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교수의 감성물리 (6) - 임페투스와 운동량

『詩와 그림으로 읽는 감성물리』
낯설고 어려운 물리학을 동화처럼 들려줄 수 없을까?

김광석 승인 2021.10.20 22:30 | 최종 수정 2021.11.17 18:02 의견 0

 

움직이는 것들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유발시킨다. 떠오르는 태양, 위치와 모습이 바뀌는 밤하늘의 별과 달, 떨어지는 낙엽, 때론 파도의 힘으로 해안가를 굴러다니는 조약돌조차도 각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또한,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대상 역시 눈에 띈다. 오래된 시골집을 품고 있는 뒷산의 듬직한 모습이 그렇고 세월이 지나 찾아와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한 바다 풍경이 그렇다.

인간은 자연의 사물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자신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움직이거나 정지한 것들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감정은 문학, 철학, 종교, 예술의 형태로 표현되지만 물리학은 그것들과 비교해 좀 달라 보인다. 자연과의 교감 요소는 철저하게 배제한 후, 공기조차 제거한 진공 속에서의 운동을 다루고, 그 모습을 해독하기 어려운 수학의 언어로 묘사한다. 어딘가 비인간적이고 삭막해 보이는 물리학은 뉴턴의 고전역학을 통해 비로소 체계적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에는 철학과 종교가 혼재된 긴 과도기를 거쳐야 했다.

뉴턴의 역할이 물리학 탄생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 것은 분명하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이뤄냈다고는 볼 수 없다. F=ma는 고대 철학자들과 중세 신학자들을 거치는 동안 축적된 사유의 밑거름이 키워낸 인류의 결실이기도 하다. 뉴턴은 2천 년의 시행착오를 통해 무르익은 ‘운동량’과 ‘관성’이라는 시대적 담론을 수학의 언어로 정리할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뉴턴이 물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17세기는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 F=ma를 세상에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의 시선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생각이 허황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연과 우주를 탐구하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던 그들에겐 나름 치열한 고민 끝에 얻어낸 최고의 이론이었다. 어쩌면 인류에게 진정 소중한 지적 유산은 F=ma라는 공식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시행착오의 여정일지 모른다. 그들은 왜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조화로운 우주와 자연을 벗어나 숨막히는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무미건조한 충돌과 가속운동에 몰입하게 되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과 지상의 운동이 다르다고 믿었다. 즉, 천상의 행성은 순리에 따르는 것 같은 원궤도의 ‘자연운동’을 하지만 지상의 투사체에는 인위적 ‘강제운동’과 자유낙하의 ‘자연운동’이 함께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과 지상의 운동이 다르다고 믿었다. 즉, 천상의 행성은 순리에 따르는 것 같은 원 궤도의 ‘자연운동’을 하지만 지상의 투사체에는 인위적 ‘강제운동’과 자유낙하의 ‘자연운동’이 함께 존재한다.

투사체 궤적에 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력과 공기저항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힘이 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지상의 물질을 구성하는 4원소(흙, 물, 불, 공기) 중 상승하는 기질을 지닌 공기가 매 순간 투사체를 위로 밀어 올린다. 이런 인위적 ‘강제운동’의 일시적 도약이 지나고 나면 투사체는 몸의 재료인 ‘흙’의 땅을 향해 회귀한다. 그러므로 낙하운동은 순응의 ‘자연운동’이며 지상의 모든 물체는 ‘강제운동’과 ‘자연운동’을 거쳐 궁극의 목적을 향한다. 반면 천상의 운동은 지상과 다르다. 인간이 마시는 공기와 다르게 천상은 신과 영혼의 숨결이 내재된 제5원소 ‘에테르’로 채워져 있다. 또한 창조자의 조화가 내재한 그곳에는 ‘강제운동’이 없다. 따라서 행성들은 원운동이라는 ‘자연운동’ 상태를 지속할 뿐이다.

목적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이런 설명은 그의 명성만큼 꽤 오랜 시간 진리로 받아들여졌지만 후손들에 의해 조금씩 수정되었다. 우선 투사체를 치솟게 하는 원동력이 공기의 상승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운동을 시작하게 만든 대상으로부터 전달된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공기는 투사체를 상승시키는 힘이 아닌 저항력을 제공하는 매질이 된다. 따라서 저항이 없는 진공에서도 운동은 가능하고 진공은 오히려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이상적 공간이 된다.

