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또 하나의 이름, 본관(本貫)과 택호(宅號)

포토 에세이 통산 1011호(2020.6.22)

이득수 승인 2020.06.21 21:32 | 최종 수정 2020.06.21 21:53 의견 0
지화리 경주 이씨 양반가문의 상징 제실(祭室)
지화리 경주 이씨 양반가문의 상징 제실(祭室)

간월폭포와 간월사지(址)를 찾아 쉬엄쉬엄 걸어가던 산책길이 작천정 드넓은 반석과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름은 뭐고 대의명분은 무엇이며 왜 이름을 알리거나 남기고 또는 숨겨야 하는가의 문제로 자꾸만 옆길로 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산책이란 게 가다 힘들면 쉬기도 하고 샛길이 나오면 흘낏거리기도 하고 때로 비바람을 맞아 되돌아오기도 하는 만큼 이 산 좋고 물 좋은 계곡에서 어화둥둥 또 한동안 옆길로 빠져보기로 하겠습니다.

일흔 살이 되도록 살아오며 제가 남긴 성과가 무어냐고 자문할 때 제 스스로 서슴없이 내세울 수 있는 일이 바로 서기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우리집안의 족보를 국한혼용의 가로체로 바꾼 일입니다. 

몇 대 전부턴가 그저 먹고살기에도 힘든 빈농의 우리가문은 한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제가 명절에 고향에 가면 집집이 꺼내놓는 족보에 일가붙이의 이름을 찾아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주는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집안(같이 묘사를 지내는 15가구)은 영원히 제 뿌리나 이름조차 찾을 수 없을 같은 우려가 생겨 서기 2000년을 기준으로 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컴퓨터 디스켓으로 이어갈 수 있는 새 족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묵은 집안의 족보를 찾으니 조선 19대 숙종시절부터 4번이나 체제가 바뀌면서 내려온 구족보가 종가에 있었고(우리 5대조가 삼동면에서 서당을 열 정도로 선비였다고 함) 거기에 각 세대별 호적등본, 제적등본, 주민등록등본을 제출받아 해방 이후 15가구 100여 명의 생활을 재구성해본 것이었습니다. 

청헌이란 아호를 가진 어느 시골선비의 비석
청헌이란 아호를 가진 어느 시골선비의 비석

그래서 여러 자료를 대조해보다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김녕 김씨로 알려진 제 할머니와 청송 심씨로 알려진 제 백모님이 똑 같은 경주 심씨 김순이(金順伊)로 적혀 있었는데 그 이유는 6.25때 빨치산에 의해 삼남면사무소가 불타 호적이 사라지자 주민들의 진술에 따라 대충 재조립하다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제 증조모부터 윗대는 일체 이름이 없이 시집온 며느리들은 그냥 밀양 박씨, 경주 최씨, 밀성 손씨 등으로 적혀 아예 이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우리의 할머니들은 이름조차 없었는지 곰곰 생각해보니 옛날 한 평생 같은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시절에는 남자는 이미 자신의 씨족이 사는 고향인 본관(本貫), 즉 경주 김씨, 밀양 박씨 자체로 얼마나 넓고 풍족한 고장의 융성한 집안인지 그 본바탕을 나타낸 것이라 그 본관과 성씨만 알아도 뿌리가 있는 집인지 서로 교류를 하고 사돈을 맺을 만한 집안인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내의 이름을 마을에서 부를 땐 본관이나 성(姓) 또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00어른이라고 아내의 친정을 앞에 붙인 택호를 불렀습니다. 물론 여자도 00댁등 그 친정마을이름을 앞에 붙이고요.

물론 요즘도 자모회에서 만나는 젊은 주부들은 각각 00엄마로 불러 사회인이 되어 만난 사람끼리의 어색함을 커버하지만 옛날의 부인네들을 아무개 댁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석 뒷면-거의 모두가 무슨 벼슬을 지낸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학덕과 효행이 높고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며 명망 있는 선비와 교류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음.
비석 뒷면. 벼슬을 지낸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학덕과 효행이 높고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며 명망 있는 선비와 교류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음.

그건 한 집안의 가장인 사내나 그 집의 내면을 살필 때 남자는 이미 본관으로 그 속사정이 대충 알려진 데다 오래 같이 살아 살림살이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아는데 비해 자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처가가 부자동네인지 벼슬을 한 집안인지 아니면 그냥 한미한 집안인지가 이웃에게는 또 하나의 관심사이자 그 집안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슨 마을 무슨 성씨의 아내이냐에 따라 그 처가의 지위나 재산에 인품까지가 포함된 완전한 평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농경사회에서는 어느 집안의 어떤 아내를 얻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 실례를 들면 우리 어릴 적 한 50호의 마을엔 명촌댁, 반천댁 등 제대로 된 택호가 없이 보깡구집, 미짱엄마, 동사집, <상투쟁이영감>, <까부리 박손>으로 불리는 집이 7, 8호 있었는데 이는 전부터 마을에 살던 토박이가 아니라 해방과 6.25를 거치며 어디에선가 묻어와 언양장터가 가까운 우리 마을에서 섭호(셋방)살이를 하며 하루살이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하대(下待)하던 호칭인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철에 어디선가 새색시가 시집을 오면 그 친정마을이름을 따 택호를 붙여주는데 그걸 성혼(成婚)례라고 불러 술과 음식을 가득 차리고 마을 아낙들을 넉넉히 잘 대접해야 비로소 붙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택호도 친정마을의 이름을 따라 무슨, 무슨 골(谷), 들(平), 내(川)을 붙여 그 친정마을이 좁은 골짜기냐, 넓은 들판이냐, 또 버들이 우거진 냇가인가를 따져 먹고살 만한 고장인지 아닌지 가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중 품격 있는 택호는 높은 산을 등지고 마을 넓은 들을 에둘러 하천이 흘러가는 넉넉하고 포근한 고장, 선비들이 살만한 마을 촌(村)자가 붙은 택호를 으뜸으로 쳤는데 다행히 우리 어머니는 지금 제가 사는 경주 김씨 집성촌 양반마을에서 시집와 명촌(鳴村)댁이 되었고 제 이웃에 사는 누님은 태화강 강가인 버든마을에서 시집왔다고 좀 격이 떨어지는 평천(平川)댁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객지에 살다 명절이나 무슨 일이 있어 고향에 갈 때 저는 명촌댁 <둘째아들임>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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