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대뜸 “당구 잘 치시겠네요?”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다. 매끈한 공이 테이블 위를 굴러가다 “딱!”하는 소리를 내며 다른 공과 충돌하는 감각적 모습은 복잡한 물리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쉽게 공감을 주는 것 같다. 당구를 통해 ‘공간’과 ‘시간’이라는 변수로 표현되는 운동을 느껴볼 수도 있지만 나는 검도 연습을 하면서 고전역학을 체감한다. 당구에서는 큐대라는 긴 막대에 자신의 힘을 조절해 운동량을 공에 전달하지만 큐대가 공을 치고 난 이후에는 그저 공이 굴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행운을 기대하는 일만 남게된다. 즉, 큐대가 공을 타격하고 나면, 운동의 주체인 공은 타격을 하는 사람과 분리된다. 반면 검도에서는 본인이 타격의 주체가 될 뿐 아니라 온몸으로 타격을 느끼는 타격의 대상이 된다. 본인이 직접 당구공이 되어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 같은 생생한 경험을 하는 셈이다.
검도 초보자들이 호면을 처음 쓰면 한동안은 ‘우당탕 검도’를 한다. 창살처럼 면금이 시야를 가로막은 호면 속에서는 숨쉬기도 불편하고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처음 접한 답답함에 대한 두려움과 생존본능 때문에 초보자들 대부분은 무작정 칼만 휘두르다 금세 체력이 고갈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고 나면 동작이 달라진다. 요란스럽고 흥분한 모습은 사라지고 상대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어떤 방향의 기습 공격이라도 모두 막아낼 수 있는 최적의 준비 자세를 취한다. 심지어 숨소리조차 들키지 않으려는 정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이후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 오다 서로의 칼끝이 교차될 만큼 가까워지면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누구든 단 한 번의 발 구름만으로도 타격이 가능한 거리에서는 상대의 칼끝과 내 몸의 중심이 이루는 각도, 내가 서 있는 지금의 위치에서 도약할 수 있는 속력, 내 칼을 뻗어 상대의 몸에 닿을 시간을 고려해 자신의 공격이 성공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과 들숨으로 만들어진 공간과 시간의 틈새가 포착되면 계획대로 재빠르게 공격을 시작한다.
현재의 위치로부터 떨어진 목표지점을 향한 운동의 궤적을 예측하는 일. 이것이 바로 F=ma로 대표되는 고전역학의 핵심 내용이다. 속도는 시간에 따른 위치의 변화이고 가속도는 시간에 따른 속도의 변화이므로 가속도는 시간에 따른 위치 변화의 변화인 셈이다. 즉, 수학적으로 가속도는 위치를 시간에 대해 두 번 미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F=ma는 질량(m)이 정해진 상황에서 힘(F)이 어느 정도의 가속도(a)를 유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가속도를 시간(t)에 따른 공간의 함수 x(t)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면 동일한 가속도를 지닌 궤적의 함수는 아주 많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일한 변화율을 가지고 있지만 변화의 값 자체가 크거나 작은 경우는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속도를 안다는 것만으로 단 하나의 위치와 속도가 정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똑같은 가속도를 지닌 궤적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결국 F=ma를 통해 운동의 유일한 궤적을 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순간의 위치와 속도라는 두 종류의 조건이 필요하다.
검도에서도 정지 상태에서 타격 부위까지 움직일 몸과 죽도의 궤적을 예측한다. 바닥으로부터 발을 도약해 몸이 앞으로 나아가고 칼을 휘두르는 단계별 과정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도약 후의 중간 과정에서 계획을 변경하면 어깨와 팔에 힘이 들어가고 칼이 느려진다. 그래서 고수들은 최적의 조건을 찾는 탐색은 신중하게 하지만 일단 공격을 시작하면 도약의 순간 처음 마음먹은 초기 조건을 기반으로 타격을 위한 이후의 모든 동작을 결정한다. 즉,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가 움직이듯 도약의 초기 조건이 설정되면 이후에는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궤적’이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저기까지 공간을 가로지르는 곡선을 떠올리게 하지만 궤적은 각기 다른 시간의 꼬리표가 붙은 무수히 많은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거운 호구를 입고 검도를 해보면 공간의 궤적이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평소에는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도장 마룻바닥에 있는 것 같지만 몸이 허공 속을 날아가는 짧은 순간마다 마주하는 풍경은 완전히 다른 공간처럼 낱낱이 분리되어 느껴진다. 하나의 시간은 하나의 풍경을 지닌 고유한 공간을 제공한다. 수직 방향으로 향한 시간의 축과 수평 방향으로 펼쳐진 공간의 캠버스를 통해 매 순간 몸이 움직인 운동의 궤적을 남겨보면, 마치 각기 다른 풍경을 담은 낱장의 그림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것 같다. 삶의 궤적이나 역사는 시간이라는 수직 방향으로 곧게 자라난 나무의 몸통을 파고든 작은 벌레들의 치열한 흔적 같다.
