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릴 적 수많은 위인전을 읽으며 인류를 위해 헌신하거나 업적을 남긴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익혔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안중근의사 등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 들어 역사를 배울 때가 되면 히틀러나 무솔리니, 진시황제 같은 수많은 폭군과 살인자의 이름 즉 악명을 외우게 됩니다. 그러다 신문을 읽을 정도의 사회인이 되면 요즘 미성년자성착취범 조아무개나 엽기적 살인자, 전처자식을 죽인 비정한 어머니의 이름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영원한 사랑의 실천자 페스탈로치, 남수단의 성인 이태석신부 같은 이름 그 자체로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삶도 더러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좋은 이름을 남기거나 나쁜 이름을 남게 되는 것이 모두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20세기 초 세계의 연극과 패션을 주도한 이사도라 던컨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그녀는 어느 자동차 시승(試乘)식날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너무 길고 멋진 스카프를 바람에 날리다 갑자기 그 스카프가 목에 감겨 질식하고 말았습니다. 자의는 아니지만 한 순간의 소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름다운 외모와 자유로운 영혼이 엉뚱하게 죽은 이름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무성영화 시절의 세계적인 스타 그레타 가르보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유럽 스웨덴출신으로 가장 아름다운 금발과 흰 피부, 벽안의 눈동자와 늘씬한 몸매로 그녀는 일순간에 세계인, 특히 남성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초창기 서부영화의 작부(酌婦)로 자주 출연한 그녀는 그 매혹적인 몸매와 얼굴로 무지하고 흉포한 서부의 사나이들의 품에 예사로 안기며 입술을 맡기고 술을 따라 그 모습을 접한 조선의 한량(閑良)들이 가르보란 이름을 빈대 갈(蝎)자 갈보로 불러 아무남자에게나 몸을 맡기는 술집여자 <갈보>의 어원이 되게 했다니 한국남성의 순발력이 참 대단한 셈입니다. 거기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양갈보, 똥갈보가 다 나오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에서 그렇게 천하게 불리던 그레타 가르보는 그녀의 미모가 여성으로서 전성기를 지나 하강곡선을 그리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톱스타인 세상 남성들에게 자신의 늙어가는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고 돌연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조용히 늙어 죽었다는 겁니다. 한때 세계 남성의 연인이었던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지키기 위해 참으로 많은 것을 양보하며 전설적 연기자, 신비의 여인으로 남은 것이지요.
우리는 앞의 두 여인 이사도라 던컨과 그레타 가르보를 통하여 한사람의 이름이 어떻게 남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의 삶과 이름이 반드시 더 훌륭하다고 단정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말단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그저 수수하고 평범하게 지내면서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경우를 더러 본 일이 있어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부산 서구청의 문화관광과장을 할 때 한문을 좀 배운 자로서의 책임이랄까 사명감으로 서구산하에 미처 발굴되지 않은 문화자산을 발굴하려고 남들이 다 축 늘어져 쉬는 삼복더위에 운전기사와 사진사를 겸한 직원하나와 3개월 동안에 무려 50건의 대상물을 둘러보고 14건의 문화재를 발굴 영구보존으로 남긴 일이 있는데(이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꼭 해야 했던 일임) 그 때 깜짝 놀란 일입니다.
지금 서대신동 1가 옛 서구청 아래의 좁은 전통시장을 지나면 동사무소와 새마을금고가 있던 골목입구에 오래 된 우물이 하나 있고 우물 앞에는 작은 기념비가, 우물지붕에는 그 유래를 적은 현판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그 내용을 꼼꼼히 조사해본 결과
정옹급수공덕비<鄭翁給水功德碑)>로 새겨진 그 비(碑)에는 1945년 해방이 되어 단기간에 귀국한 수많은 귀국동포가 부산의 고급주택가인 대신동 변두리에 판잣집을 짓고 몰려와 인구가 날로 늘어 급수난이 심각하자 당시 서대신동에 살며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양산출신의 정(鄭)모노인이 자비를 들여 우물을 팠다는 기록이며 현판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민이 발 딛을 틈도 업이 밀려들자 그 정옹이 자비로 우물을 개축하고 빨래터까지 만들었다는 감사의 기록이었습니다.
우리가 장의차에서 자주 듣는 회심곡에는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날 때 남을 위하여 무얼 했느냐의 공덕에 따짐에 있어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급수공덕이고 다음이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활인(活人)공덕, 길이 끊어진 곳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을 월천(越川)공덕이라 했는데 한 평범한 상인이 자비를 들여 소문 없이 우물을 판 일이나 그걸 굳이 알리려 하지 않아 이웃들이 아주 검소한 표지로 감사의 뜻을 나타낸 점이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 그분은 진작 돌아가신지라 그 자손을 찾아내어 작은 기념행사라도 열려하니 역시 명문의 자손이라 그런지 번거로운 행사를 사양했습니다.
또 젊어 한 번은 연산1동 사무소에 근무하며 지금 경상전문대 앞산의 산불을 감시하고 방화선(防火線)의 풀을 베다 무너진 성황당을 복원하게 되었는데 아주 오래전 마을의 공동물품인 잔치나 초상에 쓸 상(床)과 그릇, 상여(喪輿)를 보관하던 창고가 무너져 주민들이 십시일반 복구작업을 한 찬조자 명단을 적은 판자가 나온 것입니다. 떡 한 되, 백주(탁주) 한 말, 목재 10재(材)등 굉장히 소박하고 실질적인 물목과 함께 한삭불이니 김돌쇠, 강입분이니 하는 정겨운 이름의 적혀있어 그 판자를 보는 것만 해도 거칠고 인정 많은 텁석부리 사내들과 방금 그 하얀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마시는 것 같은 넉넉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요. 억지로 이름을 남기려 해도 어차피 바람처럼 사라질 것, 정옹처럼 향기롭게, 토곡마을 농부들처럼 다정한 이름으로 남는 게 훨씬 더 아름다운 일 아니겠습니까?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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