년 동안 버리지 못했다. 불가(佛家)에서는 ‘병 속의 새’라는 화두가 있다. 어린 새를 유리병 속에 넣어 키웠지만 덩치가 커져 새는 좁은 주둥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병을 깰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새를 다치게 할 수 있다. 새는 일평생 자신이 갇혀 있는 병 밖의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있지만, 결코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스승은 수행자에게 새를 꺼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19세기 물리학자들의 생각을 병 속의 새처럼 가둔 것은 바로 “에테르”였다. 1905년 20대의 아인슈타인은 ‘에테르’를 ‘절대공간’과 ‘절대시간’과 함께 버리고 병 속을 나온 새처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놀랍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는 두 개의 가정이 존재한다. 첫째는 물리학 법칙은 등속 운동하는 관성계에서 불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빛의 속력은 서로 다른 관성계라도 항상 일정한 불변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에테르’를 버리고 상대적으로 정지한 이와 등속으로 움직이는 공간에 서 있는 이가 총알이 아닌 빛의 레이저 총을 발사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지한 이가 목격한 빛의 속력이 c라면 등속 v로 움직이는 공간에서 발사한 빛의 속력은 정지한 지상의 관측자에게 c+v가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관성계에서 빛의 속력이 일정해야 한다는 두 번째 가정에 위배된다. 움직이는 공간의 속력 v 가 더해지는 원리를 잘 생각해 보면, 정지한 관찰자의 기준에서 가만 있기만 해도 계속해서 이동거리가 더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특혜를 받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경력과 실적을 인정받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하면 v로 움직이는 특혜가 지상의 관측자가 보기에 이동거리가 늘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특혜로 인정된 이동거리에 특정 비율을 곱해 수축시켜 버리면 된다. 즉, 공간이 찌그러지면 되는 것이다. 절대공간은 없다.
또한 맥스웰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전자기 법칙이 정지한 곳과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성계에서 ‘불변성(invariance)’을 유지하는지 확인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불변성’이 유지되도록 공간과 시간의 비율 모두를 재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조정된 상대적 시간과 공간은 심지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을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어 기차 역장은 플랫폼의 양 끝에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등을 동시에 켰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기차 안 승객들은 두 개의 등이 동시가 아닌 서로 다른 시간에 켜지는 모습으로 보게 된다. 우주에 떨어진 모든 곳이 동시에 공유하는 절대시간은 없다.
이제 이 글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빛의 속력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손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얼굴을 볼 수 없을까? 만약 얼굴이 거울 속에서 사라진다면, 관성계에서 물리학 법칙의 불변성이 유지된다는 첫 번째 가정에 위배된다. 지상의 관측자가 보기에 빛의 속력이 내가 날아가는 속력에 더해진다면, 빛의 속력이 불변량(invariance)이라는 두 번째 가정에 위배된다. 따라서 거울 속 얼굴은 그대로 있고 빛의 속력도 변함없다.
◇김광석 교수 :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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