대포가 포탄에게 혹은 손이 공에게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훗날 ‘임페투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물체 스스로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내적 원동력이나 동양철학의 ‘기운’과 비슷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즉, 여전히 물체 속에 의인화된 운동 의지가 남아 있으며 논리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투사체에 지속적으로 가하는 외부의 힘을 투사체 내부의 힘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하지만 ‘임페투스’가 무게와 속력에 비례한다는 가설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정의되는 뉴턴의 ‘운동량’ 개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또한 ‘임페투스’를 전달해 다른 대상을 운동하게 만든다는 발상은 ‘충돌’에 의한 운동의 변화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공기가 없는 이상적 환경을 설정하고 ‘충돌’을 통해 운동을 유발하거나 멈추게 한다는 논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다가온 공은 충돌을 통해 다른 공에게 운동량을 전달한다.
다가온 공은 충돌을 통해 다른 공에게 운동량을 전달한다.

가령, 동일선상에서 두 개의 공이 충돌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왼쪽 공이 정지해 있는 오른쪽 공에게 다가와 충돌하는 경우, 질량(m)에 속도(v)를 곱한 운동량(p=mv)이 전달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충돌 전후에 운동량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같은 크기의 운동량이 유지되고 있다. 다가오다 멈춘 공의 입장에서 보면 충돌은 자신의 운동량을 사라지게 하는 반발력을 일으킨다. 반면 정지 상태에서 운동을 시작한 공의 입장에서는 억지로 떠밀리는 것 같은 힘을 경험한다. 두 공이 접촉하는 충돌의 순간,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두 힘이 한 점에서 생겨났다 사라진 셈이다. 실제 짧지만 유한한 충돌 시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는 힘을 측정해 시간에 따라 누적하면 두 공에 대한 ‘충격량(impulse)’을 각각 구할 수 있는데 ‘충격량’의 단위가 다름 아닌 ‘운동량’이다. 즉, ‘충격량’은 충돌에 의한 운동량의 변화량이다. 비록 단위를 사용한 정의조차 없는 미숙한 개념이었지만 중세 철학자들의 ‘임페투스(impetus)는 ‘충격량(impulse)’과 ‘운동량(momentum)’의 씨앗이 되는 영감을 품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힘(F)은 운동량(p)의 시간적 변화”라는 진술이 좀 더 일반적이다. F=ma는 질량이 바뀌지 않는 특별한 조건에서 운동량 변화를 속도의 변화인 가속도(a)로만 해석하는 셈이다.

힘이 가해지지 않아도 정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힘이 가해지지 않아도 정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가오는 물체가 운동량을 전달해 줄 충돌 대상을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면 어떨까? 공기저항이나 바닥의 마찰이 없고 공의 질량 변화도 없다면 공은 운동량을 유지하기 위해 똑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즉, 운동량 보존법칙은 힘의 도움 없이 운동이 지속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운동의 지속은 그저 자신의 운동량을 유지하려는 상태일 뿐이다. 아무런 운동량이 없다면 정지한 상태로, 조금이라도 운동량을 지니고 있다면 고유한 그 움직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정지한 것과 움직이는 것의 기준도 상대적이다. 오랜 세월 한자리에만 머무는 산과 나무도 달리는 KTX 창문에선 시속 300km/h로 움직이며 여행자들은 고속 열차라는 공간 속에서 고요하게 정지해 있다. 결국, 관성의 본질은 운동량을 한결같이 유지하려는 보수성에 있다.

詩와 그림으로 읽는 감성물리 ‘관성의 법칙과 F=ma’ 중에서
『詩와 그림으로 읽는 감성물리』 ‘관성의 법칙과 F=ma’ 중에서

도시 속 일상의 모습도 동적이다. 분주한 출근길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고 도시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그렇다. 그래도 사람들은 각자 가슴 한구석에 변하지 않는 것을 하나씩 붙잡고 있다. 아마도 쉴 새 없이 변화를 강요하는 세상의 압박에 대한 심리적 반동 때문이겠지만 숨가쁜 일상의 속도감 속에서 변함없는 무엇인가를 지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 느리지만 확연하게 변해버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제와 오늘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자신도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꽤 많이 변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집 때문에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긴 세월 속에서도 한결같다고 믿었던 삶의 운동량이나 속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물리적으로 운동량이나 속도의 변화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동안 이끌어 왔던 삶의 질량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가속을 유발하는 힘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한 개인의 관성에 대항해 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변화를 유발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느리지만 천천히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 그 힘은 비록 느리지만 익숙한 속도들을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며 관성 같은 개인의 고집이 그렇게 변하고 수 세기를 거쳐 보수적인 사회의 편견이 그렇게 변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느리지만 가속도를 유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가해진 외력이 존재했다. 시간의 변화 속에서 한결같아 보였던 나와 당신의 속도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가속시킨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시대의 힘을 경험하고 있다.

김광석 교수
김광석 교수

◇김광석 교수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