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교수의 감성물리 (22) 두 개의 다른 세상

김광석 승인 2022.02.24 15:34 | 최종 수정 2022.02.26 09:59 의견 0

금단의 열매를 기어이 따먹은 아담에게 신이 물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이 커플은 아마도 대답할 경황조차 없었겠지만, 과학은 위치 정보에 대해 오차까지 알려주기를 요구한다. 만약 신이 약속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똑같은 환경을 지닌 백만 개의 에덴동산을 준비해 두고, 백만 개의 응답을 수집한다면, 아담/이브 커플이 숨은 장소는 평균으로 대표되는 가장 유력한 곳과 표준편차로 표현되는 불확실성의 오차로 나타낼 수 있다(X=<X>+∆X).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커플을 향한 신의 질문과 이에 답하는 아담의 전략을 양자역학적으로 이해해 보자.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커플을 향한 신의 질문과 이에 답하는 아담의 전략을 양자역학적으로 이해해 보자.

또한, 아담과 이브는 속도(V)에 질량(m)을 곱한 운동량(P=mV)도 지니고 있어 언제든 위치를 옮길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이 자유의지 없이 F=ma라는 법칙에 순응하는 존재라면 특정 시간의 위치(X)와 운동량(P)이라는 두 가지 정보를 통해 그들의 궤적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는 위치와 운동량을 둘 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위치의 오차 ∆X와 운동량의 오차 ∆P의 곱이 특정 상수값과 같거나 크다고 표현되는 이 식을 고려해 보면, 둘 중 하나에 대한 정확도를 높이는(오차 감소) 대가로 다른 하나에 대한 불확실성(오차) 증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빠른지 안다는 아담의 단언은 그의 운동량 오차(∆P=0)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위치 불확정도는 무한으로 발산해 버린다(∆X→∞). 즉, 에덴동산에서 양자역학이 작동할 것이라 믿고 있었던 아담은 자신의 운동량 정보를 명확히 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게 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는 셈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측정장치의 정밀도를 높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돋보기를 쓰더라도 아담의 위치 파악에는 근원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느냐는 신의 질문은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양자역학적이다.

인어공주 이야기의 바다와 육지처럼, 양자역학에는 소통할 수 없는 이질적 두 세상의 짝들이 상보적으로 존재한다.
인어공주 이야기의 바다와 육지처럼, 양자역학에는 소통할 수 없는 이질적 두 세상의 짝들이 상보적으로 존재한다.

노르웨이에서 휴가를 보내던 ‘닐스 보어(Niels Bohr)’는 이제 막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젊은 천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투고 전 원고를 읽어 내려가다 ‘상보성(complementarity)’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한쪽 측면을 알아갈수록 다른 측면은 모호해져서 둘 모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소통할 수 없는 두 존재는 상호보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인간의 경험으로는 두 세계의 양립을 이해할 수 없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이질적인 두 가지 측면이 모두 필요하다. 위치와 운동량, 에너지와 시간, 진폭과 위상, 입자와 파동처럼 짝이 되는 두 세계의 상호보완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온전히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음양의 조화를 담은 태극 문양처럼 신비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관념적인 말장난 같아 보이는 이 ‘상보성 원리’를 통해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를테면 인간의 경험적 사유로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는 과정에는 일종의 구조적 한계가 존재하므로 그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질문을 멈추고 진리의 이런 낯설지만 심오한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소통할 수 없는 두 세상을 넘나들었던 인어공주 이야기를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해 보자(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소통할 수 없는 두 세상을 넘나들었던 인어공주 이야기를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해 보자[출처 위키피디아]

학생 시절 ‘상보성’ 개념을 처음 배울 때, 나는 이론의 배후에 숨겨진 이런 전지적 관점이 불편했다. 대립된 두 세상의 상호 보완을 통해 전체적으로 완전함을 이룬다는 점은 창조자의 입장에서 멋있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두 세상을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고스란히 마주해야 할 모순과 상처로 보였다. 설령, ‘상보성 원리’가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무런 치유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납득할 수 없는 모순 너머에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원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팔자니까 그냥 살아라’는 말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어린 시절 가슴 아프게 읽었던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가 생각났다.

물고기 떼와 어우러져 해초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인어공주에게 바다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바다 세상으로 던져진 인간을 우연히 만나면서부터 그녀는 그가 사는 육지 세상에 끌리기 시작한다. 그를 그리워하고, 그가 살아가는 지상의 삶을 동경하고, 그의 곁에 있는 새로운 삶을 욕망한다.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유영하는 ‘바다’의 삶은 동적인 운동량(P)의 세상을 닮아있다. 바다 세상의 다름은 빠름과 느림으로 구분된다. 반면, 두 발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어야 하는 ‘육지’ 삶은 상대적으로 정적이다. 그러므로 육지 세상에서의 다름은 각자가 서 있는 위치(X)로 구분된다. 동적인 바다 세상의 감각을 정적인 육지 세상에 적용할 수는 없고 육지 세상의 경험으로 바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위치 세상에서 보이는 모습을 운동량 세상으로 옮기면 낯설게 보인다.
위치 세상에서 보이는 모습을 운동량 세상으로 옮기면 낯설게 보인다.

