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두 명의 교육대학원 신입생들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석사학위 논문을 교육학이 아닌 물리 실험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두 명 모두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어서 평일에는 실험할 시간조차 없었다. 종일 실험실에서 생활하는 이공계열 일반대학원생만 지도해 본 나로선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대부분의 입학 동기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나름의 열정이 느껴져 일단 지도교수 신청을 수락했다.
첨단 연구는 아니라도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초 물리학을 다루되 나름의 깊이도 얻을 수 있는 주제를 찾아야 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기본 원리를 다루지만 ‘실험’을 통해 이론과 다르게 드러나는 요인들도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고심 끝에 용수철과 측정 장치까지 모두 제작해 다양한 ‘진동’을 구현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며칠이 지나자 손재주가 좋았던 김쌤은 종이와 스테이플러로 용수철을 만들어 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종이 용수철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정성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안정된 탄성을 얻을 수 없었다.
“용수철은 당기거나 압축시킨 길이 변화에 비례해 복원력이 선형적으로 증가한다.”
교과서에 적힌 탄성의 법칙은 단순해 보이지만 막상 용수철을 만들려면 많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항상 ‘실험’이라는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이상적 진리가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혼돈이다. 우선 두꺼운 마분지 위에 자를 대어 규칙적인 금을 긋고, 종이의 두께와 접히는 공간도 면밀하게 고려해야 했다. 칼로 오려낸 긴 종이띠를 접는 과정에도 요령이 필요했다. 접은 종이 간격이 규칙적이지 않으면 불안정하고 복잡한 탄성을 지니게 되었다. 가벼운 종이의 흔들림을 잡아주기 위해 접히는 부분마다 스테이플러도 박아 넣었다. 하지만 이것도 규칙성이 없거나 비뚤어지면 무게 균형이 무너졌다.
원하는 소원 하나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었던 그 옛날 소녀들처럼 김쌤도 수많은 종이 용수철을 접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이나 출퇴근 길에서, 심지어 학생들과 수학여행을 다니던 며칠 동안도 쉬지 않고 접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것은 묵주나 염주 알을 반복해서 돌리며 무언가를 기원하는 종교적 행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런 종이 용수철 따위를 접어서 학위 논문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겠지만 사실 둘째를 임신한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에게 용수철 종이접기는 요동치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한 수행이나 기도였던 것 같다.
김쌤이 종이 용수철을 접는 동안, 유쌤은 용수철 진동을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쌤의 실험장치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수직 방향으로 매달린 용수철의 길이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고속 촬영기나 레이저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가격과 안전 문제가 있었다. 우리의 원칙은 중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저가의 부품들을 사용한 실험 장치를 직접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값싼 소형 초음파 장치를 사용하기로 했다. 초음파가 쉽게 반사될 수 있도록 용수철 끝에 면적이 넓은 CD 디스크도 달았다. 하지만 진동이 시작되자 용수철은 좌우로 비틀거리며 회전까지 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직 방향의 진동이지만 현실은 다양한 운동이 뒤섞인 혼돈의 진동이었다.
유쌤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셨다. 오랜 교직 생활은 베테랑이라 불릴 만큼 능숙했지만, 더 늦기 전에 물리에 대한 열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대입을 앞둔 고3 딸이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아이지만 노력에 비해 성적이 오르지 않아 힘들어한다고 했다. 어느 날 열심히 하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러운 딸의 뒷모습을 보다 대학원 진학을 마음먹었다고 했다. 대학교 때 배운 전공 물리 지식은 거의 다 잊어버리고 퇴직까지 그리 긴 시간이 남아 있지도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딸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유쌤도 불안했다. 막상 마음은 먹었지만, 실험은 여러 곳에서 문제가 생겼고, 학부 때 배운 진동의 복잡한 수식을 다시 공부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나름 폼나게 시작한 대학원이었지만 오히려 딸 아이에게 좋지 않은 모습만 보여줄 것 같아 종종 불안이 엄습했다. 유쌤은 이런 불안 속에서 매주 금요일 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 낮과 밤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어떤 날은 혼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유쌤은 필사적이었다.
