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딸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무렵, 아이는 게임 장면들을 스케치한 종이들을 바닥에 한 장씩 늘어놓으며 자랑을 했다. 아이는 아마도 타블렛 프레임 속의 배경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게임 배경들을 영화의 장면처럼 구분해서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아이에게 각각 스케치한 그림은 다른 세상이었던 셈이다. 어른이 되어 개인의 삶이나 역사를 돌이키는 방식도 유사한 것 같다. 별개로 촬영된 영화의 장면처럼 지나간 일들은 스토리를 닮은 한 폭의 그림 같은 대표적인 이미지 단위로 기억된다. 비록 세상은 표준 시간을 통해 사건들을 분류하고 기록하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을 객관적이거나 절대적 기준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억은 자신만의 가치와 밀도로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적어도 그림 속 공간과 시간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눈금을 부여한다.
기억 속에서는 공간과 시간이 순차적으로 배열되지 않고 뒤엉키기도 한다. 우연히 재회한 익숙한 장면은 수십 년을 눈 깜짝할 사이에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한 장면을 현재와 나란히 배열하기도 한다. 또는 아직 경험한 적도 없는 미래의 장면을 현재의 눈앞에 데리고 온 듯 낯선 곳을 익숙하게 만들어 기억이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래에서 온 듯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기억의 시공간은 너무도 유연해서 감정과 사고의 움직임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늘어지거나 줄어들 수도 있다. 살아가는 것이란 기억의 창고에 이런 다양한 종류의 그림들을 한 장씩 만들어 내는 과정인 것 같다. 매일 매일이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한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 장의 그림을 그리지만, 오늘이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게 시큰둥한 어른들은 그림을 그려낼 소재가 빈곤해진다. 어쩌면 삶의 풍요로움은 하루 동안 만들어 낸 이미지의 수로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창작하는 것은 일정 시간이 지나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는 몸속 반응을 닮았다. 생명의 씨앗이 물질 세상과 물리 화학적으로 반응하며 자라나는 것처럼 이미지는 사유와 감정을 먹으며 매 순간 자라난다. 몸속 아주 작은 스케일에서 세포가 분열하며 조직을 형성하듯 생각도 한 폭, 한 폭 그려낸 이미지들의 조각으로 조직을 만들고 그것이 사상과 신념의 장기가 되고 팔, 다리, 몸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낱장의 이미지 그림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공간으로 구성된 생명체 덩어리인 것이다. 물질의 세상을 에너지로 대표할 수 있다면 기억의 세상은 정보 혹은 엔트로피로 대표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란 규격화된 물질 세상의 감각 경험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보화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물질 세상의 커다란 산과 딱딱한 돌덩이, 꽃과 나무들이 그림 속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된다. 하지만 그 구성이 물질 세상처럼 보편화된 기준을 따를 필요는 없다. 오롯이 자신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구성한 이미지에 공감하는 이가 없거나 혹평을 쏟아내도 크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이미지에 대한 공감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 한 사람 혹은 백 년 후 평범한 누군가와 공명할 수도 있다. 화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지닌 고유의 방식으로 그림을 인코딩하고, 그 독특한 재구성을 디코딩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 공감된다.
아마도 화가들은 크고 작은 영감에서 비롯되어 작업을 시작할 것 같다. 영감에 이끌리는 그 작업의 과정에서 일종의 ‘내적 공명’ 같이 존재하며 작품이 구체적으로 드러날수록 확신이 들지만, 그 과정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따라서, 그림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 사유와 감정의 결과일 수 있다. 관람객들도 작가의 작품을 보고 ‘내적 공명’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관람객 고유의 주관적 생각과 감정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일한 작품을 보고 서로 다른 감정과 공명을 느끼는 ‘상대성’은 지극히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 세대, 배경, 심지어 시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공감할 수 있는 불변의 교집합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수만 년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심리학자 칼 융은 개인의 사적 무의식 이외에 집단 무의식이 존재하고, 그 속에는 원형의 이미지가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림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일상에 스며 있는 신화와 규율이 문명사회 못지않은 지혜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인류의 보편적 사유 구조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 동굴 속에 그려졌던 원시인의 그림과 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 제작된 현대 인류의 예술 작품 속에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달라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규칙이 존재하지 않을까?