몸동작과 칼이 제어되는 고수들은 처음 위치에서부터 목표물에 도달하는 시공간의 궤적을 정확하게 제어하며 예측할 수 있다. 실제 하수가 고수와 대련하는 경우, 마치 각본에 짜인 동작을 재현하듯 검도 고수는 자신의 공격을 모두 성공시키고 하수의 공격을 예상해 방어한다. 이렇게 검도 고수를 마주하는 것처럼 미래의 궤적을 모두 예상하는 존재는 의욕을 잃게 만들고 공포심마저 일으킨다. 19세기 초 프랑스 라플라스 집안의 피에르-시몽(Pierre-Simon de Laplace)이라는 학자는 처음 순간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물체의 운동 궤적을 정확히 예측해 낼 수 있다는 고전역학적 결정론을 전 우주로 확장시켜 생각했다.
“하나의 원인이 F=ma라는 규칙에 의해 미래의 운동을 결정한다면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아주 많기는 하지만 매 순간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운명처럼 태초에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우주 초기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F=ma라는 방정식을 풀어내는 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이 순간 우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운동을 이미 예측했을 것이다. 당신이 태어나 지금껏 살아온 모든 과정과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순간조차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모두 결정되어 있었다.”
이런 운명적 결정론은 이후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단어로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지만 후대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문제점들이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아주 많은 입자들로 구성된 우주 같은 경우 한 두 개의 공이 충돌하는 경우와 다른 혼돈(chaos)현상이 발생해 예측이 어려워진다. 또한 우리의 우주는 닫혀 있지 않고 팽창하며 탄생 초기에 비해 정보량이 증가하고 있어 특정 시간의 초기 조건은 미래를 예측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까지 가세해 결정적 미래를 확신하는 ‘라플라스의 악마’ 가설은 최근 수세에 몰리고 있다. 하지만 혼돈 이론, 열역학 제2법칙, 정보 이론, 양자역학을 몰랐던 19세기 결정론자들에게 ‘라플라스의 악마’의 문제점을 어떻게 지적할 수 있을까?
두 명이 진행하는 검도 시합은 이런 다입자계의 혼돈이나 미시세계의 양자역학 같은 첨단물리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로부터 자유롭고, 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고전역학적 결정론이 단순하게 작동하는 사례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자신과 상대의 동작 모두를 예측할 수 있는 두 명의 검도 고수가 서로 마주하며 시합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상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고수 A는 고수 B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방어 자세에 미세한 빈틈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수 A는 숨을 들이마실 때 몸이 즉각적인 반응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고수 B가 자신의 칼을 방어하기 어려운 곳을 조준했다. 한편 고수 B는 고수 A의 방어 자세에서 어떤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예선 때 고수 A가 타격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노출하는 빈틈을 기억해 내고는 의도적으로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빈틈을 노출시켰다. 그리고 고수 A가 이 미끼를 덥석 물기를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수 A가 준비 자세를 하는 칼의 각을 바꾸었다. 고수 B는 본능적으로 고수 A가 자신의 작전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자신이 자세를 바꾸면 고수 A가 자신이 그 작전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므로 기존대로 빈틈을 노출하되 A의 공격 이후 반격할 궤적을 머릿속으로 준비해두었다. 고수 A는 공격을 시작하기 직전 불현듯 이것이 B의 미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자신의 습관적 빈틈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B가 A의 공격을 방어한 뒤 역공하려는 작전이 실패하도록 A는 정지 자세에서 칼의 각을 미세하게 바꾸었다. 하지만 A는 자신의 칼 각도를 바꾸었는데도 B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점이 미심쩍어지기 시작했다.
“B는 모든 수를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처음 계획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마음이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고수 A와 고수 B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서로를 겨누기만 한 채 공격을 시작하지 못했다. 둘은 멈춰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무한 루프에 빠진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가상의 시합을 하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실제 제12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개인전 결승 경기에서는 무려 10분간 상대를 응시하는 침묵의 대치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렇게 ‘라플라스의 악마’ 문제는 예측의 주체가 예측의 대상에 포함되는 여부와 물질적 운동과 구별되는 ‘자유의지’의 존재와도 맞물려 있다. 만약 누군가 당신의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면 그 역시 우주의 일부이며 그 예측이 본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을 환기하자. 물리적으로 예측자와 예측 대상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둘은 분리할 수 없는 확장된 우주로 취급해야 한다. 사람들은 운명적 결정론을 통해 도전의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이번 생은 틀렸어”라는 방식으로 실패와 무기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한다. 비록 어려운 논리와 물리학은 잘 몰라도 새해에는 ‘로망롤랑(R. Rolland)’의 시를 읽고 용기를 내보자.
나는 존재하는 일체는 아니다
나는 허무와 싸우는 생명이다
나는 허무는 아니다
나는 허무 속에 타오르는 불이다
나는 영원한 싸움이다
전투를 창공에서 내려다보는 영원한 운명이란 없다
나는 영원히 싸우는 자유로운 의지다
◇김광석 교수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