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뭐, 이름 없는 새가 운다고?

포토 에세이 통산 1020호(2020.7.1)

이득수 승인 2020.06.30 20:54 | 최종 수정 2020.06.30 21:53 의견 0
평범한 풀밭, 저 작은 풀들도 모두 이름과 용도가 있느니.

 우리는 흔히 이름 모를 새가 운다, 이름 없는 풀벌레가 운다, 라는 말을 하고 그러려니 듣곤 합니다. 또 제1 세대의 그 유명한 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의 <사슴>이란 명시를 쓴 가장 고고하고 신비한 여류시인 노천명은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란 또 한 편의 명시를 써 식민지의 지치고 외로운 젊은이들이들에게 <이름 없는>이란 하나의 탈출구를 제시해 모두들 아편(阿片)처럼 빠져들기고 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현실적으로 이름 모를 새나 이름 없는 풀벌레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틀리기보다는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자연이나 시골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단지 제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뿐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새나 풀벌레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태초에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에서 살아가던 원시인들은 한 마리의 짐승이 얼마나 사나운지, 그래서 함부로 덤비다가 사냥은커녕 도로 잡혀 먹히는 사자나 호랑이, 또 맹독을 가진 독사에 대하여 일일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배워 잘 기억해야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슴이나 순록처럼 좀 빠르기는 해도 사람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힐 수 없는 좋은 사냥감에 물고기와 조개 같은 손쉬운 먹잇감의 이름도 가르치면서 또 한편 독이 있는 물고기나 조개류, 심지어 독성분이 든 과일이나 씨앗까지 일일이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가르쳤음에도 처음 보는 동식물에게 부주의하게 접근해 죽음을 당하는 수가 많아 원시시대에는 평균수명이 30세 미만이고 한 여자가 열서너 살부터 해마다 아이를 낳아 여남은 명의 자식을 두어도 불과 두셋 밖에 살아남지 못했답니다.

그럼 현대는 어떨까요? 현대의 어린이는 동식물의 이름을 부모를 통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림책을 통해서 배우고 청소년이 된 후로는 주로 동식물의 도감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그렇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아파트에 사는 현실에서 극소수의 어린이를 제외하고 야생의 풀과 나무나 새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수많은 동물학자, 식물학자, 육종학자들이 두꺼운 동식물의 도감과 분류표를 끼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뚜르르 꿰고 혹시 미발견신종의 생명체가 나올까 이목을 곤두세웁니다. 그렇게 학문적으로 이름 모를 새나 꽃이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현장에서는 아무도 그 이름에 잘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만 화석시대의  뼈나 씨앗을 보고 그 공룡이 육식인지, 초식인지 그 작은 씨앗이 떡잎식물인지 아닌지, 꽃이 피는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피는지, 아래서 위로 피는지 한꺼번에 피는 식물인지까지 일일이 밝혀놓으니 이름 없는 동식물은 감히 상상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고 주인 없는 산이나 신파극의 제목인 <임자 없는 나룻배>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그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아주 옛날 소수의 가족단위로 땅굴을 파거나 움집을 짓고 살던 시절엔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떤 낯선 사내들이 자신의 동굴이나 움막을 침입해 가축이나 양식을 빼앗고 심지어 아내나 딸까지 납치할지 몰라 늘 어둡고 침침한 곳에 숨어 살며 사방을 경계하는 <만인 대(對) 만인의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서로 마주 본다, 또는 동등한 자격으로 지낸다는 한자 서로 상(相)자를 살펴보면 만약 한 사내가 사냥을 하러 자기 집을 나서 조그만 언덕이나 우거진 나무나 떨기 숲을 만나면 가정 먼저 해야 되는 일이 나뭇가지나 덩굴 뒤에 혹시 어떤 매복자가 자신의 목숨과 여자를 노리기 위해 매복해 있지 않을까 아주 조심스레 나뭇가지 뒤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순간 반대쪽에서 또 한 사내가 혹시 이쪽에 창이나 칼을 든 사내가 자신을 지키지 않을까 살피다 문득 두 사람의 눈동자가 딱 마주쳐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씩 물러서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산다는 것, 살기 위해 길을 나선다는 것 또 누군가를 마주 본다는 일은 그렇게 끔찍한 일입니다.

따라서 주인 없는 <무주공산>이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시절에 함부로 남의 산에 들어가거나 나룻배를 타려다가는 당장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테니까요.

이득수, 이름 석자의 란 늙은 시인의 부호인 각종 카드, 여권과 사인
이득수, 이름 석자의 란 늙은 시인의 부호인 각종 카드, 여권과 사인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과 산천은 각자 이름이 있고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 역사시간에 인간의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고인돌과 선돌을 배웠는데 고인돌은 인간의 집단이 점점 커져 씨족이나 부족사회를 이루었을 때 그 지도자의 무덤을 크게 지어 부족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것이요, 뾰족한 바위를 솟대처럼 세워 멀리서도 보이게 해 여기는 자기부족의 산이요, 땅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계의 표지가 바로 선돌입니다. 좌우간 이 세상만물 어느 하나도 이름이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다음 과제로 넘어갑니다.

그럼 당대의 로맨티스트요, 인텔리인 여류시인 노천명은 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라는 말도 되지 않은 시를 썼을까요? 그녀가 그런 시를 쓴다고 이미 수십 년 쓰고 불리며 전 국민이 아는 그 <노천명>이란 이름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건 당시 여류시인 3총사를 이룬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 세 신식여성이 각각 소설가 이광수, 시인 김동환, 교수 김광진을 사랑했는데 그 세 남자가 모조리 가정이 있는 기혼자였다고 합니다. 그 중 모윤숙은 <렌의 애가(哀歌)>라는 너무나 아름답고 서러운 시를 남기고 춘원을 떠났고, 최정희는 모든 비난과 수모를 다 감수하며 김동환의 첩(妾)이라는 욕을 먹으며 그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인은 납북(拉北)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노천명은 하필 그 시절에 같이 어울리던 문인 모윤숙, 이헌구 등이 일경에 체포되는 암담한 상황을 맞아 차라리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라는 현실도피를 꿈꾸었지만 그 역시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힘겨운 이름의 무게를 지고 다니며 요즘은 이름을 상징하는 몇 가지 부호(符號)인 주민등록번호, 운전면허번호, 종합병원의 병원카드번호, 심지어 마트나 안경가게의 고객카드번호까지 수많은 부수적인 이름까지 지고 가야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 하루하루 제 이름의 무게가 무겁고 갑갑하지 않으십니까?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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