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도 다섯 손가락을 사용하면 5까지는 거뜬히 셀 수 있다. 하지만 만화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스머프, 스폰지밥, 겨울 왕국의 올라프, 로보카 폴리, 뽀로로와 함께 사는 아기 공룡 크롱조차 모두 한 손에 네 손가락만 지니고 있다. 일명 ‘네 손가락 그리기’는 미키마우스부터 시작되었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선 손동작 묘사의 편리성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 여전히 통용되는 나름의 규칙이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몇 개의 손가락을 지니고 있을까? 생일이나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간절하게 헤아리는 물리적 대상의 수는 몇 개까지 일까?
물리학도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네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의 원자, 두 개의 광자, 태양-지구-달의 3을 센다. 그런데 다음 차례에서 갑자기 별처럼 무한에 가깝게 많거나 일반화된 수 N으로 도약한다. 3은 어려워서 종종 건너뛴다. 그러므로 주로 세 개의 손가락 (1, 2, N)을 사용하며 3의 손가락은 드물게 사용하는 셈이다. 천상의 3위 일체는 조화롭고 완벽하다지만 인간이 살아가야 할 지상의 3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삼각관계와 삼자대면의 수많은 경험을 한 우리 사회는 삼권분립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고 각자의 마음속 세 개의 존재는 항상 싸운다. 물리적 상호작용을 하는 세 개의 운동 속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혼돈까지 존재한다. 단수와 복수로만 구분하는 유럽어의 습관처럼 어쩌면 인간에게 다수의 개수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실존의 1과 타자의 2만 있을 뿐이다. 두 개의 손가락만을 지닌 철학처럼 물리적 상호작용의 본질도 ‘둘의 문제(Two-body problem)’에 있다.
물리학 교과서도 처음 한동안은 한 개의 입자만 등장한다. 한 개의 물체에 힘을 가해 가속하고, 한 개가 회전하고, 허공 속으로 던져진 한 개가 남긴 운동의 궤적을 다룬다. 그러다 두 개가 나온다. 충돌을 통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힘을 경험하는 가벼운 두 개도 있지만, 멀리 있어도 서로를 당기는 무거운 두 개도 있다. 이제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회전하기 시작한다. 두 물체의 회전운동은 제3의 관찰자 시선에선 2차원적 면 위의 운동이지만 서로를 마주하는 둘의 상대적 관점에선 여전히 1차원적 직선 위 운동이다. 그렇다면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둘은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서로가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없을까? 알 수 있다. 간절히 당겨도 상대가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 멈춰있다면 둘은 서로 회전하고 있다. 당김의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원심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멀어지는 상대의 팔을 붙잡아 본 사람은 원심력을 이미 알고 있다. 둘의 문제는 연애를 닮았다.
서로가 주변을 맴돌고 있지만 둘의 질량 차이, 아니 간절함의 차이에 따라 둘 사이 힘의 균형을 이루는 중심은 달라진다. 즉, 둘의 ‘질량중심(center of mass)’은 둘이 떨어진 한 가운데가 아니라 질량이 더 큰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결국, 둘은 ‘질량중심’ 주변을 각기 다른 반경으로 돈다. 예를 들어 두 아이가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둘의 체중이 비슷하다면 ‘질량중심’은 둘의 중간쯤에 있고 둘은 아령처럼 그 주변을 회전한다. 이번에는 아빠가 작은 아이와 회전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제3의 관찰자 시선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자. 아이는 분명 아빠 주변을 돌고 있다. 하지만 아빠도 아이를 바라보며 작은 반경의 회전을 하고 있다. 대신 ‘질량중심’이 아빠 쪽으로 치우쳐 있어 아빠의 회전 반경이 작다. 이제 아빠의 상대적 시선으로 돌아가자. 아이는 아빠 주변만을 돌 뿐이다. 그리고 돌고 있는 아이의 질량은 가벼워진다. 물리학은 아빠를 기준으로 환산한 아이의 질량을 ‘환산질량(reduced mass)’이라 부른다. ‘환산’은 ‘줄어든(reduced)’의 번역이다. 가령, 80kg 아빠 주변을 회전하는 20kg의 아이의 ‘환산질량’은 16kg이다(1/16=1/20+1/80).
한쪽의 질량이 너무 큰 경우는 짝사랑이나 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구도자의 모습을 닮았다. 지구를 도는 달이나,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한쪽의 질량이 압도적으로 큰 경우 무거운 대상을 맴도는 이의 궤도는 외롭고 힘들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질량이 줄어드는 효과는 미약하나마 반드시 존재한다. 아마도 짝사랑이나 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구도자에게는 작지만 없지는 않다는 이 사실이 큰 위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무거운 신도 인간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함께 회전하고 있는 것일까?
