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승인
2022.04.10 09:38 | 최종 수정 2022.04.1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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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교수님 한 분이 ‘굴절’을 설명해 달라고 하셨다. 경계에서 빛이 꺾이는 모습은 다양한 문학적 영감을 주지만 정작 꺾이는 원리가 궁금하시다는 것이었다. 광학을 공부하는 이공계 학생들도 굴절을 배운다. 굴절과 관련된 공식이 등장하고 기하학적 도형과 삼각함수도 나온다. 하지만 ‘굴절’이라는 현상에 대해 요구하는 문학적 감수성은 그런 식의 설명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운동회 때 서로 다리를 묶고 달리는 '2인(人) 3각(脚)' 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일본에서는 '30인 31각' 경기를 합니다. 30명이 옆 사람과 다리를 묶어 31개의 다리가 되어 하나의 선처럼 달려야 하는 경기에서는 당연히 협동심이 가장 중요하겠죠. 대열을 구성하는 모두가 하나의 선으로 움직이는 것을 물리학은 ‘결맞다(coherent)’고 표현합니다. 호수 위에 돌을 던지면 번지는 파문의 결, 기다란 자로 물 위를 치면 만들어지는 직선의 결. 모두 'N인(人) N+1각(脚)' 경기인 거죠. 대신 N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물이라는 액체는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니까요. 호수 위에서 번져가는 선들이 그 모습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대열이라는 선을 구성하는 점들이 모두 호흡을 맞추어야 합니다. 단합된 동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구령이 있어야 하고 물결 위 점 같은 구성원들은 그 명령에 충실히 복종해야 합니다. 강제성을 지닌 구령은 호수 위의 파동을 처음 만든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기다란 자로 수면 위를 일정 간격으로 치는 사람, 호수 위에 파문을 만드는 권력을 지닌 사람처럼 말이죠.
만약 호수가 잔잔하지 않고 아무렇게 요동친다면 파문이 날렵하게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구성원들이 하나의 결맞은 동작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반면 수면이 고요하다면 구성원 모두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구 하나 명령에 반항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에 복종이 생존방식으로 길들여진 것이죠. 그런 곳에서는 결맞음이 좋습니다. 그래서 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퍼져 가는 규칙적 파문을 만들어 냅니다. 매스게임처럼 말이죠.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처럼 결맞음성이 좋은 매스게임을 만드는 것이.
빛은 파동입니다. 그래서 물결처럼 빛도 결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번져오는 파동의 봉우리 부분만을 연결해 보면 하나의 선이 됩니다. 호수 파문의 선들은 파동의 봉우리 부분을 연결한 선들입니다. 빛의 파동도 전기력선과 자기력선의 봉우리를 연결하면 하나의 선이 됩니다. 물결 같은 빛의 결이 있다 상상해 보세요. 빛이라는 파동은 물결 같고, 물결은 'N인(人) N+1각(脚)'으로 다가오는 대열 같습니다. 이제 육지에서 하나의 선처럼 결을 잘 맞추어 이동하던 대열이 땅과 맞닿은 수면을 향해 비스듬히 다가온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들 모두는 육상에서 호흡을 맞추어 결맞는 선을 유지하는 것에 모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육지와 수면이 만나는 경계를 향해 비스듬하게 다가오다 대열의 맨 끝자락에 있는 한 사람이 처음으로 수면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기존에 해 왔던 것처럼 땅 위의 걸음걸이를 유지하는 상황이지만 시린 물속에 처음으로 발을 담근 이는 육상과 다른 물의 속성을 체험하며 갑자기 진행이 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 대열의 모양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차례로 대열의 다음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오면서 이제 하나의 대열은 마치 꺾인 나뭇가지와 같은 모양으로 변하게 됩니다. 육지에서 진행하는 대열이 한 걸음의 폭을 이동할 때 물속에 들어선 새로운 대열은 그만큼 이동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육지와 바다에서의 걸음 속력이 달라진 셈이다.
기존 시대를 살아온 보수적 사람들과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 이들과의 차이가 경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땅에서만 걸어 온 자들은 새로운 대열에 대해 사회의 균열을 일으키는 파행으로 취급하겠지만 물속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알게 됩니다. 물은 육지와 매질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새로운 매질에서는 육지와는 방향이 다른 새로운 대열을 만들어 냅니다. 물속으로 들어오는 이가 많아질수록 수면에서 만들어진 꺾인 대열의 모습은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하나의 모습으로 걸어왔지만, 세월이 흘러 속성이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사회는 굴절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문학과 예술에서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나면 작가들의 행보가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굴절하지 않습니까? 매질의 철학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겠죠. 정치나 사회도 유사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도 굴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계에서 꺾이는 빛처럼 말이죠.”
서로의 발을 묶고 한 줄로 늘어서
틀려서는 안 되는 구령에 맞추어
여러 개의 발이 모두 함께 동시에
결맞은 한 줄로 무작정 앞으로
그렇게 걸어온 지상의 여정이
마침내 다다른 땅의 끝에서
바다 향해 비스듬히 다가선 대열의 끝
물속으로 발 하나 들여놓은 그가
홀로 더디게 휘청거리는 순간
역사는 이제야 새 시대를 만나
두 번째
세 번째
차례차례로
물속으로 들어선 발들이 늘어가면서
한 줄의 대열은 가지처럼 꺾인다
바다의 대열은 땅의 것과 달라
경계에서 둘은 서로 변해 버린다
물속으로 들어서지 않은 자 알 수 없나니
새로운 시대는 매질이 달라
역사는 경계에서 굴절을 한다
◇김광석 교수는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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