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한여름 낮의 꿈

포토 에세이 통산 1015호(2020.6.26)

이득수 승인 2020.06.25 14:03 | 최종 수정 2020.06.25 14:27 의견 0
잠에 빠진 마초
잠에 빠진 마초

오랜 가뭄에 바짝 마른 대지가 훅훅 열기를 내뿜는 오후 텔레비전 뉴스에서 폭음과 기상이변의 보도가 이어지는 날 그래도 단 몇 페이지라도 대하소설 <신불산>의 교정을 보려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눈앞의 글씨가 점점 작아지다 이제 줄 전체로 흔들리더니 마침내 잠이 든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툭,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뜨니 자판 위에 안경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괜히 무안해진 제가 정신을 수습하고 서재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오동나무 넓은 이파리 아래로 건너편 언덕의 대밭이 마치 불이라도 난 듯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야, 엔간히 좀 눌러. 이 더운 날 겨우 좀 잠이 들려다 너희들이 위에서 누르는 바람에 번번이 잠이 깨잖아? 하나도 아닌 둘이서 말이야!”

나처럼 선잠을 깬 겨울용 새 주둥이(도리구지)모자가 한탄을 하는데

“무슨 소리? 나는 지난가을에서 겨울을 거쳐 봄까지 줄곧 밑에 깔려 고생을 했어. 거기다 너네들은 겨울용이라 무겁기는 좀 무거워?”

졸다 깬 창가의 모습
졸다 깬 창가의 모습

불과 며칠 전에 위로 올라온 여름철 중절모도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자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연산동의 서재에 있을 때는 할아버지가 날마다 불을 켜고 날 애지중지한 데다 할머니가 가끔 물걸레로 닦아주기도 했는데 명촌리로 이사 오고는 완전히 잊었나 봐. 벌써 6년째 불 한 번 켜지 않고 방치해버렸어. 노란 강아지 마초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이렇게 버려져 있었어.”

기역(ㄱ)자로 구부러진 탁상전등 스탠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아무 생각 없이 버려둔 나의 물건들도 나름 외로움을 겪는구나! 그리고 여름 한낮에는 무더위에도 지치는구나!)

측은한 생각이 들어 조용히 한숨을 쉬고

“할 수 없지. 이럴 땐 음악이나 들으며 다시 잠을 자는 수밖에...)

휴대폰의 <자니뮤직>에 들어가니 마침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 보여 들어가니 어찌 된 셈인지 결혼식장에서 늘 듣던 단따따따 단따따따 <결혼행진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니, 이 찜통더미에 이 무슨 음악소린가?)

무안해서 밖으로 나오니 평소 제가 앉아 쉬던 라꾸라꾸의자도 마초의 밥그릇과 개밥을 퍼오는 양재기도 모두 비뚜룸한 자세로 잠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늘이 든 데크 끄트머리에서 잠이 들었던 마초는 괜히 잠을 깨운다고 원망스레 쳐다보고 새로 지은 원두막에 모기장을 치고 누운 아내는 완강히 사진촬영을 거부했습니다.

녹음이 무르녹는 앞산
녹음이 무르녹는 앞산

그러자 눈길을 돌리는 순간 새파랗게 깊은 천심(天心)과 그 파란 숲에 둘러 사인 그림 같은 이웃집과 추녀에 매단 빨간 사파이아 꽃이 한가롭고 평화롭기가 그림 같았습니다. 가는 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의 땀을 씻어주는 순간 마침내 숲속에서 뻐꾹! 난데없이 뻐꾸기가 우는 소리를 신호로 몇 마리의 작은 산새들이 낮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제 서야 냉수에 세수를 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켰습니다.

해수욕을 즐기며 몸매를 뽐내는 젊은 연인들이나 하동(夏童)들을 뺀다면 여름더위는 겨울 못지않은 난관이자 장벽입니다. 이럴 때는 무엇을 이루기보다 그저 살아 넘어가기가 제일 큰 과제입니다. 조물주가 강추위에 고생하는 동물들을 위해 여름을 만들자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과 교황은 늘 일만하는 서양인들을 위해 일요일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조선의 무지렁이 백성들은 무언의 약속으로 5일 장(場)을 만들어 농부와 아낙은 물론 머슴 돌쇠와 하녀 삼월이까지 하루를 쉬게 만든 것이지요.

이득수 시인

현대에 들어오자 산업사회의 서양인들이 자동차를 개발하고 바캉스를 즐기자 그 전부터 폭포나 개울을 찾아 세족(洗足)을 즐기던 조선의 선비들이 한술 더 떠 복달임을 만들었는데 지방에 따라 닭이나 민어, 수박을 그 재료로 삼고 현대의 젊은이들은 에어컨이 빵빵한 커피숍을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혹시 올여름 제가 집을 비울 때 우리 등말리에 개장수가 나타날지 제일 걱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병든 저보다 죄 없는 마초의 여름 넘어가기가 더 힘든 셈인데 초복이 하루하루 다가와도 녀석은 무사태평 그저 할아버지가 산책이나 데리고 나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주눅 들고 생활고에 지친 시민들은 올해만큼 괴로운 여름이 다시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여름나기는 어떤가요? 굳이 푸시킨의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아니더라도 되도록 많이 쉬고 많이 자면서 우짜든동 이 여름을 잘 견디고 행복한 가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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