‘불변성(invariance)’은 특수상대성이론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다. 구체적으로 물리학 법칙의 불변성과 광속이라는 불변량(invariance)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물리학 법칙의 불변성이란 정지한 지상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기차는 상대적으로 다른 역학적 환경을 지니고 있지만, 각자의 시선에서는 물리학 법칙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이 떨어지는 것 같은 운동을 관찰해 기술했을 때 F=ma라는 물리 법칙이 정지한 지상과 등속 운동하는 기차 안에서 변하지 않고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학 법칙의 불변성을 위해서는 공의 운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지상 위에 있는지 달리는 기차 위에 있는지 구별할 수 없어야 한다. 단, 이 논의는 일정한 방향과 속력으로 이동하는 기차 같은 ‘관성계’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제한한다. 관성계에서 F=ma라는 ‘역학 법칙’이 불변한다면 전기와 자기의 법칙은 어떨까? 전기와 자기 현상은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얽혀 있어 상호의존적이다. 그 결과 전자기파동은 전기장의 변화가 자기장을 만들어 내고 자기장의 변화가 전기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만들어진다. 그리고 전자기파동은 다름 아닌 빛이다. 그렇다면 지상 위에서의 전자기 법칙이 등속으로 움직이는 기차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모습을 보여줄까? 다르게 말해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빛을 관찰하면 내가 정지한 지상이 아니라 움직이는 기차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물리학 법칙의 불변성은 깨지는 것이다.
사실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역학 역시 불변의 대상을 묵시적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즉, 그 경계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거대한 우주라는 ‘절대공간’과 우주의 다른 위치에 떨어져 있어도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절대시간’의 개념이 내재해 있다. 쉽게 말해 규모가 좀 크기는 해도 ‘우주’라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 나름 그럴듯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들어가는 험난한 사유의 여정은 바로 이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버리는 과정이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의 혁명적 생각의 핵심은 빛으로 대표되는 전자기 법칙이 관성계에서 ‘불변성’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력을 ‘불변량’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공간 속 길이를 시간으로 나누어 얻어 내는 속력의 속성을 고려해 보면 속력은 공간과 시간에 비해 덜 본질적인 양인 듯 보인다. 그래서 속력을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광속을 새로운 불변의 기준으로 삼는 혁신적 생각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세상을 보여 준다. 즉, 빛의 속력이 ‘불변량’이 되면서 물리학 법칙이 ‘불변성’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이 달라져야 한다. 달리는 기차의 공간은 지상의 정지한 이에게 찌그러져 보이고, 시간도 느리게 간다. 하지만 기차가 움직이는 것을 모르는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공간과 시간은 평소대로인데 기차 밖으로 펼쳐진 지상의 풍경들이 찌그러지고 시간이 느리게 간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절대 정지’나 ‘절대시간’이 기준이 될 수 없으니 상대적 관점에서 둘은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니 모순이 있는 것 같은데 또 둘 다 틀린 주장은 아니라고 하니 결국 특수상대성이론이 보여 주는 것처럼 서로 상충되는 진실은 우리가 처한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인가?”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상대성이론을 구조적 회의주의에 사용하려 한다. 이를테면 “너도 맞고 나도 맞아. 둘이 달라도 다 맞아. 대신 우주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우리는 이런 대립조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해.”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표면적인 현상에만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의 기저에는 ‘불변성’과 ‘불변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술 작품을 보며 각자 다른 감정과 사유의 풍경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원형적 영감을 발견한 경우 모두가 다르지 않은 ‘그것’을 공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광속이라는 불변량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볼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포기하지만, 전자기파동인 빛은 공간과 시간을 분리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으로 느낀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도 공간 수축과 시간 지연 현상을 다루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를 좀 더 일반화시켜 공간과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합쳐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연속체로 다룬다. 이를테면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것 같은 한 장의 종이가 휘어지고 말린다. 이렇게 ‘시공간’이라는 연속체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클레이처럼 늘어지고 줄어드는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유연한 존재가 된다. 어릴 적 딸아이에게 선물로 블록을 사줬더니 처음에는 흥미를 가지다가 언젠가부터 클레이에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지만 기본 모양이 정해진 블록보다 원하는 모양을 마음대로 늘리거나 줄이기 쉬운 클레이의 자유로움에 끌린 것 같았다. 말도 서툰 나이에 작은 손으로 클레이를 빚어 둥근 공을 만들고 길쭉한 팔과 원통 모양의 사람 몸을 만드는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신도 아이처럼 시공간을 주무르고 비벼서 우주를 만들었을까? 신은 자신의 창조 과정을 재현하며 반복하도록 인간의 창작 본능에 자신을 내재시켰을까? 그래서 지극히 주관적인 화가의 창작 작품 속에서도 불변하는 속성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신은 자신의 모든 창작 과정의 장면들을 무수히 많은 그림과 영화의 장면으로 나누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주의 허공 속에 와이파이 정보처럼 뿌려둔 것이 아닐까? 화가는 단지 남들보다 유난히 와이파이가 잘 잡히는 좋은 안테나를 타고나 신이 만든 그 많은 장면들을 쉬지 않고 수신해야 하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데생도 인간이 지닌 일종의 본능이 아닐까? 물질을 먹고 호흡하며 아이의 몸이 자라듯 또 다른 세상에서는 기억과 이미지의 조각들이 상념과 감성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몸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스케치한 조각들이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듯 어쩌면 신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화가의 작품들 속에서 당신이 지닌 불변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김광석 교수 :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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