다행히 김쌤은 실험에 적합한 종이 용수철 제작조건을 찾아냈고, 유쌤도 측정 장치와 관련된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했다. 마침내 종이 용수철의 진동으로부터 측정된 ‘길이변화’와 ‘속도’의 신호가 실험 장치와 연결된 화면에 실시간으로 드러났다. 용수철은 일정한 주기로 진동하지만, 공기저항 때문에 진폭이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용수철에 매달린 디스크는 ‘길이변화’가 피크(봉우리/골짜기)에 도달할 때 잠시 멈추지만(속도=0), 힘의 균형점(길이변화=0)을 지나는 순간에는 속도가 봉우리나 골짜기에 도달했다.
이런 진동을 유발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진동하는 매 순간 측정한 ‘길이변화’와 ‘가속도’의 짝을 좌표로 하는 점을 찍어보면 신기하게도 직선을 따라 분포한다. 참고로 음(-)의 ‘길이변화’는 수축이고 음(-)의 가속도는 속도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속도(a)에 질량(m)만 곱하면 힘(F=ma)이 되므로, 결국 용수철의 힘이 ‘길이변화’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용수철이 수축/팽창하며 길이가 변할 때마다 원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복원력이 매 순간 변한다. 힘이 변하면 가속도도 변한다. 가속도가 위치마다 바뀌므로 속도가 변한다. 그 결과 ‘길이변화’는 출렁거리는 진동이 된다.
조금은 낯선 방식의 (길이변화, 가속도) 좌표는 세월의 흔적과도 비슷하다. 이를테면 어제, 오늘, 내일의 각기 다른 시간에 처해있는 자신의 ‘위치’와 ‘가속도’를 추출하되 시간의 정보를 감추고 ‘벗어남’과 ‘가속’의 상태만을 기록한다고 상상해 보자. 오래된 장소나 물건에 남겨진 흔적은 시간이 매개되어 만들어졌지만 정작 시간이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대각선으로 그어진 직선 주변에 있는 (길이변화, 가속도) 점들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재현해 보면 대각선의 양극단을 오가다 점차 중심의 0으로 수렴해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대각선에서 벗어난 점들도 간혹 눈에 띈다. 이들은 단순히 실험 장치나 우연이 만든 잡음과 오차일까?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 과정은 아코디언처럼 겹겹이 접힌 종이 용수철을 길들이는 과정이었다. 이상적 진동은 대각선 위에서만 움직이지만, 종이 용수철은 팽창과 수축의 과정을 반복하며 대각선의 기울기와 미세하게 다른 값으로 맴돌다 차츰 대각선의 중심으로 수렴해 간다. 우리의 삶도 운명처럼 주어진 길에 조금씩 적응해 간다.
시간을 매개한 진동의 (길이변화, 속도)의 짝을 그려봐도 흥미롭다. 처음 먼 곳에서 멈춰선 채(속도=0) 출발한 여정은 회귀의 수축 운동을 시작하지만, 균형점을 빠르게 지나치고, 반대편으로 멀어져 잠시 멈춘 뒤, 다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 속도의 크기와 방향이 번갈아 가며 주기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반복된 여정에 존재하는 저항은 요동의 진폭을 조금씩 감소시켜 원점의 평화로 수렴하게 만든다. 이 모습은 겹겹이 포개진 장미의 꽃잎 속으로 파고들거나, 유일한 안식처인 어머니의 배 속에서 움츠린 아기의 모습을 닮았다. 김쌤과 유쌤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을지, 고3 딸아이가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지, 자신이 무사히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매일 종이 용수철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제례(ritual)처럼 반복된 그들의 용수철 종이접기와 실험실 버티기는 불안의 요동을 조금씩 잠재웠다. 상처나 불안을 극복한 마음의 평화는 정지가 아니다. 여전히 요동치는 작은 진동을 품고 버티는 침묵의 떨림이다.
이 기초 실험을 씨앗 삼아 김쌤은 여러 개의 종이 용수철이 연결된 복합진동을 멋지게 구현했고, 유쌤은 디스크에 자석을 달아 전자석으로 진동을 제어하는 내용을 심화시켰다. 김쌤의 둘째는 무사히 태어났고, 유쌤의 고3 따님도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마침내 가운을 입고 졸업하던 날, 유쌤이 내게 말했다.
“단순하게 보였던 용수철 속에 이렇게 심오한 것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김광석 교수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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