파동이론에서 운동량 공간과 위치의 공간은 푸리에 변환(Fourier Transform)이라는 수학적 관계에 있지만, 변환을 통해 함수의 바뀐 모습을 직관적으로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가령, 위치 공간의 사각 펄스 모양은 운동량 공간에서 출렁이며 감소하는 기묘한 함수가 된다. 바다를 떠나 육지로 걸어 나온 인어공주의 삶도 그랬다. 아름다운 비늘로 덮인 지느러미와 공주의 특혜를 버려야 했고, 그에게 다가가는 두 발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육지에서 소통할 언어가 없었다. 입술이 아닌 눈으로 말하고, 말이 아닌 가슴으로 그리워해도, 지상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운동량(P)도 그렇게 위치(X)와 소통할 수 없다. 양자역학은 수학적 소통을 commutability라는 어휘로 표현한다.

하나의 세계를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의 세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전날 언니 인어들은 마녀에게 머리카락을 주고 얻은 칼을 인어에게 건넨다. 그를 죽여야 육지의 세상이 사라지고 바다의 삶이 회복된다. 점의 좌표처럼 고착된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그가 사라져야 한다. 입자의 위치 같은 그를 포기해야 파동으로 출렁이는 광활한 바다의 삶이 다시 열린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를 온전히 남겨둔 채 바다로 뛰어들어 자신을 버린다. 소통할 수 없이 양립하는 두 세계는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그렇다면 상보성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소통할 수 없는 두 세상 사이의 갈등은 비극을 낳는다. 상보성도 비극적으로 느껴질까?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소통할 수 없는 두 세상 사이의 갈등은 비극을 낳는다. 상보성도 비극적으로 느껴질까? [출처 위키피디아]

<인어공주>의 처음 제목은 <Daughters of the Air>였다. 원작에는 바다로 뛰어든 이후 왕자를 죽이지 않고 자신을 희생한 가치를 천상에서 인정받아 불멸의 영혼을 획득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 안데르센은 그가 좋아하는 남자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를 양성애자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 탓에 그가 지닌 누군가에 대한 호감을 ‘성’이라는 관점에서만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바다와 육지라는 대립 구조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인어공주 이야기처럼 그 역시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원작 인어공주의 ‘천상(The Air)’은 비극적 현실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며 제3의 출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은 무엇이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인어공주의 원래 제목은 Daughters of the air였다. 인어공주는 안데르센 자신이었다(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인어공주의 원래 제목은 Daughters of the air였다. 인어공주는 안데르센 자신이었다[출처 위키피디아]

공교롭게 상보성의 원리를 제시한 ‘보어’와 ‘안데르센’ 모두 덴마크 사람이다. 코펜하겐에는 아직도 ‘닐스 보어 연구소’가 있고, 해안가를 향해 조금만 가면 인어공주 동상을 볼 수 있다. 비과학적 이야기로 가득한 동화 <인어공주>와 양자역학의 핵심 철학을 담은 <상보성 이론>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인간은 말을 할 수 없는 유아기 때는 신체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지만 말을 배우면서부터 세상을 언어화한다. “언어는 의미(기의)를 음성 기표와 연결한 기호일 뿐이다. 언어적 대상과의 음성적 연결 방식은 임의적이고 다양하다. 하지만 인류의 모든 언어에는 자음/모음, 비음/非비음, 집약/확산, 끊김/연속 등의 12가지 ‘이원 대립(Binary opposition)’의 음소 규칙이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의 이런 구조주의적 견해에 커다란 영감을 받았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면, 언어 속에 내재된 ‘이원 대립’의 공통 규칙이 사고, 생활,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후 그는 문명과 단절된 채 여전히 석기시대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오지의 원시 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삶 속에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규칙을 찾았다. 그리고 일생의 역작 <슬픈열대>에서 ‘야만’이라는 단어로 폄하했던 원시 부족의 삶 속에 ‘이원 대립’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류 공통의 규칙과 구조가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동서양의 신화 속에 비슷한 이야기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이원 대립’으로 설명된다. 문화와 언어에 인류가 지닌 보편 규칙이 존재한다면 수학이라는 조금은 낯선 언어로 만들어진 과학은 어떨까? 과학도 결국 인간이 만든 문화다.

‘상보성’이라는 과학이론은 ‘이원 대립’이라는 인류의 공통적 사고 습성이 반영된 것일까?(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선일보)
‘상보성’이라는 과학이론은 ‘이원 대립’이라는 인류의 공통적 사고 습성이 반영된 것일까? [출처 위키피디아, 조선일보]

하지만 야생의 사고 속 이원 대립 과정에는 이질적 두 세계를 넘나들며 조정자 역할을 하는 매개적 존재가 항상 등장한다. 가령, 부족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축을 통해 신성한 ‘불’을 얻게 되거나, 날개를 지닌 지상의 동물을 통해 천상과 지상이 연결된다. <인어공주>가 주는 슬픔은 소통할 수 없는 두 세계에 대한 조정자의 부재에 있다. 양자역학에서도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물리학자들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연결시킬 ‘숨은변수(Hidden variable)’를 기대했지만, 현재까지의 다양한 실험 결과는 그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다. ‘상보성 원리’가 여전히 불편한 이유는 인류의 이런 근원적 사고 습성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안데르센이 ‘천상’이라는 제3의 출구를 찾은 것처럼 물리학자 역시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동화작가와 물리학자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상보성이 슬프다.

 

김광석 교수

◇김광석 교수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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