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딸아이는 수 공부가 재미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기계적으로 알려주는 두세 자리 덧셈과 곱셈 규칙을 적용할 때면 항상 실수를 했다. 원리를 모르고 무조건 규칙을 익혀야 하는 아이에게는 기계적인 연산 과정이 집중할 수 있는 동기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연산 연습의 반복이 필요한데 아이는 오류가 생길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집중을 하지 못하고 스트레스까지 받았다. 그래서 화투를 알려줬다. 게임 규칙은 민화투로 했다.
민화투는 그림과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 재미있고 나중에 합산도 해야 한다. 그러자 나를 이기기 위한 승부 근성까지 발동해 연산에 고도의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광은 20점, 동물은 10점, 깃발은 5점, 일부러 똥까지 3점을 주기로 하니까 제법 복잡한 곱셈과 덧셈도 필요해졌다. 나중에는 홍단, 청단의 룰도 넣었다. 학교에서 연습하는 연산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는데도 아이는 본인과 내 점수에 대한 검산까지 모두 하려고 했다. 덕분에 복잡한 연산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나름의 교육 효과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아이는 나만 보면 매일 화투를 치자고 했다. 일본식 문양들 속에 내포된 의미도 아이에게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 주말에 딸아이와 함께 우리만의 화투를 만들기로 했다.
문구점에서 딱딱한 A4 카드지를 사서 잘라내니까 화투와 규격도 똑같았다. 우선은 화투의 원 문양을 보고 떠오르는 영감을 그냥 그려 넣기로 했다. 1월의 송학은 태양 빛을 받아 잠재 에너지(Potential Energy) 우물에서 튀어나오는 태양전지의 전자. 2월의 붉은 매화 사이에 있는 매조는 어린 왕자. 3월의 벚꽃은 탄소(C)와 수소(H)만으로 이루어진 유기 화합물. 4월의 흑싸리의 새와 문양은 지휘자와 콩나물 악보를 닮았다. 5월의 난초는 컴퓨터 부품처럼 전선 다발들이 얽힌 소자의 일부. 6월의 목단은 장미처럼 열정적인 삶을 노래한 에디트 피아프를 떠올리게 했다. 7월의 홍싸리 멧돼지는 TNT의 화학식으로. 8월의 공산은 거인의 몸통 위에서 돌을 굴리는 신화 속 주인공의 길고 느린 시간. 9월의 국진은 세균과 싸우는 혈액세포의 모습을 넣었다. 10월의 단풍과 사슴은 슈뢰딩거 고양이의 주변을 가득 채운 삶과 죽음의 양자 단풍잎. 11월의 오동은 자신이 직접 춤을 추었던 태양 왕 루이 14세. 12월의 비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과 철학자. 보름 동안 딸아이는 내 곁에서 작은 손으로 함께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고, 마지막으로 보존을 위해 테라핀 붓질도 했다.
모두 소중한 그림들이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해서 던지면 찰싹하고 달라붙는 기존 화투의 맛(?)은 없었지만 새로운 화투를 뒤집거나 고를 때마다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딸아이의 작은 손에는 에너지 우물에 갇힌 전자와 그리스 철학자들이 어린 왕자와 함께 섞여 있었다. 담요 바닥에는 유기물 열매가 맺힌 나무들이 춤추는 악보와 함께 뒤섞여 있었다. 감춰진 한 장을 골라 뒷면을 뒤집어 보면 삶과 죽음이 뒤섞인 양자 고양이가 나타나 신화 속 주인공의 운명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 같았다. 내 손에는 태양 왕 루이가 고요하게 춤추고 있었다.
과학, 철학, 예술이 뒤엉킨 기이한 화투판을 바라보면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어릴 적에는 다들 차이와 다름을 고유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직업으로 삼는 특정 분야 지식이 증가하면서 시선의 폭이 점차 좁아졌다. 너무 많은 분야에 대한 과도한 관심도 비효율적이지만 한 분야에만 최적화된 시선에만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분야에 대한 편견을 지니거나 공감 능력을 떨어지게 만든다. 흔히 ‘이알못’이나 ‘문알못’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이 말은 ‘다름’과 ‘차이’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기보다 소통불능의 경계와 장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소재로 자신만의 ‘화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혼돈의 화투를 만든 후 아이는 차츰 명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음 프로젝트로 미술사 화투를 만들었다. 그림 자료와 관련 정보를 읽으며 원시 시대 미술부터, 고대, 중세를 거쳐오는 긴 시간 동안 인류가 꿈꾸고 상상했던 자연과 신들을 나만의 화투 속 작은 그림으로 만드는 순간은 분명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공감을 경험하게 했다.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를 묘사했던 반구대 암각화나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따라 그리면서 우리는 그 옛날 석기시대 원시인들의 그림이 지금의 여느 화가 못지않은 세련된 곡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인들과 중세인들이 거대 구조물이나 성당의 벽화에 새기며 열망했던 신은 원시인들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그려낸 자연 속 동물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인간은 분명 마음속에 각인된 가슴 설레는 대상을 그려내고 싶은 본능을 지니고 있다.
수학과 과학도 다르지 않다. 모두 그 배후에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설렘과 열망의 서사가 숨겨져 있다. 한 줄의 수식에는 보이는 것들의 현상을 관측하고,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고, 다시 상상과 실재를 오가며 숨겨진 법칙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축약되어 있다. 수학과 과학이 지닌 이 독특한 방식의 시선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다면 과학사를 더듬어가듯 핵심적 영감을 수식과 함께 압축해 과학 화투를 손수 만들어 보라. 수식을 캘리그래피처럼 아름답게 바꾸고, 그 수식 하나를 얻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과학자의 삶을 떠올려 보라. 어떤 측면에서 과학도 문학이고 창조적 예술이다. 당신은 혹시 인류가 만든 이 위대한 유산을 여전히 교양과 문화로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는가?
◇김광석 교수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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