중력의 인력과 원심력의 척력이 균형을 이루는 원운동을 하는 동안은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회전의 매 순간 방향을 계속해서 바꾸고 있지만 똑같은 반지름이 변함없이 유지된다. 원은 모든 방향으로 평등하고 조화롭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천상의 행성들이 안정적인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밤하늘을 맨눈으로 관측해 얻은 행성의 궤도는 오히려 ‘밀당연애’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만 보자면 가까이 다가서다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으면 다시 다가온다. 면 위의 운동으로 보자면 파트너 주변을 맴도는 무용수 같다. 가까이 다가올 때는 빠르게 회전하고, 멀어져 있을 때는 느리게 회전한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타원의 모습으로 돌고 있다.
행성의 궤도 모양은 어떻게 결정될까? 물리학은 복잡한 2차원적 회전운동을 상대와 마주한 1차원적 거리에 담아 단순화시킨다. 또한, 거리에 따른 당김의 중력과 밀어냄의 원심력 대신 그 배후에 있는 ‘포텐셜 에너지’로 이해한다. 세상에 간섭받지 않는 절대 자유의 ‘포텐셜 에너지’를 0이라 하면, 가까이 다가설수록 더 강하게 끌리는 중력의 ‘당기는 포텐셜 에너지’는 0의 평지에서 음(-)의 계곡을 향한 내리막길이다. 반면, 원심력의 ‘밀어내는 포텐셜 에너지’는 올라가기 어려운 가파른 산이다. 서로 마주한 태양과 지구 사이에 내리막의 계곡과 오르막의 산이 공존하는 셈이다. 경사가 다른 산과 계곡이 합쳐진 '밀당 포텐셜 에너지'는 독특한 풍경을 지니고 있는데 상대와 아주 가까운 곳에는 가파른 절벽의 높은 산이 솟아 있지만, 그 바로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파여 있다. 계곡의 바닥은 상대에게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높아져 마침내 아주 먼 곳에 있는 0의 지면에 도달한다.
궤도 반경은 ‘총에너지(Total energy)’와 ‘밀당 포텐셜 에너지’를 비교해 알 수 있다. 만약, ‘총에너지’가 ‘밀당 포텐셜 에너지’ 계곡의 가장 낮은 바닥 높이에 있다면 오로지 그곳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상태다. 게다가 가장 낮은 바닥은 경사도 없다. 따라서 가장 낮은 바닥에 해당하는 둘 사이의 거리는 변하지 않으며 그 거리가 원운동의 반지름이다. 하지만, ‘총에너지’가 계곡을 채운 호수처럼 수면 높이를 올리면 ‘밀당 포텐셜 에너지’의 여러 지점을 옮겨 다닐 수 있다. 즉, 둘 사이 거리는 짧아졌다 늘어나기를 반복하며 ‘총에너지’의 수면에서 ‘밀당 포텐셜 에너지’까지의 깊이가 거리 변화의 운동에너지다. 결과적으로 이 조건은 거리가 주기적으로 변화하며 회전하는 타원궤도를 만든다.
원과 타원처럼 상대를 맴도는 닫힌 궤도운동은 속박이다. 속박은 자유의 0과 비교해 홀로 독립하지 못하는 음(-)의 결핍이다. 그러므로 닫힌 궤도운동의 ‘총에너지(Total energy)’도 음(-)이다. 그렇다면 ‘총에너지’의 수면이 0까지 차오르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상대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정해지지만 가장 먼 곳은 무한으로 열려있다. 그러므로 닫힌 궤도가 아닌 열린 궤도가 되며 그 모습은 포물선이다. 만약 ‘총에너지’가 지면보다 높은 양(+)의 값을 가진다면 쌍곡선의 열린 궤적을 만든다.
며칠 전 우리는 ‘나로호’ 발사 장면을 숨죽여 지켜봤다. 커다란 불을 뿜어내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발사체는 단순한 기계 덩어리가 아니었다. 파란 하늘을 가슴 시리게 올려다보며 희망의 공을 던져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지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 공은 처음 한동안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 보이지만 끝내 중력의 손아귀에 잡혀 되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가장 높은 곳에서 마침내 ‘체념’하며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각자는 아마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탈출’, ‘체념’, ‘추락’이 만든 포물선은 실패의 아픈 기억이다.
‘포텐셜 에너지’의 측면에서 ‘나로호’는 닫힌 궤도를 위한 ‘밀당 포텐셜 에너지’의 가장 낮은 바닥에도 도달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로호’의 ‘총에너지’ 수면이 ‘밀당 포텐셜 에너지’의 바닥 위로 차오르는 그 날을 희망해 본다. 원에서 타원의 모습으로 꿈틀거리며 지구와 ‘밀당’ 하는 그 순간과 ‘포물선’의 모습으로 지구를 탈출하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실패의 기억으로만 존재했던 지상의 포물선이 탈출과 자유의 새로운 상징이 되는 그 순간과 양(+)의 ‘총에너지’가 포물선을 쌍곡선으로 바꾸며 우주라는 신세계로 날아가는 모습도 꿈꿔 본다.
◇김광석 교수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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